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가 장신 선수들로 이뤄졌고, 이를 활용해 세트피스 상황에서 득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경기 초반에는 선수들이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가 강점인 체격 조건을 전혀 살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 선수들이 상당히 경기를 잘 풀어갔다.
승리의 일차 요인은 수비다. 그리스 선수들이 쭉 해 왔던 플레이를 전혀 펼치지 못하게끔 우리 선수들이 공격라인에서부터 압박을 강하게 가했다. 수비와 미드필드 간격을 좁히면서 압박이 효과적으로 먹혔다.
한국이 중원 싸움을 압도하면서 그리스는 측면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로운 롱패스에만 의존했다. 이 상황에서는 수비가 유리한 상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상대 공격수가 위력 있는 고공플레이를 펼칠 수가 없다.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조용형과 이정수, 두 중앙수비수가 위치 선정을 상당히 잘했다. 이 덕분에 제공권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아 위험한 상황을 사전 차단할 수 있었다. 전반전에 그리스가 슈팅다운 슈팅을 해보지도 못한 이유다.
경기 운영에서도 그리스를 압도했다. 템포조절이 상당히 좋았고, 수비 전환도 굉장히 빨랐다. 한국은 경기 내내 수비 상황에서 그리스 공격수들보다 수비수를 많이 둘 수 있었다.
그리스에 스피드나 개인기가 특별히 뛰어난 선수가 없다보니 한국의 협력수비가 제대로 먹혔다. 상대의 장점을 파악해서 이를 무력화하는 시도가 좋았다. 공격 시에는 공간을 활용하는 패스가 돋보였다. 경기장을 넓게 쓰면서 그리스 선수들의 체력을 빨리 소모시킬 수 있었다.
오늘의 수훈갑을 꼽으라면 이정수다. 그리스가 수비가 강한 팀이다보니 첫 골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정수가 전반 7분만에 선제골을 성공시키면서 '선수비 후역습' 전략을 준비했던 그리스가 전술을 바꾸도록 유도했다. 그리스의 균형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염기훈의 활약도 굉장히 두드러졌다. 염기훈이 박주영을 많이 도와주면서 박주영이 자신의 장점인 수비 뒷공간 침투를 할 수 있었다. 박주영도 그리스 수비수들을 달고 다니면서 상대 공격진을 잘 유린했다. 박지성도 팀의 리더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했다. 상대의 집중마크가 있었지만 제 기량을 제대로 보여줬다.
김정우도 미드필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공수 조절을 잘 했고, 굉장히 지능적인 플레이로 상대의 역습을 사전 차단했다. 김정우의 활약 덕분에 우리 포백 수비진이 안정을 갖출 수 있었다. 기대가 컸던 이청용의 역할은 약간 아쉽다. 측면에서 날카로운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기성용은 예전의 기량을 빨리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전반적으로 선발 출전한 11명이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아르헨티나전에도 오늘 경기의 선발 라인업이 그대로 나올 것으로 본다. 실전에서 호흡을 맞춰본 선수들과 새로운 선수가 섞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아르헨티나전의 변수를 꼽으라면 역시 이동국이다. 컨디션이 빨리 올라온다면 이동국이 원톱으로 선발 출장하거나, 박주영과 호흡을 맞출 가능성이 있다. 이동국이 제 컨디션만 찾아준다면 염기훈을 후반 조커로 활용 가능하다.
아르헨티나는 그리스와는 개인 능력과 전술 운용, 득점력, 집중력에서 차원이 다른 팀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레 주눅드는 것은 좋지 않다. 과거에도 우리 대표팀은 지나치게 주눅들면서 수비 위주로 플레이하다 제 기량도 다 발휘하지 못하고 패한 적이 많았다.
지금은 큰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많고, 국내파 선수들도 K리그에서 닦아온 기량이 제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아르헨티나에 경기 내용면에서 밀릴 수는 있겠지만,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밀착수비를 강화하고, 수비 간격을 좁히는 경기운용이 필요하다. 전반에만 실점을 하지 않고 버티면 후반에 좋은 찬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색다른 전술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오늘 우리 대표팀은 4-4-2 포메이션을 썼는데, 개인기량이 뛰어난 아르헨티나전에서 공간을 넓게 내주거나 미드필드에서의 압박에 실패한다면 수비가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수비라인을 조금 더 뒤쪽으로 물리고 미드필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리스전에 이어 아르헨티나전도 수비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월드컵 우승국은 모두 수비가 강한 나라들이다. 허정무 감독이 아르헨티나전 비책을 충분히 준비했을 것이다.
하나 더 고려할 점은 아르헨티나전이 열리는 요하네스버그의 사커 시티 스타디움은 해발 1753m의 고원이다. 설악산 정상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체력 소모를 줄이면서 오늘처럼 90분 내내 기동력을 살려갈 수 있느냐가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다.
▲남아공 포트 엘리자베스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B조 대한민국과 그리스의 경기에서 박지성(대한민국)이 후반 추가골을 성공하며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
● 김강남은 누구? 1983년 유공 코끼리 축구단의 창단 멤버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청소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모교인 경신고와 중경고에서 15년간 감독을 맡았다.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한일 월드컵, 독일 월드컵에서는 방송 해설자로 활약했다. 친형은 김정남 전 울산 현대 감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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