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유신시절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재심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이어질지 주목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16일 긴급조치 및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복역한 오종상(69) 씨에 대한 재심 사건에 대해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특히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위헌법률 심판은 헌법재판소가 맡지만 긴급조치는 국회의 의결을 거친 '법률'이 아니어서 심사권이 대법원에 속한다는 해석이다. 대법원은 긴급조치에 대해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상으로도 위헌"이라고 밝혔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2년 선포된 유신헌법에 따라 1974~1975년 1~9호까지 발동됐다. 유신헌법은 천재지변이나 재정, 경제상 위기,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과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를 금지했고, 2호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이번에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오 씨는 1974년 5월 버스에서 반공 웅변대회에 참가하는 여학생에게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고관과 부유층은 국수 약간에 계란과 육류가 태반인 분식을 하니 국민이 정부의 시책에 어떻게 순응하겠냐"는 불만을 털어놓았다가 여학생의 제보를 받은 교사가 신고하면서 체포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7년 오 씨 사건에 대해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고, 3년여가 흘러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구속된 시점으로 따지면 36년만이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긴급조치 판결문 분석을 통해 판결했던 판사들의 실명을 공개해 논란을 빚기도 했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면소'가 아닌 '무죄'를 선고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심리에 앞서 원심에서는 "긴급조치가 이미 폐지된 법령"이라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렸었다. 면소 판결은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고 기소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어서 보상이 쉽지 않다. 대법원은 "법령이 폐지됐다 하더라도 당초 헌법에 위배되는 법령이라면 무죄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법원이 면소가 아닌 '무죄' 판결을 내려 형사보상의 길도 열리게 됐다.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르면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은 1000여 명에 달해, 이들이 재심청구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26명과 유가족 등 총 151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 및 면소 판결을 받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난 10월 520여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었다.
다만 대법원 판결은 재심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자 모두가 재심을 받으려면 재심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결과가 주목된다. 헌재가 최종적으로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려 긴급조치 자체를 무효화 할 경우 긴급조치 위반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이어질 전망이다.
다음은 진실화해위가 지난 2007년 분석해 발표한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요지의 일부 사례다. 지금의 잣대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유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을 산 경우가 허다했다.
◇탤런트 00: 77년 2월. 국방부 제작의 '새마을 새물결'이라는 영화에 육군사병으로 출연하던 중, 잡담을 하다 "000이 영화배우와 모종의 썸씽이 있다. 앞으로 육사에는 많은 혜택이 있을 거다"라고 발언.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1년에 집행유예 2년 선고.
◇점술가 000: 77년 6월. 집 앞에서 여대생 3명의 손금을 봐주다가 "자연법칙에 따라 모든 재산을 공동소유로 하는 공산주의 사회로 돌아가고 있다. 맑스주의 국가인 소련, 동독 같은 나라도 잘 살고 있다. 박 대통령은 1인 독재이며 빈부차가 심하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4년 선고,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광부 000: 77년 5월. 술마시며 대화하던 중 "박정희는 앞으로도 독재정치를 계속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국이다. 대대로 대통령을 할 것이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선고,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엿장수 000: 77년 8월. 광산고물상 영업소에서 종업원들과 사소한 다툼 끝에 폭력을 행사하고 "나는 이 세상에서 괄세받을 사람이 아니다. 박 정권은 물러가라. 중앙정보부는 무너진다. 김일성이는 내 형님이다" 등의 말을 함. 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노동자 000: 77년 8월. 대화중 "대통령은 날도적놈이다. 매호당 190만 원씩 빚을 지워 높았다. 22년이나 대통령을 했으면 됐지 내년에도 대통령을 하려고 하니 날도적 놈이다. 박정희 도당이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6개월 선고.
◇농부 000: 77년 11월. 마을 길을 넓히기 위한 새마을 사업장에서 부녀회장, 동장, 새마을 지도자 등이 일하는 것을 보고, "새마을 사업 때문에 배고파 못 살겠다. 현정부가 없어지든지 한 놈이 죽든지 해야지 이북은 잘 산다고 하는데 우리는 새마을 사업 때문에 못 산다"고 말함. 긴급조치 9호, 반공법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1년 선고.
◇노동자 000: 77년 11월. 술을 마시면서 대화 중 쌀막걸리 제조판매 조치에 대해 "쌀술은 내년 선거가 있기 때문에 나오지 선거만 끝나면 나오지 않는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물러나 있는 것은 내년 선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라고 부정이 없을 리가 있나"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1년 선고.
◇주부 000: 77년 9월. 대화 중 "000이 영화배우 000네 집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6개월,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선고.
◇상인 000: 78년 1월. 택시에서 "대의원선거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헌법 고쳐 유신헌법을 조작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3년,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1년6개월 선고.
◇행상 000: 79년 6월.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박정희 정권은 곧 무너진다. 박정희는 누구 손에든 죽는다.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은 김대중과 김영삼이다. 저번 선거 때도 김대중이 이겼는데 정부 조작으로 정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김일성 형님이 최고다"라고 발언. 긴급조치 9호, 반공법 위반. 1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선고. 2심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 선고.
◇상인 000: 79년 3월. 잡담 중, "000이 탤런트들과 사귄다"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노동자 000: 79년 1월. 술을 마시고 잡담 중 "박정희는 나쁜 놈이다. 박정권을 타도해야 노동자가 잘 살 수 있다. 박정희는 XXX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4년,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3년, 3심 징역10월 선고.
◇회사원 000: 78년 10월. 00무역 과장인 사람으로 술을 마시다 대화 중 "00무역은 000 용돈 대주는 회사다. 대통령이 하사금 주는 게 신문에 보도됐는데 그 돈은 전부 우리 회사에서 나간 돈이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
◇광부 000: 78년 7월. 대화 중 "000사건은 정부에서 예비군 설치법 문제로 국회가 반대하자 정치적 쇼를 한 것이다. 실미도 특수부대요원들이 1.21 사건에 동원됐다가 사살된 것을 항의하기 위해 유한양행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고위층에서 000이 식장에 들어갈 때 들여보냈다. 이리 열차사건도 정부가 벌인 쇼다" 등의 발언을 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3년 선고.
◇주부 000: 78년 12월. TV로 000 취임식 실황을 보다 "000가 여자 탈렌트들과 XX하고 다음 날 죽지 않을만큼 때려서 보낸다. 배우 000에게 별장을 사주었다. 000이 박 대통령을 쏴 죽이려고 한 것이고 000가 000를 쏘아 죽였다"는 등의 말을 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6개월 선고.
◇술집주인 000: 78년 8월. 동거남에게 "000은 내가 잘 아는 친구언니와 사단장 시절부터 애인관계에 있다. 영화배우 000는 000과 좋아지내는 사이여서 000부인이 해외로 쫓아보냈다"는 등의 말을 함. 긴급조치 9호 위반. 1심 징역 및 자격정지 4년, 2심 징역 및 자격정지 1년 선고.
◇농부 000: 78년 7월. 경북소재 모 다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정치는 잘 하는데 독재다"라고 말함. 긴급조치 9호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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