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돌아오는 교과서 검정이지만, 올해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일단 올해 검정을 통과할 교과서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을 주축으로 한 역사왜곡도 확산될 조짐이다. 태평양전쟁을 '아시아해방전쟁'으로 미화한 이들의 교과서 역시 문부성의 검정을 기다리고 있다.
또 한 번의 '교과서 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일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와 함께 일본을 방문해 현지의 상황을 들어봤다. <편집자>
"지금은 거의 휴지조각이 됐지만, 일본이 근린제국조항만 지켰어도 지금과 같은 교과서 논란은 없었을 겁니다."
지난 1일 오후 도쿄 진보초의 한 회의장. 20대 청년부터 70대 노인까지, 진지한 표정의 사람들로 회의장이 빼곡하게 가득 찼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발표가 4월 초로 다가온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 '어린이와교과서네트워크21'과 한국의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가 역사왜곡 교과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연 것.
▲ 지난 1일 도쿄 진보초에서 열린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관련 토론회. 참가자들이 다카시마 노부요시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프레시안(선명수) |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다카시마 노부요시 류큐대 명예교수는 '근린제국조항'의 이행을 강조했다.
근린제국조항(近隣諸國條項)은 1982년 일본 정부가 내놓은 교과서 검정 기준으로, 근현대사 기술에 있어 아시아 인접 국가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그 배경엔 외교 마찰까지 일으켰던 '2차 교과서 파동'이 있었다.
그해 6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바꿔 쓰도록 지시하는 '교과서 파동'을 일으켰다. 이에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이 강하게 반발하자, 일본 측이 사태 수습을 위해 내놓은 것이 근린제국조항이다.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는 "근현대의 역사적 사상을 다루면서 국제 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에서 필요한 배려를 하겠다"며 이 조항을 발표했고, 같은 해 11월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 기준으로 정식 채택됐다.
잊혀진 약속…문부성 고위 간부까지 "폐지해야"
그러나 동아시아에 국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의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발간한 교과서를 시작으로 일본의 근현대사 서술은 점점 우경화됐다.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 등 일본이 자행한 전쟁 범죄는 보수파들에 의해 '자학 3종 세트'로 매도됐고, 이에 관한 기술은 교과서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근린제국조항 역시 일본 극우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일본 교과서에 대한 주변국의 반발을 '내정간섭'이라고 치부해온 이들에게, 이 조항은 '폐지 1순위'나 다름 없었다.
급기야 지난 2005년 문부성 최고위급 간부인 시모무라 하쿠분 정무관(자민당 의원)이 "근린제국조항은 자학사관"이라며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검정해야 할 문부성마저 '폐지'를 주장하는 상황까지 온 것.
이런 상황에 누구보다 분노하는 것은 재일 한국인들이다. 토론회에서 만난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박유식 도쿄지부회장은 "일본의 폭력과 차별 속에 살아온 한국인들이 아직 일본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데,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모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시마 교수는 "근린제국조항이 발표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휴지조각 취급하고 있다"면서 "한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 교과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이 조항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사문화된 조항…이유는?
한때 일본 정부의 관방장관까지 나서 발표했던 근린제국조항이 이름만 남고 사실상 '사문화'된 까닭은 시모무라 정무관의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일본 정부가 이를 사실상 이행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조항이 애초 주변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사태 수습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연세대 신주백 교수는 "근린제국조항은 애초 일본의 '외교적 고려'에 의해 설치된 것이지, 침략을 반성하거나 교과서 검정 오류를 시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 새역모에서 발간한 후쇼샤판 역사왜곡 교과서. 태평양 전쟁이 '동아시아 해방 전쟁' 이며,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의 식민 지배 덕택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프레시안 |
일부 교과서가 '침략의 주체'를 명기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처리하는 서술로 전쟁 책임을 피해가도, 문부성이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검정에서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신주백 교수는 "이것이 문부성의 본심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점차 거세지는 일본 우익의 압력과 일본 사회의 보수화 역시 일본 정부가 선뜻 '결단'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당장 교과서 검정이 시작되자, 새역모를 비롯한 자민당 인사들은 각 지역 교육위원회에 자신들의 교과서를 채택해 달라며 로비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심화된 역사왜곡…내셔널리즘의 부활?
문제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할 교과서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일단 이번 검정은 60년 만에 개정된 일본 신교육기본법과 2008년 발표된 신학습지도요령의 규제를 받는 첫 번째 검정이다. 2006년 개정된 교육기본법은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강조해, '내셔널리즘의 회귀'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2008년엔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이 담긴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가 발표됐다. 지도요령은 교과서 집필의 '가이드라인'으로, 이번에 검정을 받게 된 중학교 교과서엔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이 기술될 수밖에 없다.
이번 교과서 검정을 신청한 새역모 역시 자신들의 교과서가 "신교육기본법과 신학습지도요령을 충실히 실현한 최초의 교과서"라고 홍보하고 있다.
"'배려'가 아닌 '반성'이 필요하다"
현재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교과서 검정에서 근린제국조항 준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신주백 교수는 "'외교적 고려'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근린제국조항은 일본 정부가 국제 사회에 스스로 한 약속"이라며 "일본의 국제적 위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문화 된 근린제국조항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한국과 중국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갈등 극복과 다자적 협력관계를 만드는 하나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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