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짓밟은 국회 또 짓뭉갠 '박정희 양아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1>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12·12쿠데타에 이어 5·17쿠데타…희귀한 2단계 쿠데타 일으킨 전두환·신군부

프레시안 : 이제 5·17쿠데타를 살펴봤으면 한다. 5·17쿠데타와 관련해 일반적으로 많이 얘기되는 건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즉 1979년 10·26 직후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미 선포한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비상 계엄을 제주도로 확대한 조치였는데, 이게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되고 어찌하여 쿠데타로까지 불리게 된 것인가.

이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몇 가지 반응을 접한 적이 있다. 5·17쿠데타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5·17쿠데타? 쿠데타는 5·16 아닌가?", "계엄 확대도 쿠데타라고 하는 건가?"라고 묻거나 "12·12쿠데타는 들어봤지만 5·17쿠데타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그만큼 5·17쿠데타라는 용어도, 그 의미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전두환·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방식과도 관련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전두환 일당은 1979년에 먼저 12·12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1980년에 다시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이렇게 몇 달에 걸쳐, 2단계로 기나긴 쿠데타를 진행한 건 1961년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방식과도 다르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쿠데타들의 일반적인 형태와도 차이가 난다. 전두환 일당이 그런 식으로 쿠데타를 진행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광주항쟁 직전까지는 위기감을 덜 느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5·17쿠데타가 쿠데타냐, 쿠데타라는 생각이 안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질문에서 얘기했는데, 전두환·신군부의 쿠데타는 5·16쿠데타하고도 물론 다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쿠데타 역사상 아주 드문 사례를 제공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 글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예라고까지 적혀 있다.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가 일어난 지 무려 5개월이 지나서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5·17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통대'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건 그보다 3개월 후인 1980년 8월이다. 새 헌법에 따라 다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새롭게 출발하는 건 1981년 2월이다. 12·12쿠데타부터 이때까지 따지면 1년이 넘는다. 사실 10·26 이후 상황을 살펴보면 쿠데타를 단숨에 해서 권력을 바로 장악하기도 어려웠다고 본다. 하여튼 아주 특이한 쿠데타를 일으킨 건데, 그래서 다른 쿠데타에 비해 사람들한테 잘 안 들어오는 면이 있다.

그다음에 대개가 '1980년 5월 17일 밤 국무회의에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것만이 5·17쿠데타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5·17쿠데타의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계엄 확대뿐만 아니라 국회 해산, 그리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국보위 설치 문제, 이 세 가지를 5·17쿠데타를 통해 동시에 한 것이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계엄 확대, 이것만 기억한다.

계엄 확대를 교과서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니까 '부분 계엄이면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계엄사령관이 받는 형태가 되지만 전국 계엄일 경우에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한테 직보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계엄사령관의 권한이 커진 것이다', 이런 정도로 대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5·17 비상 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계엄사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장악하려고 전국 계엄으로 몰고 간 것이다. 여기서 계엄사라는 것 안쪽에는 전두환·신군부가 실질적인 힘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쨌든 간에 5·17쿠데타가 굉장히 중요한 것임에도 대개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은 대통령 압박, 노태우는 군 지휘관 회의에서 바람잡이

프레시안 : 5·17쿠데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5월 17일 그날 중요한 회의가 여러 가지 열린다. 먼저 이날 민관식 국회의장 대리가 20일에 국회를 소집한다고 공고했다. 그에 앞서 이미 5월 14일에 신민당이 소속 의원 66명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 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였다. 15일에는 국회 개헌특위에서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임기는 4년, 그리고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핵심 내용에 여야가 합의하고 헌법 개정안 작성을 사실상 완료했다.

그러니까 5월 20일 국회가 열리면 어떤 사안을 다룰 것이라는 건 분명한 상황이었다. 이미 5월 13일에 정부 쪽에서 개헌안을 국회와 사전 조정하겠다는 얘기를 한 바가 있기 때문에 국회 주도 아래 개헌 문제를 다룰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도 개헌 확정 이전에 계엄을 해제할 것이 확실했다. 그럴 경우 신군부의 권력 탈취가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동 순방을 위해 10일 출국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일정을 앞당겨서 16일 밤 10시 반 서울에 돌아왔다. 전두환과 최규하는 16일 밤 최규하가 귀국한 이래 그다음 날 자정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날을 보내게 된다.

5월 17일 오전 10시부터 45분간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독대했다. 45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전두환·신군부의 당초 구상은 비상 계엄 전국 확대를 통한 내각 기능 정지뿐만 아니라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기구로 혁명 평의회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최 대통령한테 이때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 대통령은 그런 헌정 중단 사태는 5·16 하나로 족하고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 중단 사태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이외의 다른 두 가지 방안은 수용하지 않겠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이것 자체는 헌정 중단은 아니지 않나.

▲ 전두환(왼쪽)과 최규하(오른쪽)는 1980년 5월 16일 밤 최규하가 귀국한 이래 그다음 날 자정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날을 보내게 된다(1986년 모습, 가운데는 윤보선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대통령을 압박하는 것 이외에 전두환 쪽에서는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전두환은 권정달한테 또 하나의 지시를 했다. 권정달 증언에 의하면, 권정달은 이날 오전 9시 30분경 전두환 지시에 따라 주영복 국방부 장관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권정달은 '시국 수습 방안 3가지를 오전 10시에 개최할 예정인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안건으로 상정해서 결의해달라. 그리고 그걸 가지고 대통령한테 가서 재가를 받아달라'고 주영복 장관한테 얘기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지시 사항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한 건데, 여기서 시국 수습 방안 3가지라는 건 앞에서 말한 계엄 확대 등 3가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두환·신군부 쪽에서 볼 때 또 문제가 생겼다. 5·17쿠데타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이 1988년에 증언한 것에 의하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리기 전에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간담회가 있었다. 여기서 주영복이 계엄 강화·확대, 국가 보위를 위한 비상 기구 설치 문제, 국회 해산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자 유병현이 계엄 확대 문제는 군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국가 보위를 위한 비상 기구 설치 문제, 국회 해산 방안을 어떻게 군 지휘관 회의에서 논의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돼 있다. 헌정을 중단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군 지휘관 회의에서 논의할 수 있느냐, 이런 얘기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면서 유병현이 "국회 해산은 위헌인 만큼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제동을 건 것으로 돼 있다.

이렇게 되면서 다음 단계로 가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오전 10시로 예정했던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오전 11시 40분이 돼서야 열린 것에서도 그 점을 느낄 수 있다.

프레시안 :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서중석 : 여기서도 또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까 전두환·신군부 뜻대로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된 건 아니었다.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는 이날 오전 11시 40분부터 국방부에서 열렸는데, 오후 2시 20분까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 회의에는 주영복 장관을 비롯해 44명의 육해공군 지휘관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이 '북한의 침공 가능성이 높고 시위가 확산되고 있어 위기 상황이다', 이렇게 보고했다. 5월 10일 일본 쪽에서 북한의 남침설 정보가 들어왔는데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분석한 결과 그건 근거 없는 정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도 최성택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군인들 앞에서 그 얘기를 또 꺼낸 것이다.

그것에 이어서 주영복 장관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여기에 그 안을 제시해서 국무회의에 올려 대통령 재가를 받아 시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장관의 지명을 받은 몇몇 장성이 군의 정치 개입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장관이 지명도 안 했는데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나섰다. "군이 개입하는 것은 마지막이다.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국민 합의에 의해서 할 때 해야 한다", "회의는 (…) 미리 결정해놓고 하면 의의가 없다"고 하면서 반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주영복 장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이 '국가가 위기 상황이다', '불순분자를 색출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다잡았고, 뒤이어 특히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군이 나서야 한다'며 바람을 잡았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실린 이날 회의록을 읽어보면, 전두환·신군부 쪽에서 그런 식으로 바람을 잡아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비상 계엄 전국 확대 및 군의 정치 개입 쪽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그걸 보면, 비상 계엄 전국 확대에 대한 얘기는 이날 회의에서 나왔지만 국회 해산 같은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유병현 증언을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다. 유병현 증언에 의하면 이 회의가 끝날 무렵 합의 내용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자고 하면서 연(連)서명 건의서 용지가 돌았다. 참석자들이 쭉 서명한 걸 연서명이라고 하는데, 내용이 전혀 적혀 있지 않은 백지에 참석자 명단만 쓰게 했다. 거기에 주영복이 내용을 써넣었을 터이고 그걸 가지고 최규하 대통령한테 갔을 것이다. 가서 '국무회의를 열어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건데 거기에 세 가지(비상 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가 다 들어 있었는지 아니면 계엄 확대만 들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만일 주영복이 백지에 그 세 가지를 다 써서 가지고 갔다고 하더라도, 최규하가 계엄 확대 이외의 두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확실하다.

위압적 분위기에서 강제된 계엄 확대 결의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 후 국무회의가 열리게 된다.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그날 밤 9시 42분 국무회의가 열리게 된다. 9시 30분에 시작됐다는 설도 있지만 9시 42분이 더 유력하다. 하여튼 국무위원들을 비상 소집해서 회의를 연 것인데, 국무위원들이 들어갈 때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양쪽에 약 1미터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또한 외부와 연결된 통신선까지 절단해버렸다. 국무위원들은 외부와 연락할 수도 없고 집총한 군인들이 쫙 늘어서 있는 절해고도에 갇힌 셈이었다. 그렇게 군인들이 집총한 상태로 도열하게 한 건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한 짓이다. 분위기를 아주 무섭게 해서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것을 국무회의에서 결의하는 데 8분밖에 안 걸렸다. 찬반 토론도 없었고, 이 회의에서 얘기를 한 사람은 김옥길 문교부 장관 한 사람으로 나와 있다. 김옥길만 "설명을 해달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설명도 없어서 그냥 서명했다고 쓰여 있다.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에서 생각한 비상 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 중에서 이날 국무위원들이 동의해준 건 계엄 확대뿐이었나.

서중석 : 그거 하나만 해준 거다. 다른 건 동의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국회 해산 같은 경우 그야말로 헌정 중단을 뜻하는데, 어떻게 그것에 국무위원들이 동의하겠나.

여기서 잠시 유신 쿠데타와 비교하면, 그때는 박정희 자신이 모든 걸 결정했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며,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키되 그 기능은 이제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리지 않았나. 비상국무회의라는 것도 새롭게 구성된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국무회의에 '비상' 자를 붙인 것일 뿐이었는데, 거기에다가 헌법 개정안 의결을 비롯한 모든 중요한 입법 기능을 부여해버렸다.

다시 돌아오면, 1980년 5월 17일 국무회의에서 비상 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한 것 자체는 형식적으로는 합법성을 띠고 있다. 전두환·신군부는 권력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형식적으로라도 최대한 합법성을 띠려고 했다. 12·12쿠데타 그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잡으러 갈 때에도 대통령한테 연행 지시를 받으려 했고, 나중에 국보위를 설치할 때에도 형식상으로는 대통령령에 의거하지 않았나. 5월 17일 비상 계엄 전국 확대 과정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는데, 그렇지만 본격적인 쿠데타의 문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열렸다.

전국 계엄이 갖는 의미는 권정달 진술에 잘 나와 있다. "당시 국민 대다수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고 군부 실세였던 전두환 장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역 계엄은 '물 계엄' 또는 '종이호랑이'로 비하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저와 보안사 참모들은 지역 계엄만으로는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고 군부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선행 조치로서 지역 계엄보다 한층 강화된 비상 계엄의 전국 확대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신군부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배제한 채 계엄사령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강력히 독려할 수 있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 방안이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제기됐습니다."

그러니까 계엄 확대 자체가 국무위원들한테는 쿠데타가 아니었던 것이고 이자들한테는 쿠데타였던 것이다. 계엄 확대를 발판으로 국가를 말아먹으려고 한 것이니까. 이게 구체화되는 것이자 아주 중요한 것인데도 사람들이 주목을 안 하는 게 있다. 그 부분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멋대로 헌정 중단하고 국회 봉쇄한 전두환 일당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국무회의에서 비상 계엄 전국 확대 방안이 통과된 직후에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 계엄 포고령 제10호다. 날짜는 1980년 5월 17일로 돼 있고 계엄사령관 육군 대장 이희성 이름으로 발동한 건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 계엄이 계엄법 제8조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 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 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있을 수가 없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걸 그동안 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뭐냐 하면 "2. 국가의 안전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아래에 "가.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이렇게 돼 있다.

비상 계엄이건 다른 계엄이건 계엄이 선포되면 집회, 시위의 자유가 제한을 받는 건 확실하다. 어떤 계엄에서건 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4년 6월 3일 선포된 비상 계엄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이건 헌정을 중단한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한다는 건 '국회 너희들, 이제 움직이지 마라', 이런 얘기였다.

비상 계엄이 여러 차례 선포되긴 했지만, 이런 건 그 이전에는 한국에서 두 번만 있었다. 언제냐 하면 1961년 5·16쿠데타가 났을 때 계엄 포고가 그렇게 돼 있다. 그리고 1972년 10·17쿠데타, 즉 유신 쿠데타 때도 그랬다. 이 두 가지는 헌정을 중단시키고 권력을 탈취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런데 1980년 이때는 대통령이 허가하지도 않은,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지도 않은 사항을 여기서 감히 이희성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포고한 것이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건 전두환·신군부 쪽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았겠나. 대통령이 그다음 날 발표한 특별 성명에서도 이걸 알 수 있다. "대통령 최규하, 1980년 5월 18일",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서는 무슨 얘기만 했느냐 하면, 중요한 내용으로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비상 계엄으로 전환을 선포했다는 그것 하나만 들어가 있다. 이건 당연한 것이다. 최규하가 계속 주장한 게 헌정 중단은 안 된다는 것, 그거였다.

그런데 대통령 특별 성명 이전에 나온 계엄 포고령 제10호로 헌정 중단 조치를 내린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전두환·신군부는 이미 5월 17일경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그다음에 국회를 무력화하는 작업에 바로 들어갔는데, 이건 폭력으로 무력화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대통령이 허가를 안 해주지 않았나. 이 중요한 사항들이 자료에 나와 있는데도 그동안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5·17쿠데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국회 문제였다. 다른 사안들보다도 국회 해산이 실제로는 쿠데타 내용에 제일 부합하는 것이었다. 다른 건 다 법의 형식을 빌리지 않았나. 계엄 확대도 어쨌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다. 그런데 국회 해산만은 그게 안 된 것이다. 그리고 최규하가 그것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국회 해산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프레시안 : 5·17쿠데타로 국회는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나.

서중석 : 육본은 5월 17일 오후 8시경 수도군단 예하 33사단에 국회 의사당 및 한국방송공사 병력 투입을 준비토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때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는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이었다. 국무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헌정 중단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계엄 포고령이 나기도 전에 그렇게 한 것이다. 참 놀라운 자들이다. 18일 오전 0시 20분 출동 지시가 떨어지자 33사단 101연대 병력이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지원받아 국회 의사당에 진주했다. 그러고는 정치인들의 국회 출입을 막아버렸다.

국회가 열리기로 돼 있던 5월 20일 상황은 어떠했느냐. 오전 10시 15분경 국회의원 등 300여 명이 5·17 조치를 비난하면서 의사당에 들어가려 했다. 이 사람들은 일제히 모여서 왔다. 그러나 이런 건 보도될 수 없었다. 검열에서 다 잘렸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사람들은 국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이상신 1대대장이 출입을 저지했다. 그래서 임시 국회는 개회되지 못하고 6월 18일 자동 폐회되는 형식을 밟았다. 33사단 병력은 전두환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8월 27일)된 직후인 8월 30일 국회에서 철수했다. 헌정을 중단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국회의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계속 지키다가 8월 30일이 돼서야 물러갔다는 말이다.

(국회 봉쇄와 더불어 국무회의에서 계엄 확대를 결의하기 전 전두환·신군부가 취한 대표적인 조치가 예비 검속이다. 1995년 검찰이 발표한 12·12쿠데타와 광주항쟁 관련 수사 결과에 따르면, 1980년 5월 초 전두환은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예비 검속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5월 15일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대상자 명단, 혐의 내용 등을 보고했다. 17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치인 등을 체포, 조사할 계획을 보고했다. 형식은 보고였지만 실제로는 통보였다고 볼 수 있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이학봉은 17일 오후 1시에 열린 전국 보안 부대 수사과장 회의에서 비상 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지역의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예비 검속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는 국무회의가 열리기 한참 전일 뿐만 아니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때 이미 예비 검속 지시를 내린 것이다. 예비 검속에 걸려 체포된 사람은 2699명에 이른다. '편집자')

이처럼 국회를 폭력으로 무력화한 것과 함께 불법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 조치가 잇따랐다.

▲ 5·17쿠데타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80년 5월 19일 자 1면. ⓒ경향신문 화면 갈무리


국민들에게 양가적 감정 느끼게 한 김종필 등 권력형 부정 축재자 체포

프레시안 : 박정희는 거듭 폭력으로 국회를 짓밟고 헌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또한 정치 군인 전두환을 유달리 총애해 세간에서 전두환이 '박정희 양아들'이라고까지 불리게 만들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양아들'답게 1980년 5월 국회를 짓뭉갰다. 유신 체제에서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하던 분이 청와대에서 국회 심판을 부르짖는 한편 국민들에게 훈계하는 2016년 오늘날, 박정희식 정치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다시 돌아오면, 전두환·신군부는 국회를 폭력으로 짓밟은 것과 함께 어떠한 조치들을 취했나.

서중석 :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로 보이는데 전두환·신군부는 5월 17일 밤 10시를 전후해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그리고 전 육군 참모총장 이세호, 국회의원 김진만, 중앙정보부 차장과 내무·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치열, 김종필의 형으로 코리아타코마 사장이었던 김종락,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 등을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했다.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이 세 명은 박정희 정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고 김진만은 한때 4인방 중 한 명으로 불리며 공화당의 실세 중 실세였던 사람이다. 이와 함께 전두환·신군부는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 리영희 등을 사회 혼란 조성 및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했다. 권력형 부정 축재자들은 '빙고 호텔'이라고도 불리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김대중 등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것도 불법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김종필은 공화당 총재 아니었나. 현직 여당 총재이자 국회의원이었는데 어떻게 감히 계엄사에서 하루아침에 그런 식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쿠데타적 방식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김대중 체포에 대해서도 놀랍다는 생각을 가졌겠지만,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최고 권력을 과시했던, 그리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자들로 알려져 있었던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을 잡아넣었다는 점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 권력에 대해 누가 감히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두환·신군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진 자들인가를 단숨에 입증해 정치권이건 관료건 군부건 재벌이건 다른 누구건 '그자들한테 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버렸다.

일반 국민들한테도 한편으로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두려운 존재다', 이런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이자들한테 맞서서 시위를 한다거나 하는 건 생각하기 어렵게 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야, 굉장한 일을 했는데', 이런 생각도 갖게 했다. 김대중 반대파인 특정 지역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일부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특히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같은 사람들을 잡아 가둔 것에 대해 '야, 굉장한 일을 했네',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측면은 분명히 있었다.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은 부패 권력을 대표하는 자들 아니었나.

프레시안 : 3김 중 김영삼은 이때 연행되지 않았다. 그 후 어떻게 되나.

서중석 : 김영삼 회고록을 간단히 보자. 계엄 확대 그리고 김종필, 김대중 연행 사실이 퍼지면서 5월 18일 상오에 신민당 정무 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할 것, 국회 의사당에 배치된 계엄군은 월권행위를 중단할 것 등을 결의했다. 국회 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이 한 짓은 사실 월권행위 정도가 아니라 헌정 중단 행위인 셈인데, 이때는 월권행위라고 표현하고 그걸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날 늦게 계엄사 쪽에서 김영삼을 찾아왔다. 기자 회견 같은 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다음 날인 19일 신민당사는 군인들에 의해 봉쇄됐다. 김영삼은 20일 오전 9시에 기자 회견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20일 오전 8시경 실탄을 장전하고 착검한 무장 헌병 중대 병력이 상도동 김영삼 집 주변을 에워쌌다. 그런 속에서 김영삼은 회견문을 읽으려고 했지만, 무장 군인들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안팎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인 1981년 4월 30일까지 김영삼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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