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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 2010서울연극제-4] 재기발랄한 우울, 연극 '들소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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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 2010서울연극제-4] 재기발랄한 우울, 연극 '들소의 달'

[공연리뷰&프리뷰] 들소가 위협당하는 세상에서 양수가 살아남는 법

한가롭게 풀을 뜯던 사슴모자(母子)가 난데없는 비극을 맞이한다. 사자가 위협하나 싶더니 결국 포수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 것. 그런데 사슴도 가해자였다고 말하는 연극이 있다. 풀을 죽였기 때문이다. 풀이 사슴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여기에 죽은 게 또 하나 있다. 똥파리다. 사자엉덩이에 붙어 있었다. 사자가 총소리에 놀라는 순간, 꼬리에 맞아 뒈졌다. 그러나 우리는 풀과 똥파리에는 흥미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죽고 사는 폭력이겠지만 말이다.

▲ ⓒ프레시안

이는 연극 '들소의 달' 막간극 중 한 장면이다. 연극 '들소의 달'에는 죽어야 마땅했으나 날개가 찢긴 채 살아남아 똥파리인 척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찍소리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도 그 진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쳐 날뛰는 인간. 어쩔 수 없는 발악처럼 이리저리 날다가 결국 (당연히도)죽고 말 양수가 있다. 연극 '들소의 달'은 양수의 의식흐름을 따라가며 폭력을 당한 그가 그 폭력을 어떻게 발현하는지를, 참으로 '재기발랄'하게 펼쳐 보인다.

- 폭력이 만든 영웅의 세계

▲ ⓒ프레시안
1968년 봄, 엄마는 두꺼운 화장을 하고 개장수와 떠났다. 1970년 탁구장, 어느 치안이 양수의 몸을 더듬으며 양수에게 그늘 하나를 더 만들어줬다. 1974년 집, 양수의 아버지가 양공주를 데리고 왔다. 1980년 5월 광주, 전자오락을 하러가는 도중 시민군으로 오인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82년 군대, 양말을 훔쳐간 병장을 벽돌로 찍고 영창을 살았다. 이후 비슷한 색채의 사건 반복.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평범하고 처참한 삶이다. 외부로부터 가해진 다양한 농도의 폭력이 모여 양수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들소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양수는 어렸을 적 반복하던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 속 악랄한 인베이더들이 지구를 멸망시킬 거라 믿는다. 그들로부터 아내 선녀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양수는 독살된 아버지의 억울함에 분노한다. 불편한 그만의 세계 속에는 야생동물의 천국 아카방고의 들소가 있다. 그는 위험한 사자로부터 들소 지키기를 희망한다. 그의 꿈은 들소다. 왜 들소인가.

들소는 떼 지어 사는 생물체다. 무리에서 벗어나면 금세 먹잇감이 된다. 사회에서 도태된 양수는 세상의 먹잇감이 됐다. 그의 세계는 일찍이 무리에서 이탈된 양수가 '살기 위해' 구축했다. 개인의 비극이나 사회의 비극에 맞서 싸우려는(혹 그것이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없을지라도) 양수의 마지막은 마치 영웅의 죽음과도 같다. 대지를 울리는 들소의 움직임 속에서 달을 가리며 죽는 양수는, 그러나 신화적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너무도 미비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저항할 수 없기에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 이것이 마방진이다!

▲ ⓒ프레시안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슴과 사자가 등장하는 막간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장치가 너무나도 희극적이기에 관객은 아무런 부담 없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암울한 양수 삶의 전개방식은 시종일관 이렇다. 극은 재치로 가득하며 배우들의 대사와 억양, 행동 등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한다. 극공작소 마방진은 이런 과장과 익살스러운 장면을 통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실감을 극대화시키며, 동시에 유쾌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연극은 어렵지 않다. 가슴을 관통하는 묵직함도 없다. 연극 '들소의 달'은 희극과 비극이 뒤엉키며 양쪽의 이익의 합이 0이 되는 제로섬이 됐다. 관객이 온전히 가슴 아프도록 놔두지 않으므로 양수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너의 지독하고, 지루하고, 형편없는 인생에 쐐기를 박아주마!" 처절한 인생을 찌르는 단 한 번의 칼부림. 이것이 극공작소 마방진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그들은 고선웅 연출의 지휘아래 마방진만의 들소와 마방진만의 달을 탄생시켰다. 이는 매우 멋지다. 들소가 무리지어 달릴 때, 마방진이 무리지어 달릴 때, 관객들도 무리지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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