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왜 가족 같은 소를 죽여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1> 6월항쟁,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조직적 농민 운동의 부활을 알린 함평 고구마 사건

프레시안 : 노동 운동에 이어 농민 운동을 짚었으면 한다. 1945년 해방 직후 농민들은 토지 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사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렇지만 학살, 분단, 전쟁을 거쳐 극우 반공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해방 공간에서 표출된 활력은 사라지고 농촌은 침묵의 공간으로 변했다. 1960년 4월혁명 때에도 농민들은 적극 나서지 않았던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이처럼 농민들에게 재갈을 물려 침묵시킨 건 권력자들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그러했던 농촌에서 1980년대에는 농민 운동이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그런 움직임은 이미 유신 후기부터 나타나지 않았나.

서중석 : 농민 운동으로 가보자. 1970년대 후반에 함평 고구마 사건이 일어나면서 농민 운동이 부각됐다. 함평 고구마 사건에서 나타난 농민 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정권에 투쟁적이고 민주화 운동과 연결돼 일어난 조직적 농민 운동으로는 최초의 농민 운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사건은 1976년 농협이 고구마를 전량, 그것도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이행하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농협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서 농민들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작년보다 값을 잘 쳐줄 테니 우리한테 빨리 팔아라'라고 하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농민들은 농협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안 팔고 기다리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농협이 약속을 어긴 탓에 농민들이 피땀 흘려 재배한 고구마가 길가에서 썩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해 11월 전남 함평군의 고구마 재배 농가들은 농협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협은 '고구마가 그렇게 된 게 왜 우리 잘못이냐. 우린 전혀 책임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또한 피해 농가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압박하거나 피해 보상 운동에서 손을 떼라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해를 넘기게 됐다.

함평의 고구마 재배 농민들은 1977년 4월 광주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기도회를 여는 등 지속적으로 농협에 피해 보상을 촉구했다. 이 문제가 계속되자 농수산부와 농협 중앙회에서 합동 조사반을 편성해 조사까지 하게 되지만, 농민들의 핵심 요구는 끝내 묵살을 당했다. 가톨릭농민회는 전국적으로 더 강력하게 투쟁할 필요성을 느끼고 1978년 4월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천주교 광주 대교구 사제단이 동참을 선언하고 각계 인사들이 격려 방문을 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농협은 뒤늦게 피해 보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사건은 1978년에 와서야 일단락됐다.

(이 사건의 밑바탕에는 '흙이나 파먹는 무지렁이'라는 식으로 농민을 우습게 여기고 부정부패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농협의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함평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농협이 수매 약속을 내팽개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이 마무리된 직후인 1978년 5월 6일 감사원 발표에서도 이 점은 단적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전남, 전북, 경남, 경북의 농협 도지부 산하 단위 조합에서 1976년과 1977년에 고구마 수매를 위장 또는 조작해 80억 원의 농협 자금(생고구마 24만 6000톤 상당)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농민들로부터 제때에 고구마를 수매해 주정 회사에 공급해야 할 단위 농협 일부가 중간 상인과 결탁, 중간 상인한테서 고구마를 사놓고 마치 농민들로부터 수매한 것처럼 꾸미는 등의 방식으로 거액을 유용했다고 감사원은 발표했다. '편집자')

농민을 괴롭힌 부당한 농지세와 반농민적 농협

ⓒ오월의봄
프레시안 : 1980년대에 들어와 농민 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1980년대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농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중 하나가 부당 농지세 시정 투쟁이었다. 당시 농지세는 다른 세목(稅目)의 조세보다 세율도 높고 공평하게 부과되지도 않는 등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농민들한테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농지세를 부당하게 매기는 것에 항의하는 투쟁에는 충북 음성군 농민들이 앞장섰다. 음성군 농민들은 1981년 말에서 1982년에 걸쳐 부당 농지세 시정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음성 지역의 농지세가 대폭 삭감됐다. 이 투쟁은 그 후 농지세 관련 제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하나는 농협 민주화 운동이었다. 농협은 농민과 상관없이 사업과 운영이 이뤄지고 있었고 더군다나 외국 농산물 판매까지 하고 나섰다. 이렇게 농협이 반농민적 조직으로 전락한 것은 조합장을 농민이 직접 뽑지 못하고 정부에서 임명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옛 농업은행과 옛 농협이 통합해 새로운 농협이 전국 조직으로 출범했는데, 박정희 정권 시기에 농협은 농민들의 농협이 아니라 관권에 의해 처리되는 농협이 돼버렸다.

가톨릭농민회는 농협 민주화를 위해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3년 7월에 100만 인 서명 운동 추진 결의 대회를 열었고, 8월부터는 농협 조합장 직선제 실시 100만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농민이 조합장을 직접 뽑는 것이 농민의 농협을 이뤄내는 첫걸음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농협 총회 대의원들이 선출한 9인 추천 위원회에서 조합장 후보 2명을 선출하고 그중 1명을 농협 중앙회장이 임명하던 것을, 대의원 총회에서 조합장 후보 1명을 선출하고 농협 중앙회장이 그 사람을 임명하도록 임명 절차가 한 단계 줄어들었다. 그러니까 간-간선제에서 간선제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에도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 단체들은 농협 직선제 투쟁을 계속해서 벌였다. 그렇게 해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농협 등의 조합장 선출 방식이 직선제로 바뀌고, 1989년 첫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개 값만도 못한 소 값"…농민을 벼랑 끝으로 내몬 수입 개방 농정

프레시안 : 1980년대 농민·농업·농촌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외국산 농산물 문제와 소몰이 투쟁 아닌가.

서중석 : 1980년대 중반에 농민 운동으로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은 것이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 및 소 값 피해 보상 운동이었다. 농산물 수입 자유화 조치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처음 이뤄진 건 아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말기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된 건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들어선 이후다. 전두환·신군부 정권 초기에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경제 정책에서는 대체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농업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 우위론을 내세우면서 수입 개방 농정을 지지했다.

수입 개방 농정이 198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되면서 쌀을 비롯한 350여 종류의 농축산물이 수입됐다. 사료용 곡물 수입량도 약 4000만 석에 이르렀는데, 이건 쌀농사가 풍년이었을 때 한 해 수확량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수입 개방 농정이 강화된 결과, 1983년의 경우 한국은 미국의 3번째 농축산물 수출 대상국으로서 11억 7400만 달러에 상당하는 농산물을 수입했다.

농민들은 죽을 맛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쌀, 양파, 여름 과일 등 농축산물 가격 폭락 현상이 거듭 나타났기 때문이다. 1983년에는 정부에서 추곡 수매가를 동결하고 수매량도 제한했다. 그래서 농민들로서는 점점 견디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 속에서 1980년대 중반에 소 값마저 폭락하게 된다.

프레시안 : 아끼는 소를 끌고 시위를 한다는 건 농민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다. 소 값이 얼마나 떨어졌기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인가.

서중석 :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20만 마리가 넘는 외국 소와 90만 마리 분의 외국 소고기가 수입됐다. 그렇게 되면서 1985년 10월에는 국내 소 값이 1983년 초보다 60~80퍼센트나 폭락했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개 값만도 못한 소 값"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소 사육 농민들은 마리당 평균 70~80만 원의 적자를 봤다. 반면에 정부는 엄청난 차익금을 갖게 됐다. 무슨 얘기냐 하면, 외국 농축산물을 대규모로 수입하면 농민들은 죽어나지만 수입하는 쪽에서는 큰 이익을 보게 되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정부에 가게 돼 있었다. (이에 대해 <한국 여성 농민 운동사>는 당시 신문에 보도된 외국 소의 산지(미국, 캐나다, 호주 등) 평균 가격과 도입 가격 비교를 바탕으로 이렇게 기록했다. "정부는 1984년 한 해 동안 외국 소 도입에서만 한 마리당 평균 약 50만 원 이상씩 이익을 남기고, 육우에서 약 380억 원의 이익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이 이익금이 과연 영세 축산 농가를 위해 쓰였는지는 의문이다." '편집자')

이처럼 과도한 수입으로 농축산물 가격 폭락 현상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농민들이 야반도주하거나 농약을 마시고 음독자살하는 사태가 잇따라 신문에 보도됐다. 소를 반납하기로 결의하거나 소 값 폭락에 항의해 마을에서 소를 도살하는 일도 생겼다. 심지어 키우던 소를 우시장에서 때려죽이는 농민까지 나타났다.

참다못해 소를 끌고 나온 농민들의 소몰이 투쟁

프레시안 : 영화 <워낭소리>가 잘 담아낸 것처럼 소는 대다수 농민들에게 단순한 가축이 아니다. 식구들 밥보다 소에게 먹일 여물부터 챙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다. 그런 소를 죽이는 참혹한 일까지 일어났다는 건 이 시기에 농민들이 느낀 절망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소몰이 투쟁,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는 소 값 피해 보상 운동을 전국 각지에서 치열하게 전개했다. 1985년 4월에는 이틀에 걸쳐 기독교농민회가 미국 농축산물 수입 개방 강요 규탄 대회를 열고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시위를 벌여 사회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기독교농민회 회원들은 미국 대사관 마당에 진입해서 "소 값 피해 보상하라", "미국은 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을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85년 7월과 8월에는 소몰이 투쟁이 전개됐다. 7월 1일 경남 고성을 시작으로 강원도 홍천, 전북 진안 등 전국 22개 지역에서 농민들은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경운기·소몰이 시위라고도 불렸는데, 농민들은 소뿐만 아니라 경운기도 몰고 나와 마을에서 군, 면 소재지까지 행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농민들은 가로막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했는데, 소 등에 구호를 붙이거나 경운기에 방송 시설을 설치해 활용하기도 했다.

(소몰이 투쟁은 경찰의 최루탄 남발을 억제하는 효과도 거뒀다. 최루탄에 소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찰은 다른 때와 달리 최루탄 사용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소를 끌고 나서기는 했지만, 농민들에게 소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시위를 마친 후에는 차를 빌려 소를 태우고 돌아오는 사례도 있었다.

소몰이 투쟁이 격렬했던 데에는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배신감도 크게 작용했다. 전두환 정권은 융자까지 해가며 농민들에게 소를 더 많이 키우라고 권장했다. 그에 따라 많은 농민이 빚을 내서 소를 더 샀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외국 소를 대거 들여온 탓에 소 값이 폭락했을 뿐만 아니라, 들여온 외국 소 가운데 상당수가 수태를 못하거나 성장 상태가 불량한 '병든 소'로 판명됐다. 농민들로서는 절망 섞인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농촌 파멸 직전이란 표현을 쓰지 말 것" 같은 보도지침을 내리며 실상을 감추기에 바빴다.

전두환 정권의 수입 개방 농정은 미국의 개방 압력과 맞물린 것이기도 했다. 레이건 정부가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반혁명은 자국 농민의 희생을 일정하게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 정부가 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을 높인 데에는 다른 나라 농민들에게 그러한 희생과 부담을 떠넘기는 측면이 있었다. 그와 함께 1980년대에 미국이 막대한 쌍둥이 적자(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 허덕이던 상황과도 이어져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농축산물 가격이 연이어 폭락하면 농민들의 빚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농가 부채는 1970년대에 급증했다. 새마을운동 시기에도 다르지 않았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서 농가 부채가 더 늘어나 1984년에는 호당 178만 4000원으로 치솟았다. 그러면서 농가 부채가 농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는 농가 부채 탕감 투쟁도 전개됐다. (빚 때문에 자살하는 농민이 곳곳에서 나타날 만큼 농가 부채 문제는 심각했다. 이 때문에 마을 분위기가 삭막하게 변하기도 했다. <한국 여성 농민 운동사>에는 경남 거창의 한 농민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로 어깨를 맞대며 믿고 사는 것이 우리 농촌이었는데, 빚 파산이 자주 생기자 빚보증 때문에 모두 등을 돌리게 됐다." 또한 소 값이 폭락하고 생활이 더 어려워지면서 여성 농민들 사이에서 겨울이면 도시로 가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봄에 돌아오는 풍습이 생겨났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편집자')

그러한 가운데 1986년부터 농민 운동은 대중 노선에 입각한 대중 조직 운동으로 변모했다. 1970년대에는 농민 운동이 광범위한 농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일부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됐는데,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가톨릭이나 기독교 같은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군 단위 농민 대중을 토대로 한 자주적 농민 조직을 건설할 필요성이 농촌에서 제기됐고, 그러면서 대중 노선에 입각한 대중 조직 운동이 전개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가 창립된다.

1980년대에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 운동이 활성화된 것은 6월항쟁 전개 양상에도 영향을 줬다. 전주, 안동, 천안 등 여러 지역에서 농민들은 6월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 대다수 농민들에게 소는 특별한 존재다. 그러한 소를 끌고 시위에 나서 소몰이 투쟁을 해야 할 만큼 1985년 농민들의 사정은 절박했다. 이미지는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스튜디오 느림보

농민과 함께하려는 학생들의 농활에 도끼눈 뜬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지난번에 노동 운동을 살피면서 노학 연대 문제도 짚었다. 1980년대에 학생들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들과도 연대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80년대에 많은 학생이 공장에 취업해 노동 활동에 들어갔고, 또 '공활'(공장 활동)을 한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은 학생이 '공활'보다 농활을 갔다. 1970년대보다도 1980년대에 농활을 더 많이 갔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한테 절대로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아주 강한 윤리 의식이라고 할까 도덕관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땀 흘리고 농민들한테 배운다는 점은 1970년대든 1980년대든 같았는데, 이런 청교도적인 윤리 의식은 1980년대에 특히 강하게 드러났다. 예컨대 강원도 같은 경우 학생들의 농활 시기가 옥수수 철인데, 옥수수를 따다가 농민들이 '일해줘서 고맙다'고 옥수수를 주면 그것도 절대로 안 먹겠다고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다. 농민들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 정도로 강했다.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이 농민과 학생의 연대를 곱게 볼 리가 없지 않았나.

서중석 : 정부는 학생들의 공장 취업을 아주 두려워했듯이 농활에 대해서도 탄압으로 나왔다. 1985년 7월에 가톨릭농민회에서 발표한 '대학생들의 농촌 활동 탄압을 중지하라'는 성명서는 학생들이 어떻게 농촌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국이 그걸 어떻게 탄압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걸 한 번 살펴보자.

"정부는 경찰과 행정 조직을 총동원하여 대학생들의 농촌 활동을 저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모든 간악한 수단을 동원하여 농촌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내쫓고 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농민과 생활을 함께하고 그 생활 속에서 배우고 노동의 신성함을 체험하는 것에 농활의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활동은 농민들의 바쁜 일손을 돕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대학생들의 고심 어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당국은 이미 농촌 활동 대학생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농촌의 이장,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청년회장 등을 불러 압력을 가하고 학생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경찰로 하여금 직접 탄압의 선두에 서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서 TV는 농촌 활동에 대해 반란 음모라도 일으키려고 하는 것처럼 왜곡 선전하고, 농촌 활동을 하려고 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우리의 청년들을 불순분자로 매도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정부의 탄압과 방해 때문에 학생들이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천막을 친 상태에서 농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편집자')

학생들의 농활은 농촌 문화를 일으키는 데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 같은 것을 통해 농악 같은 것이 많이 없어지고 그랬는데, 학생들이 들어가서 농촌 문화를 다시 살리는 활동을 한 지역도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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