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이라면 누구나 징병제보다 모병제에 끌린다.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돼 있는, 그렇게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이들이 자원을 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그들 덕분에 총을 들지 않아도 되는 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될 것 아닌가.
일단 대답을 유보하고 천안함 침몰로 목숨을 잃은 46명 장병을 떠올려보자. 그들 중 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나서 이번 참사로 숨졌다. 그들은 정말로 군인으로서의 적성을 살리고자 '자유롭게' 이 길을 선택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목숨을 건 공동체 수호를 그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옳은가?
이런 질문에 머리가 혼란스럽다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를 읽어야 한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정의(Justice)>)를 고스란히 글로 옮긴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높이는 통찰로 가득하다. 그 한 보기를 살펴보자.
군대를 시장에 맡긴다면…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프레시안 |
"차라리 노동시장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간단하지 않겠는가? 필요한 군인 수와 자질을 고려해 적절한 급여와 복지 수준을 정한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군에 복무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조건을 고려하고 나서 다른 일보다 병역이 나은지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117쪽)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생각은 낯설지 않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병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얼른 떠올리는 논리가 바로 이런 것일 테니까. 더구나 우리는 천안함 침몰로 숨진 나이 어린 직업 군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이런 식으로 시장에 의존해 군인을 모으는 중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방식은 정의로운가?
샌델은 두 가지 반박을 소개한다. 우선 그런 직업 군인 중 다수는 '어쩔 수 없이'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적어도 미국은 그렇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한 미국의 의원 찰스 랭글의 인터뷰를 보면, 2004년 뉴욕에서 군대를 자원한 이들의 70퍼센트가 저소득층 출신이었다. 한국은 다른가?
천안함 희생자의 상당수는 '용병'?
샌델은 또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시장에 의존해 모은 군인이 '용병'과 뭐가 다른가? 당장 발끈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미국의 현실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샌델이 인용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케네스 데이비스의 얘기를 들어보자.
"오늘날 미군은 용병의 색채가 짙다." "군 복무에는 어떤 식으로든 눈곱만큼도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이 같은 국민인 소외 계층 사람을 고용해 가장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눈 하나 꿈쩍 않고 자기 일을 계속한다." (124쪽, 125쪽)
사실 중요한 업무의 대부분을 직업 군인에 의존하는 한국 군대의 모습도 이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대 근처도 안 가본 대통령이 전쟁 운운하는 동안, 정작 자신도 모르게 용병으로 전락한 이들이 목숨을 건 '업무' 수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서해에서 영문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현실을 두고도 우리는 왜 '신성한' 국방의 의무 운운하며 진실을 외면할까? 실제로는 헐값에 고용한 용병과 다를 바 없는 직업 군인을 놓고, 왜 그것을 "용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할까?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돈을 주고 고용한 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판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 밀, 칸트…철학자와 맞짱 토론
<정의란 무엇인가>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둘러싼 이 짧은 얘기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벤담, 밀, 칸트, 하이에크, 롤스 등이 수천 년에 걸쳐 토론했던 온갖 철학적 쟁점을 끄집어낸다. 이들의 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는 벌써 몇 가지 논점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위대한 철학자와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고담준론을 위한 따분한 책이라고 딱지를 붙이면 오산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가로지르며 첨예한 갈등을 낳는 온갖 문제를 놓고, 샌델의 안내를 받으며 철학자들과 씨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장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 때의 희열은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읽는 것 못지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을 비롯한 당대의 논객들이 어떤 입장에서 저런 주장을 펼치는지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덧붙여, 그들이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상황에 따라서 입장을 바꾸는지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낯 뜨거워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
예를 들어 볼까? 평소에 시장을 예찬하던 이들이 군대를 시장에 맡기는 것을 꺼린다면 그는 군대 문제를 놓고는 다른 입장에 근거하는 셈이다. 평소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강조하던 이들이라면 식민지 시대의 만행을 사죄하는 데 인색한 일본 정부와 국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일(식민 지배)을 놓고, 왜 앞 세대를 대신해 사죄해야 하는가.
내 삶의 이야기는 공동체 이야기의 부분
<정의란 무엇인가>는 단순히 정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입장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의 가치는 크게 반감되었으리라. 샌델은 거장답게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기존의 입장-자유지상주의자, 도덕적 개인주의자 등-을 검토하면서, 특정한 입장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평소에 시장을 그렇게 예찬하던 이들도 (속내야 어떻든 간에) 군대에서 복무하는 일은 공동체에 속한 시민의 의무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관념으로 돌아간다. 개인의 자유를 목소리 높이던 이들도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사죄하라고 일본에게 촉구하면서,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행복(이익), 자유에만 근거해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불충분하다. 샌델은 '미덕'을 그 대안으로 내놓는다. 그가 말하는 미덕은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 서로 부대끼면서 오랫동안 만들어온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합의이다. 그와 입장이 비슷한 철학자 매킨타이어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311, 312쪽)
좋은 삶을 향한 고민은 계속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런 결론은 한국 사회에 어떤 함의를 던질까? 2005년 9월 샌델이 한국을 찾았을 때, 그는 적지 않은 반론을 받았다. 지연, 학연 등 사적인 관계망에 의존한 기득권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주장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런 반론이 오해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관련 기사 :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증명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좋은 삶의 모습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각의 새로운 경험과 그에 바탕을 둔 상호 간의 토론을 통해서 늘 새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와 그 구성원이 자유, 평등, 우애에 기반을 둔 좋은 삶을 지향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미덕으로 개인의 삶에 각인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샌델이 곳곳에서 "나는 나, 너는 너!" 식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 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토론이야말로 새로운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20여 년 동안 새로운 공동체를 이끌 대학생을 상대로 <정의> 수업을 진행한 것도, 또 이것을 책으로 다시 쓴 것도 바로 이런 토론의 물꼬를 트기 위함일 것이다.
샌델은 책 말미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고민했던 미국의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3월 18일 했던 연설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그는 이 연설을 하고 나서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암살당했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고민에 답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 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363~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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