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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걸스 제너레이션' 그로부터 3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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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더 걸스 제너레이션' 그로부터 3년 동안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수그러드는 아이돌 열풍, 새로운 가능성

"학예회도 아니고…." 저녁 시간대에 가요프로그램을 보다 새어 나왔다는 푸념을 이해한다. 공감하니까. 그다지 얻은 것이 없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책을 집어 펼치거나 창밖의 노을을 구경할 시간을 얻을 수 있고, 아니면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은근히 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반면 소싯적에 음악 꽤나 들었다면서 요샌 들을만한 음악이 안나온다는 불평은 요즘 찾아듣는 음악이 없다는 고백으로 이해하면 된다. 듣는 만큼 들리니까. 그래도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마저 중시한 음악이 처한 사정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수용자의 활동을 촉진하고 창작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매개의 고리가 약한 것도 사실이니까.

'원더 걸스 제너레이션'의 '빅뱅'

2007년, 회복불능 상태로 빠진 듯했던 가요계에 나타난 원더걸스(Wonder Girls)와 소녀시대(Girl's Generation)는 한창 부풀어오른 거품이 빠져나갈 즈음에 성공하며 아이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앞서 등장한 빅뱅(BigBang)과 함께 가수 출신 기획·경영자들에 의해 완성도가 향상되어 출중한 실력과 확고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기분 상할지 몰라도 뜯어보면 그다지 외모만 내세운 것 같지도 않다. 또 사극드라마의 시청 연령대 확장처럼 십대와 청장년을 모두 타깃으로 삼아 수용층을 넓혔다. 20년 전, 메탈리카(Metallica)의 신작을 고대했던 만큼의 열의로 소녀들의 새 뮤직비디오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원더 걸스 제너레이션(Wonder Girl's Generation)'의 막이 올랐다.

그렇다고 타이틀곡을 제외하면 상투적이고 안전한 노래들로 채워진 전형적인 아이돌의 음반들이었다는 사실까지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화살이 잘 안 맞는다고 과녁을 크게 그릴 필요까진 없는 노릇이다. 간혹 비평의 대상으로 삼으려다 무리가 생겨서 작·편곡자와 기획자에게 훈수를 두고 있다거나(정작 주인공은 사라진다), 마케팅전략 모니터링요원 역할이나 하는 경우를 보게 되곤 한다(그런 건 기획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소녀시대를 볼까. 'Oh'는 결과로 보면 'Run Devil Run'으로의 변신 효과를 극대화하는 디딤판이었다. 이름을 바꿔야 할 때 아닌가, 소녀시대 2기가 벌써 준비되었나 싶을 때에 '숙녀시대'로 변신해버렸다.

'격동의 3년' 동안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여성 솔로가수들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질 정도로 가요계의 판도가 변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걸그룹이 보완재에서 대체재가 되면서 판을 들었다 놓곤 했던 여성가수들의 동선은 제한되었다. 이젠 자신만의 캐릭터와 충실한 음악 스타일이 중요해져서 엄정화처럼 갱신을 감행하며 롤 모델이 되거나,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변신한 박지윤의 케이스가 아니면 롱런하기 힘들어졌다(박지윤이 주목받은 이유는 댄스 대신 다른 것을 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하고픈 음악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가수들은 갯벌에서 조개를 캔다든지 헐벗은 몸을 더 격렬히 흔들어야 하는 판국이다.

다른 하나는 아이돌 개념의 변화다. 생뚱맞게 들리겠지만 선정성 논란도 이와 관련 있다. 물론 SM엔터테인먼트의 소녀시대는 (이름에 걸맞게) SM코드의 복장과 제스처를 내세웠고, 많은 걸그룹들이 상체보다 하체를 강조하는 춤을 추며, 남성 아이돌 역시 근육을 과시한다. 이 육체의 전시는 다중 매체로 전달되기에 죄의식을 남기지 않는다. 물론 타깃이 넓어졌다고는 해도 주 고객은 십대라는 점에서 논란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부분에 환상에 대한 계몽적 해석이 등장했다. 대중을 비과학적인 집단으로 상정하고 심리상태를 분석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하는데, 그런 심오한 글들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간단히 정리하면, 미국의 보편형 아이돌과 일본의 특화된 아이돌 시스템의 절충형이 만들어졌다. 미국, 일본의 팝 채널로 리모콘을 누르는 수고만 들여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바둑중계를 즐기는 신사가 미국 여성가수들의 뮤직비디오라도 보게 되면 세탁기 안에 들어앉은 양 머리가 빙글빙글 돌지 모른다. 투애니원(2NE1)은 흑인 걸그룹을, 소녀시대는 일본 아이돌을 모델로 하기도 했고, 또 각 기획사·기획자의 성향으로 지향이 구분된다. 여기에 예능시대가 맞물려 신비주의 대신 친근하고 소탈한 인간미가 함께 강조된다. 활동방식이 변하면 이미지도 변한다. 이처럼 아이돌의 이중적 이미지는 음악·연예산업의 추세에 따른 결과다.

▲소녀시대의 윤아. 최근 쏟아져나온 여성 아이돌은 (십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 남성까지 겨냥했다. 이들은 성(性)적 코드를 숨기지 않는다. 비록 소비자들은 죄의식없이 그들을 소비한다 하더라도. ⓒ연합뉴스

조정기에 접어들고 있는 아이돌 르네상스

그런데 음원서비스 사이트와 가요프로그램 순위에서 수위를 기록하면서도 파급력이 예전 같지 않다. 슬슬 새 노래와 음반에 대한 '애정어린' 실망도 표출된다.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시간이 (3년이나) 흘렀을 뿐이다. 극단적인 쏠림의 결과,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경쟁력이 강해졌음에도 팬들은 기획안에 적힌 내용을 짐작하게 되었고, 자기 엉덩이에 채찍질하는 파격과 자극의 콘셉트 경쟁에 슬슬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역으로 '브라운 아이드 걸스'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들리는 것이 과소평가되는 경우도 생겼다. '브아걸'의 노래는 여타 걸그룹들과 달리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더 좋게 들린다.

물론 국내에서 검증을 거친 후 하나둘 해외로 보폭을 넓히는 이유도 있지만, 자멸의 징후 또한 없지 않다. 뻔히 '스모킹 건'이 보이는 표절논란이 다시 인다. 멤버들의 추문까지 더해진다. 가정통신문을 자주 발송하고 사생활을 더 엄격히 관리해야 할까. 편의점 아가씨,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오빠 때문에 맘 설레는 게 정상인 나이들이다. 또 원더걸스의 '현아'와 '선미'처럼 그룹에 결원이 생기면 신속한 교체가 이루어진다. 여기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원더걸스의 다른 멤버들이 외계인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 선미가 버티지 못했다는 설이다. 인생을 올인해버린 그들과 달랐다나. 어쨌든 '2PM'과 재범의 경우까지 포함하여 멤버들은 단지 부속품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팬들은 받아들여야 했다.

진짜 문제는 10여 년 전의 가요계가 재현될 조짐이다. 가수의 이름도 모른 채 노래를 흥얼거렸던 그 전과 달리 가수의 얼굴은 알아도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몰랐던 시절이었다. 다시 그런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주류와 인디 틈새에 있는 음악인들의 입지는 여전히 좁다. 사실 2007년 직전까지 각계에서 제기된 비판이 차츰 수용되어 대안을 모색하고, 수용문화에도 영향을 주면서 악순환이 개선단계에 접어들 법한 무드가 있었다. 이런 가능성은 가능해지기 전에 사라졌다. 콘텐츠의 공급이 수요증가를 추월하는 과열현상 후엔 가격조정을 피할 수 없다. 즉, 아이돌 르네상스가 성장 이후에 조정기에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미 몇 년 전에 이런 글을 써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시 미디어와 종사자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마저 편승하여 아이돌을 좋아해야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인 듯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활력이 되리라는 암묵적 합의도 있었지만 현실에 대한 사유와 판단,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그리곤 자신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관광지를 둘러보는 구경꾼처럼 취향이란 말 뒤로 숨어버렸다(사실 취향은 음악경험의 총화를 일컫는다. 취향을 체계화한 것이 음악관이다). 이는 예전에 팝 혹은 록 마니아들이 가요에 대한 편견을 버릴 때와는 다를뿐더러 시스템과 결과물의 연관성, 그러니까 시장과 제작자본, 제작환경의 변화가 연동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기성질서에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고, 또 절로 흡수되는 이 사회의 어떤 구성원들처럼 시장주의의 인간 활동 지배에 거부감을 표하면서 실제로는 동조해버린 셈이다. 군대로의 탈영이다.

잘 만든 노래를 대중이 즐기는 건 자연스럽고, 실제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히트송도 있다. 투기적 문화상품이라고 무조건 폄훼당할 이유는 없다. 예술성 지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성이란 말이 음악적 성취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에 해당할만한 경우는 적었다. 더구나 과점양상이 심해지면 음악과 시장의 균형 감각이 약해지면서 음악산업의 건강성은 악화된다. 아이돌-공산품 운운하면 전면 부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 상황은 피곤하다. 공존과 추의 균형에 대한 환기이며, 균형이 무너질 때 경계 밖 음악의 생산기반마저 붕괴되는 현실이다. 유언으로 금연을 선언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것은 그저 싱거운 농담이 아니다.

▲박재범 사태를 통해 팬들은 그들의 우상이 그저 맞춤형 '상품'의 부속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이 새로운 '주변의 다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연합뉴스

종막이 아니라 2막으로 가는 길

시장의 선택과 필요를 자신의 선택과 욕구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문화상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주류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선이고 비주류는 오류라는 시장의 질서와 속성이 대중문화라고 놔둘 리 없다. 그런데 배타적이고 권위적이며 탈일상화에 놓인 기성 예술계와 최전선의 아이돌 스타의 중간과 주변에 다수가 있다. (정치에서처럼) 다수이면서 소수로 대접받는 이들은 거푸집에서 벗어나려는 기질로 다양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이 위험을 분산시켜 시장안정성도 제고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면 갈 수 있는 나라에선, 그 너머 태평양 건너의 나라에선, 다시 대서양 저편의 나라들에선 상식이다. 이러니 가격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비평과 상업적 결과가 다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2009년 연말에 몇 년 동안 영국의 크리스마스 싱글차트 1위를 독점한 스타발굴프로그램 '엑스펙터'에 대항하여 소비자들이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을 1위로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대형 미디어의 쇼비즈니스에 네트워크로 대항하면서 수익도 기부하게 된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다. 또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0년 최악의 아이디어들 중 하나로 범람하는 TV댄스경연대회를 선정했다. 유별난 문제의식이 아니다.

슬그머니 일간지에 '산업역군' 운운하는 문외한의 주장이 버젓이 실리더니 아이돌이 쓰러지면 대중음악·연예산업 전체가 흔들릴 거라는 소리가 또(!) 들린다. 최신경향의 추종이 미디어와 연예기획사의 속성이라지만, 위기론을 입지에 이용하는 논리는 이미 흔하다. 게다가 큰 틀의 문화트렌드는 정작 가치소비로 향하고 있다. 작은 트렌드 추종은 축소를 초래한다. 큰 물체는 빠르게 움직여도 느리게 보이고, 수요의 포화라기보다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수용자는 다른 길에 대한 선택권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미디어가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의식을 선도해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일반의 수준이 미디어의 성향을 끌어가는 것이 시장의 속성이다. 그런데 대중음악의 경우에는 미디어와 산업이 일반의 수준과 잠재된 기대, 큰 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요즘 문화상품 소비자의 책임의식을 계도하는 공익선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운로드라든지 저작권침해를 줄이자는 취지인데, 한국인이 유별나게 공짜를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 전에 선택권과 결정권이 존중될 때 책임감도 강화되며, 경우에 따라선 어렵게 얻을 때 책임감도 강해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연 다양한 선택권이 제공되고 있는가? 시각 확장과 소통 확보의 연결고리는 많고, 건강한가? 음악의 창작(생산·공급)과 향유(수요)를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은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음악의 대중적 의미화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동반자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때 또 재방송을 봐야 하지 않겠나? 컴퓨터가 웅웅거리며 불평을 쏟아낼 정도로 혹사시키고 나서 던진 이 물음 안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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