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리스를 완파한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덴마크는 이번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A조에서 포르투갈을 제치고 조 1위로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강팀이었으나 일본의 뛰어난 미드필드 플레이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일본은 두 골을 프리킥으로 뽑아내는 정교한 킥 능력을 과시했다.
혼다의 놀라운 활약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일본이 자랑하던 '프리킥의 마법사' 나카무라 슌스케(요코하마 마리노스)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찬 혼다 케이스케(24, CSKA 모스크바)였다. 카메룬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혼다는 이날 1골 1도움의 맹활약으로 일본의 16강행을 이끌었다.
전반 17분에 사실상 승부가 갈렸다. 일본이 왼쪽 측면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자 혼다는 지체 없이 왼발로 프리킥을 날렸다. 왼발목으로 때린 공은 회전이 전혀 없이 강하게 날아가다 골키퍼 앞에서 뚝 떨어지며 골망을 갈랐다.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직접 슛을 노린 프리킥으로는 박주영(AS 모나코)이 나이지리아전에서 기록한 골 이후 두 번째였다. 박주영의 골과 마찬가지로 '환상적'이라는 칭찬을 받기 부족함이 없는 골이었다.
▲ 오카자키 신지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한 후 기쁨을 나누고 있는 혼다 케이스케. ⓒEPA=연합뉴스 |
혼다는 그러나 그간 국가주의와 선후배 규율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대표팀에서 주전 자리를 확고히 꿰차지 못했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VVV펜로 입단식에서 그가 일본어 대신 네덜란드어로 자신을 소개한 것을 두고도 "사무라이 정신을 잃어버린 일본인"이라며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오직 실력으로 자국 내 논란을 잠재워버렸다. 과거 한국 축구계의 대표적 앙팡테리블로 꼽혔던 고종수, 이천수 등을 연상케하는 선수다.
혼다에 이어 전반 30분에는 J리그 최고의 프리키커로 손꼽힌 엔도 야스히토(감바 오사카)가 페널티 박스 전면에서 오른발 프리킥으로 추가골을 기록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16강행이 가능한 덴마크를 완전히 침몰시키는 골이었다.
덴마크는 후반 35분 욘 달 토마손(페예노르트)의 만회골로 한 점을 따라붙었으나 후반 42분, 오카자키 신지(시미즈 S-펄스)에게 추가골을 얻어맞아 추격 의지를 잃었다. 혼다가 페널티 박스 왼편에서 상대 수비 한 명을 제친 후 가운데로 찔러준 패스를 받은 오카자키가 텅 빈 골문으로 가볍게 밀어넣었다.
일본을 너무 얕잡아봤나
일본이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과 결과는 놀라운 수준이다. 딱 한 달 전인 5월 24일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무기력한 플레이로 완패한 그 팀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일본은 강한 공격력을 가진 카메룬,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강한 압박과 최대 아홉 명의 수비수를 두는 극단적 수비 전술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패스 플레이를 버리고 미드필드부터 이어지는 강한 압박과 빠른 역습 전술을 과시했다.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일본이 보여줬다.
그리고 이날 경기에서는 수비에 치중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특유의 미드필드 플레이를 선보였다. 공세에는 장기인 패스 플레이로 미드필드에서의 볼점유율을 늘려나갔다. 수비시에는 미드필드부터 상대를 에워싸 패스의 길목을 끊었고, 역습시에는 오른쪽 측면에서 혼다의 높은 볼키핑력을 지렛대로 상대 문전을 농락했다. 극과 극의 전술이 모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할 지경이었다. "파리떼 전술을 쓰겠다" "덴마크를 10대 0으로 이기면 좋을 것" "목표는 4강"이라는 오카다 감독의 호언장담이 현재로선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는 분위기다. 일본이 이렇게 좋은 경기력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을 정확히 꼽아 말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일단 체력이 돋보인다. 일본은 카메룬전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활동량을 보여줬다. 이는 네덜란드전 후반의 위협적인 역습을 가능케 했다. 덴마크전에서도 경기 후반에까지 지칠 줄 모르는 일본의 플레이는 무기력한 상대 미드필드진과 대비됐다.
상대방이 월드컵 이전 무기력했던 일본을 지나치게 얕잡아본 것도 일본의 선전을 가능케했다. 카메룬은 일본과의 경기에 제대로 된 전술조차 짜지 않은 모습이었다. 미드필드가 일본의 전방 수비진에 막혀 허리가 뚝 잘라진 채 공격진과 수비진이 완전히 단절됐다. 네덜란드는 경기 전 "많은 네덜란드 선수들이 스시를 좋아한다. 내일 밤에도 좀 먹었으면 좋겠다"(디르크 카위트)고 말할 정도로 일본을 노골적으로 얕잡아봤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네덜란드의 조별리그 경기 중 최악이었다.
덴마크의 간판 스트라이커 니클라스 벤트네르(아스널) 또한 "일본 정도는 당연히 이겨야 하는 것 아닌가. 토너먼트 상대가 궁금할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만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경기에서 좋은 슛찬스를 만들지도 못했다.
▲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남아공 월드컵 16강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한 후 기쁨을 나누고 있다. ⓒEPA=연합뉴스 |
아시아 도약 상징하는 일본, 8강도 가능?
한국과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첫 16강행을 확정한 일본은 내친김에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16강전에서 만날 파라과이가 이탈리아, 슬로바키아를 제치고 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강팀이지만 지금의 기세로서는 넘지 못할 산은 아니다.
일본의 도약은 아시아 축구에도 긍정적인 신호다. 유럽과 아프리카 축구가 유독 부진한 이번 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당당히 16강행 티켓을 거머쥐며 세계 축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는 곧 아시아 축구도 세계 무대에 통할 수 있음을 방증한다. 한국과 일본의 경기력이 오를수록 자연스럽게 아시아 다른 나라의 경기력도 좋아진다. 이는 대륙별 쿼터의 증가를 이끌 수 있다.
오카다 감독은 경기 직후 <요미우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16강 진출은 우선 최초의 목표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고 담담하게 소감을 밝혔다. 유독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특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오카다 감독은 평가전 내내 부진할 때도 덤덤한 표정으로 "목표는 4강"이라고 호언했다. 허정무 감독 또한 16강행을 확정한 후 "(16강 진출로는) 아직 양이 차지 않았다. 갈 데까지 가 보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아시아 축구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비상할 수 있느냐가 남아공 월드컵을 관전하는 새로운 재미로 추가됐다. 16강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일본 이기는 게 그리 불편했나 "너무 보이게 크로스를 하고 있는 덴마크인데요…." "프로선수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뒤집을지 방법을 알고 있을 텐데요" "네, 덴마크 서두르지 않습니다. 자기 플레이를 펼치고 있어요." 일본과 덴마크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중계하는 <SBS> 해설진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덴마크가 0대 2로 끌려가자 조별리그 탈락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이날 박찬민 캐스터의 중계는 지나치게 편파적이었다. 후반 13분 덴마크의 야콥 폴센이 때린 중거리슛이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자 "조금씩 조금씩 골문 안으로 공격이 들어가는데요…"라며 덴마크의 공격력 회복을 희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이 역습 찬스에서 중거리슛을 기록하자 "저렇게 박스 앞에서 슛을 날리도록 놔두면 안 되는 거거든요"라며 덴마크 수비를 질책했다. 후반 35분 다니엘 아게르가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낼 때는 "지금… 찍었습니다, 찍었습니다. 네! 페널티킥"이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박문성 해설위원도 해설자의 본분을 망각한 듯, 편파중계를 이어갔다. 후반 35분 욘달 토마센이 만회골을 터뜨리자 박 위원은 "8분 정도 남았습니다. 추가시간도 주어질테고요"라며 노골적으로 덴마크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이 골이 들어간 다음에 토마손도 감각을 찾을 수 있겠고요"라며 덴마크의 선전을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 해외축구에 관해 국내 최고 수준의 권위를 가진 축구전문가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물론 대부분 한국인이 일본의 선전을 달갑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이날 경기를 지켜본 누리꾼들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이대로면 일본이 16강 이상도 오를 것 같다" "한국이 반드시 일본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일본이 너무 뛰어나니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내용의 글이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허정무호가 16강행을 달성했음에도 일본에 뒤져서는 절대 안 되는 이유가 생겼다며 우루과이 완파를 주문하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자국의 경기도 아닌, 엄밀히 말하면 제3국의 경기를 두고 이렇게까지 국민 정서를 자극하는 중계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일본의 선전은 한국 대표팀에도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아시아 축구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단순히 <SBS> 중계진만의 문제로 한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이날 중계는 도가 지나쳤다. 한국은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일본과 싸우고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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