이해찬 전 총리 낙마 이후 단절됐던 당청 간 소통기구가 8일 재개된다. 김근태 당의장, 김한길 원내대표, 한명숙 총리,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오후 '4인 모임'의 첫 회동을 갖고 향후 모임의 진로와 의제 등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정청 소통기구가 마련됐으니 이제 잡음은 훨씬 덜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못 만나서 생긴 문제더냐"는 냉소적 반응이 벌써부터 교차하고 있다.
'8인회' '11인회' '12인회' 그리고 '4인회'
지난 6일 청와대 당정청 오찬 회동에서 결정된 이 모임의 근원은 지난 2004년 7월 시작된 '8인 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11인 회의' '12인 회의'로 확대된 이 비공식 기구는 '실세모임'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당정청의 실세들이 총집합한 것이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12인 회의' 시절의 구성원은 △당에서는 문희상 당시 의장, 정세균 원내대표, 원혜영 정책위의장, △정부에서 이해찬 국무총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복지부 장관, 정동채 문광부 장관, 천정배 법무장관, △청와대에서 김우식 비서실장, 김병준 정책실장, 이강철 시민사회수석,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었다.
이 모임의 참석 기준은 직책이 아니라 인물의 비중에 따라 정해졌다는 점에서 참석자들은 범여권 안팎에서 실세로 규정됐다. 정부 사이드에서는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 등 부총리들도 참석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 '8인 회의'로 출범할 때는 청와대 김우식 당시 비서실장, 김병준 정책실장 등도 포함되지 않았다.
노 대통령도 이 모임에 종종 참석해 무게를 실어주었다. 이 모임을 통해 '대연정'론이 흘러나오기도 했고 삼성 X파일, 아파트 분양원개 공개 문제, 북핵 문제 등 광범위한 정국현안들이 이 모임에서 다뤄졌다.
당시에는 야당들도 이 모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 대통령이 연달아 모임에 참석했던 2005년 7월 한나라당은 "법적 근거 없는 12인 회의를 즉각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12인 회의는 우선 구성기준이 모호하다"며 "국정논의보다는 정권연장 대책회의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밤중에 모여 앉아 논의하고 결정하면 국가공식기구인 국무회의는 무엇이고 청와대 수석회의는 무엇이며,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무엇인지 참으로 걱정된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12인회'와 '4인회'의 차이는?
야당의 이런 비판이 반증하는 대로 '대표 주주'들이 모인 12인회는 파괴력을 지녔다. 비공식 기구라는 비난을 듣기는 했지만 당정청의 의견을 확실히 수렴하고 조율해내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
하지만 '4인회'가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당은 당정청 소통기구가 '4인 모임'으로 가닥 잡힌 데 대해 "우리가 강력히 요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은 "모임 자체도 그렇고 4인이라는 구성원 숫자도 우리가 요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2인 모임에서는 당과 정부 양측에 장악력을 지니고 있던 이해찬 전 총리가 좌장 역할을 했었지만 이 모임에서는 누가 좌장 역할을 할지도 뚜렷하지 않다. 최근 김병준 전 부총리 파동에서 한명숙 총리가 거중조정을 하며 당의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해 나름대로 위상을 높였지만 이해찬 전 총리에 비하면 아직까지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또한 '4인'이라는 구성원 숫자가 현 단계 범여권의 상황에 과연 적합한지도 의문이다. 단출해진 만큼 집행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는 당정청 대표자들이 자기 공간을 장악하고 있을 경우에만 해당한다. 아직은 그 역할이 미지수인 한 총리나 대통령의 대리인인 이 실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김 의장과 김 원내대표이 여당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독자적인 공간이랄까 장악력도 아직은 미지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최근 '뉴딜' 추진 과정에서도 드러났듯 김 의장의 행보에 아직은 당의 전폭적 지지가 실려 있지 않다. 실용파로 분류되는 김 원내대표나 강봉균 정책위의장 등은 김 의장이 '우향 우' 행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전협의가 없었다"며 "원내가 할 일이 있고 당이 할 일이 따로 있는 법"이라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결국 당을 먼저 장악하지 못하면 권한은 없고 책임만 막중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번 '김병준 파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자신이 당의 대주주임을 확인시켰고, 잠잠하던 친노직계 의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과 같이 당-청이 얽히고 당내가 복잡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과거처럼 참석자 숫자를 확대해 중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청간의 일체감을 높이고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막상 참석할 만한 사람도 없고 선수(選數) 높다고 중진 의원을 보내봤자 모양내기밖에 안 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래저래 복잡하기는 매 한가지다.
'4인 모임' 빌미로 언로 제한될까 우려도
게다가 지난 6일 회동에서 '외부선장론'을 꺼냈던 대통령이 당 대표들을 얼마나 '대접'을 해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당 일각에서는 오히려 4인 모임을 빌미로 당의 언로가 제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일 오찬 회동에서 자신에게 '탈당 요구 가능' 발언을 한 문학진 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며 김근태 의장을 몰아붙였고 당정청 모임을 받아들이며 "당내에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지도부가 조정해줘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한마디로 '입 조심'하라는 것.
이에 대해 우리당의 한 의원은 "지금 다들 납작 엎드려 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하고 있다"면서 "김근태 의장이 청와대에 불려가서 완전히 군기 잡히고 돌아 왔는데 4인 모임을 통해 당의 의사를 전달하기는 커녕 대통령한테 원격조정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2인회 최종 국면의 멤버였던 한 의원은 "4인 모임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당의장과 대통령이 독대를 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4인회'는 8일 오후 국회 인근도, 청와대 인근도 아닌 용산에 있는 '백범기념관'에서 첫 모임을 갖는다.
권력투쟁'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당정청에 재확인시킨 대통령이 '문재인 카드'를 거둬들이며 당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갈등은 단지 수면 아래로 잠시 가라앉았을 뿐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바로 그런 어정쩡한 상황에서 이 4인모임 역시 다소 어정쩡한 모습으로 출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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