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경기력은 아르헨티나와 대결을 앞둔 한국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인민 루니'라는 별명으로 국내팬들에게도 관심을 모은 북한의 스트라이커 정대세(가와사키 프론탈레)는 국가가 연주될 때 눈물을 흘려 주목을 받았다.
▲16일 오전(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브라질과 북한의 경기에서 브라질 카카가 경기가 끝난 뒤 정대세에게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북한의 성공적인 그물망 수비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라질은 북한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북한은 역습시 포백으로 전환하고 수비시 수비수 다섯 명을 두는 극단적 수비전략(5-4-1)을 들고 나왔으나 경기 시작 1분여 만에 곧바로 오른쪽 측면을 뚫렸다.
브라질이 미드필드에서부터 공격을 전개하자 대기하고 있던 북한 수비진 두세 명이 바로 에워쌌으나 브라질은 한두 번의 패스만으로 바로 슈팅찬스를 열어갔다. 전반 6분과 7분경 카카(레알 마드리드)와 엘라누(갈라타사라이), 호비뉴(산토스)가 차례로 위협적인 슈팅을 날렸다.
세계 최고의 센터백으로 불리는 루시우(인터 밀란)까지 북한쪽 미드필드에서 패스를 이어갈 정도로 경기 주도권은 완전히 브라질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날 브라질은 최전방에 루이스 파비아누(세비야)와 호비뉴를 두고 카카가 바로 후방에서 자유로이 공격을 전개하는 4-3-1-2 진영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긴장한 듯 보이던 북한은 전반 10분경 정대세가 수비수 세 명을 달고 중거리 슛을 시도하면서 경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정대세를 제외한 전 선수가 바짝 웅크리고 있다 공격을 차단한 후 중앙을 이용해 바로 역습으로 전환하는 특유의 전술이 빛을 발하는 모습이었다. 북한의 특징은 역습시 측면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 수비력을 극도로 안정시키기 위해 측면 미드필드진의 오버래핑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북한은 비록 몸싸움에서는 브라질에 완전히 밀렸지만 협력수비로 열세를 만회했다. 브라질은 이후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찬스조차 잡지 못했다. 지난 1966년 영국 월드컵 이후 다시 한 번 이변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는 게 가능할 정도로 북한은 뛰어난 수비전술을 선보였다.
브라질, 클래스는 달랐다
당황한 브라질의 모습을 반영하듯, 후반 시작 전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경기장에 나선 사람은 카를로스 둥가 감독이었다. 둥가 감독은 이날 경기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후반전도 전반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후반 4분 카카가 페널티 지역 전면에서 결정적인 프리킥 찬스를 얻어냈으나 미첼 바스토스(리옹)의 왼발 프리킥은 골대를 살짝 빗나갔다. 이후 호비뉴가 시도한 중거리슛도 역시 골대를 벗어났다. 브라질 선수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이 묻어났다. 오히려 북한은 성공적인 역습으로 코너킥 상황을 얻으며 기세를 올렸다.
균형은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 깨졌다. 후반 10분경 역습 상황에서 오버래핑으로 오른쪽 측면을 돌파한 마이콘(인터 밀란)이 리명국 골키퍼가 나온 모습을 보고 엔드라인에서 바로 때린 슛이 골망을 흔들었다. 전혀 각도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리명국 골키퍼가 지나치게 크로스를 의식해 생긴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브라질이기에 가능한 골'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이었다. 이날 북한의 수비에 예상 외로 고전한 듯, 마이콘은 크게 감격하는 표정을 지어 눈길을 끌었다.
이후 북한은 눈에 띄게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파비아누를 비롯한 브라질의 삼각편대는 전반보다 더 거세게 북한 수비진을 유린했다. 전반전 활약으로 기대를 모았던 정대세는 이후 더 강력해진 주앙(AS 로마)의 전담마크에 제대로 된 볼 키핑조차 하지 못했다.
후반 27분경 브라질의 추가골이 나왔다. 역시 북한의 역습을 바로 차단한 후 이어진 골이었다. 브라질은 오른쪽 측면에서 북한의 패스를 차단한 후, 두세 번의 패스로 북한 수비진을 허물었다. 북한의 일자수비를 뚫는 패스를 역시 오른쪽 측면을 돌파한 엘라누가 이어받아 오른발로 가볍게 밀어넣었다.
▲지윤남이 경기 종료 1분전 2대 1로 따라붙는 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 뒤는 브라질의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인터 밀란). ⓒ뉴시스 |
고지대도 변수
이후 브라질은 승리를 확신한 듯 주전 멤버를 대거 교체했다. 다분히 다음 경기를 의식한 컨디션 조절 성격이 짙었다. 북한은 경기 내내 이어진 압박수비로 인해 선수들의 체력이 크게 떨어진 모습이었다. 이날 경기는 해발 1700미터 고지대에서 열렸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가 싶었으나 경기 종료 1분여를 남기고 북한의 만회골이 터졌다. 역습 찬스에서 길게 날아온 패스를 정대세가 헤딩으로 떨어뜨렸고, 2선에서 쇄도하던 지윤남(4.25 체육선수단)이 과감하게 브라질 수비진 오른쪽을 돌파해 왼발 강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번 대회 참가팀 중 가장 강력한 수비진으로 평가되는 브라질 수비망을 성공적으로 쪼갰다. 북한이 한 골을 따라잡자 남은 4분여간 관중들은 북한이 공을 잡을 때마다 큰 소리로 북한을 응원했다.
북한은 비록 패했으나, 브라질에 위협을 안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경기였다. 이날 세계 축구팬들은 북한의 인상적인 경기력에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을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에 올렸다. 경기결과 브라질은 슈팅 22대 9, 유효슈팅 11대 2, 코너킥 7대 3으로 북한을 압도했으나, 실제 위협적인 장면은 기대만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날 북한은 놀라운 수비력 못지않게 매너 있는 경기운영으로도 박수를 받았다. 양팀을 합쳐 나온 경고는 후반 42분경 교체투입된 하미레스가 받은 옐로카드 한 장이 전부였다. 북한과 브라질의 파울 수는 9개로 같았다.
경기가 끝난 후 둥가 브라질 대표팀 감독은 "경기를 본 사람이었다면 알겠지만, 공간을 허용하지 않은 북한의 수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며 북한의 강력한 수비력에 혀를 내둘렀다.
북한 대표팀의 정대세는 "힘든 경기였다"며 "골을 넣고 승리를 이끌자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국가 연주 때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서는 "드디어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해 눈물을 흘렸다"며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상상한 대단한 무대에서 브라질이라는 세계 최고의 팀하고 경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고 설명했다. 정대세는 조편성 전부터 "브라질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한편 이날 같은 조의 포르투갈과 코트디부아르는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로서 '죽음의 조'로 불리는 G조의 향방은 더욱 혼선을 빚게 됐다. 포르투갈과 코트디부아르는 북한을 상대로 승점 3점을 따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의 선전은 아르헨티나전을 앞둔 한국에도 중요한 예습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경기를 가진 요하네스버그는 해발 1700여 미터로 한국이 아르헨티나를 맞을 사커 시티 스타디움과 비슷한 조건이다. 이 정도 고도에서 산소량은 평지의 80~90여 퍼센트에 불과해 체력적으로 선수에게 큰 부담이 된다.
특히 한국이나 북한처럼 △역습에 치중해야 하고 △스피드를 활용해야 하며 △선수들의 활발한 오버래핑을 장기로 하는 팀에는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강남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은 "고지대는 기술축구보다 한국이나 북한처럼 체력전을 펼치는 팀에 더 불리하다"며 "허정무 감독이 잘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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