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조차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 각서 쓴 사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2>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스물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1961년)와 유신 쿠데타(1972년) 후 박정희 세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심하게 제약하는 각종 악법을 만들었다. 전두환·신군부도 그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5·17쿠데타로 국회가 마비된 상태에서 어떤 방식으로 악법을 제조했나.

서중석 :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0월 22일에는 개헌안이 국민 투표로 확정됐다. 새 헌법도 만들어서 통과시켜놨으니 새로운 정권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악법을 본격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이제 그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전두환 측은 악법 만들기에 대해 유신 쿠데타 당시 박정희하고 비슷하게 생각했다. 뭐냐 하면, 그때 박정희는 유신 국회를 열고 거기서 악법을 만들어 욕을 얻어먹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국회를 해산한 후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여러 악법을 제조하지 않았나. 그와 비슷하게 전두환 쪽에서도 국회를 마비시켜놓고 악법을 양산하는 길을 택한다.

그걸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좋은가를 신군부 이너 서클에서 논의했다. 그런데 국보위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왜냐하면 국보위는 현직 장관들하고 다수의 군인 등으로 이뤄져 있지 않았나. 그리고 전두환이 위원장을 맡았던 국보위 상임위의 경우 상임위원 30명 가운데 18명이 현역 군인이었다. 나머지는 민간인이긴 했지만 이 사람들도 다 거기에 종속된 자들이었다. 그래서 악법을 만드는 데 이쪽을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국보위의 인적 구성 등에 문제점이 있어 최종 단계에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각종 악법 제조 기구로 출현하게 된다. 국가보위입법의원 선정 작업은 권정달과 우병규 청와대 정무 제1수석비서관이 주도했다. 우병규 이 사람이 당시 굉장히 힘이 셌다. (우병규는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정치학 박사로, 국보위 법사위에서 박철언과 함께 이른바 5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국가보위입법의원 81명 중에는 당시 적잖은 사람들이 의외라고 여겼을 인물들도 있다. 예컨대 혁신계를 자처하던 이들이나 진보 인사로 분류되던 사람들 중에도 여기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보나.

서중석 : 국가보위입법의원 명단을 보면 이해가 잘 안 가는 사람이 여러 명 들어 있다. 야당에서 활약했던 채문식, 한영수 같은 사람들, 그리고 김상협 고려대 총장, 정의숙 이화여대 총장, 권이혁 서울대 총장 같은 사람들도 들어 있었다. 진보적 목사로 유명했던 조향록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사람들 이외에 조선일보계도 여러 명 있었다. 조선일보사 사장 방우영, 그리고 조선일보 간부로 일했던 송지영, 김윤환, 남재희가 들어가 있었다. 또 다른 언론계 인사로는 전두환을 띄우는 데 앞장섰던 이진희도 들어 있었다.

과거에 혁신 정당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김철, 윤길중, 김정례 이 세 명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정권 때 조봉암과 함께 활동했던 윤길중은 박정희 집권기에는 신민당에 몸담기도 했는데, 역시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때 국가보위입법의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김철하고 김정례는 단짝, 동지 사이로 박정희 집권기에 진보적 활동을 했다. 김철은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도 했다. 김철 이 사람은 통일사회당 간판을 메고 다녔다는 얘기를 듣고 그랬다.

그런데 왜 들어갔느냐. 그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뭐냐 하면, 우선 이 사람들은 원래 족청(이범석이 조직한 조선민족청년단) 계열이다. 족청 계열에는 진보적인 사람도 있었다고 내가 전에 쭉 이야기하지 않았나. 족청 계열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족청 계열이라는 점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1950년대건 4월혁명 공간이건, 그러니까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1960년 4월 26일부터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혁신계에서 활동은 했지만 혁신계에서도 보수적인 쪽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도 외롭게만 활동하면서 지친 가운데 권력 쪽에서 감투 하나 주니까 덥석 문 것이 아니냐, 난 그때 그렇게 해석했다. 난 지금도 그래서 들어갔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으로 이 사람들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다. (김철은 소설가 출신으로 야당 국회의원을 한 김한길의 아버지다. '편집자')

악법 제조의 산실, 국가보위입법회의

▲ 정치 풍토 쇄신법이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0년 11월 3일 자 1면. ⓒ동아일보
프레시안 : 악법 제조의 산실로 불린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어떤 법들을 만들어냈나.

서중석 : 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981년 4월 제11대 국회가 개원할 때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처리한 것으로 돼 있다. (1980년 10월 28일부터 1981년 4월 20일까지 189건의 법률을 통과시켰다고 나오는 자료도 있다. 수치는 조금 다르지만,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날림으로 많은 법을 제조했다는 지적은 다르지 않다. '편집자') 그런데 실제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신군부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1월 3일 기성 정치인의 활동을 8년간 금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 법안'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11월 12일 1차로 811명을 정치 활동 금지 대상자로 공고했다. 사흘 후(11월 15일)에는 2차로 24명을 추가 공고했다. 그렇게 해서 정치 활동 금지 대상자가 모두 835명이라고 발표했다.

정치 풍토 쇄신법은 누구 할 것 없이 1962년 3월 최고회의에서 만든 정치활동정화법을 떠올리게 했다.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1968년 8·15까지 규제된 사람들은 6년여 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지 않았나. 1963년과 1967년 총선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이다. 정치 풍토 쇄신법도 정치활동정화법과 똑같이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못 나오게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쿠데타 주동자들도, 전두환·신군부도 자기들한테 껄끄러운 정치인들이 두 번 국회의원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이다. (정치 활동 금지 대상자 835명에는 김종필도 포함돼 있었다.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던 때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기성 정치인들을 "보균자"로 표현하며 "보균자는 자진해서 국회에 안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압박했던 김종필은 육사·쿠데타 후배들에 의해 18년 만에 정반대 처지로 전락했다. '편집자')

이렇게 규제 대상자로 묶인 835명 가운데 586명이 적격 심판을 청구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중 268명이 이른바 구제돼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상식선에서 생각해보면, 야당 의원이면 야당 의원답게 '이 더러운 정권에 내가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라고 하면서 정치 규제 대상이 된 걸 떳떳하게 여겼을 것 같지 않나?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당시 다수의 야당 의원들은 규제에 묶이지 않기 위해 줄을 찾아 여기저기 막 뛰어다녔다고 한다. 김영삼이 총재일 때 신민당 의원이 6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60여 명이 규제에 묶이지 않고 다시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신민당 의원이었던 한영수가 얘기했다. 한영수 이 사람은 국가보위입법의원이 된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자기 합리화가 있긴 할 텐데, 하여튼 김영삼과 그 측근 몇 사람을 빼놓고는 거의 다 처절할 정도로 발버둥을 쳤다고 증언했다.

프레시안 :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 이외 부문에도 손을 대지 않았나.

서중석 : 11월 29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집회, 시위에 관한 규제를 강화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가결했다. 12월 26일에는 언론기본법 등을 의결하고 대통령 선거법 등 17개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노동조합법 개정안 등 5개의 노동 관계법 및 개정안을 가결했다. 공정거래법, 중앙정보부법도 의결했다.

대통령 선거법 내용을 보면, '통대'에서 대통령을 선거한 유신 체제 방식과 흡사하기는 한데 그것과 약간 다르게 해놓았다. 1905개 선거구에서 5278명의 선거인을 선출한 다음 이 사람들로 선거인단을 구성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 방식인데,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과반수 찬성을 얻어 대통령이 되게 했다.

노동 관계법은 조금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언론기본법을 먼저 보자. 이건 새로 만든 법이었는데, 언론기본법에 의하면 정부가 언론사에 정간이나 폐간을 명령할 수 있었다. 또 방송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를 만들어서 언론을 통제할 수 있게 했고, 프레스카드를 발급해 기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언론을 옥죄기만 한 건 아니다. 사탕도 줬다. 해외 연수 같은 걸 많이 장려했다. 해외 연수 같은 걸로 기자들을 회유할 수도 있게 한 것이다.

바른 말 하는 언론인들을 언론사에서 내쫓고 관련 계통에 취업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을 지난번에 살펴보지 않았나. 그러한 언론인 숙청, 언론기본법 제정과 함께 전두환·신군부 언론 정책의 또 하나의 큰 줄기가 언론 통폐합으로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마구잡이 언론 통폐합…이병철도 피해 갈 수 없었다

프레시안 : 언론 통폐합,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1980년 11월 12일 오후 6시경 한 무리의 언론인들이 어둠침침한 보안사 2층 건물에 들어왔다. 서울 지역 13개 언론사의 발행인과 경영주 17명이었다. 보안사는 이 사람들한테 소유하고 있는 언론사를 조건 없이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이 사람들로선 중요한 재산을 탈취당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도 각서를 받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끝났다고 한다.

보안사 또는 신군부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가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K-공작,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전두환·신군부의 언론 공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일개 보안사 준위인 이상재였다. 언론사 사주라고 하면 그래도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당사자들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보안사에서 '언론사를 내놓겠다. 포기한다', 이런 각서를 쓰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쓰고 나왔다.

내가 듣기로는 이병철도 그 각서를 그렇게 썼고 그래서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다고 그런다. 이병철은 한국 제일의 재산가로 불린 사람 아닌가. 그런 이병철한테 TBC(동양방송)를 내놓으라고 한 것이었다. 당시 TBC는 제일 인기 있는 텔레비전 방송사였다. 그걸 소유하고 있다는 건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많은 재산을 갖는 것하고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놓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나. 그렇지만 안 쓸 수가 없어서 그렇게 쓰고 나온 것이다.

이틀 후인 11월 14일 언론 통폐합이 단행됐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데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였다. 동아일보는 당시 방송 중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고 인기도 있었던 동아방송을 포기해야 했고, 중앙일보는 TBC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신문은 통폐합을 시켰다. 서울의 주요 일간지들은 대부분 살아나기는 했는데, 7개 중앙 종합지 중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흡수됐다. 한국일보는 서울경제신문, 당시 상당히 영향력이 있던 이 신문을 뺏겼다. 분리를 강요당한 것이다.

그리고 중앙지의 지방 주재 기자를 철수하게 했다. 광주항쟁 때 동아일보 광주 주재 기자가 활약했다고 그랬는데, 이제는 어떤 중앙지도 지방에 기자를 둘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앙지의 역할, 활동을 크게 제한했다. 그다음에 각 도에 신문사를 하나만 두게 했다. 예컨대 부산에는 잘 알려진 신문사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가 있었는데,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통합되는 식이었다. 광주에서도 전남매일신문이 전남일보로 흡수 통합됐다. 그런 식으로 바꿔놓았다.

통신사의 경우 오랫동안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활약해왔는데, 권력이 훨씬 통제하기 좋도록 이 두 개를 합병해 연합통신으로 발족케 했다. 이렇게 통신사도 통폐합을 했다. 그러면서 소위 방송 공영화라는 걸 강화하는 방식을 밟았다. 막강한 권력이 방송 공영화를 강화했다는 건 그만큼 방송이 권력에 훨씬 더 체계적으로 종속되게 됐다는 걸 얘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KBS는 이병철의 삼성이 내놓은 TBC TV와 TBC 라디오, 그리고 동아방송, 전일방송, 서해방송, 대구FM 등까지 흡수해 거대 방송사가 됐다. TBC TV는 KBS 2TV가 됐다. MBC의 경우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던 지방 제휴사 21개 사의 주식을 서울 MBC가 51퍼센트 인수해 제휴사들을 계열사로 만들었다. 5·16장학회, 이게 나중에 정수장학회가 되는 건데 거기서 가지고 있던 서울 MBC 주식 30퍼센트를 제외한 MBC의 민간 주식은 주주들이 국가에 헌납하는 식으로 처리됐다. 얼마 후 전두환 정권은 MBC 주식을 KBS에 넘겨 MBC가 KBS에 실질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었다. (1980년 12월 11일 문공부는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의 주식 65퍼센트를 KBS가 인수했으며 이는 공영 방송 체제를 완결하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다. KBS는 1981년 7월 문화방송-경향신문 주식 5퍼센트를 더 인수해 모두 70퍼센트의 주식을 보유하게 된다. KBS가 보유한 MBC 주식 70퍼센트는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12월 방송문화진흥회로 이관된다. '편집자') 그리고 CBS는 언론 통폐합 결과 보도 기능이 박탈됐다. 전두환 정권은 CBS에 선교 방송만 하도록 했다.

언론 통폐합 결과 방송사를 포함한 언론이 크게 축소되고 권력이 장악하기가 훨씬 더 쉽게 됐다. 통폐합 대상이 된 방송사에서는 고별 방송을 하게 되는데, CBS에서 마지막 뉴스를 내보낼 때 여성 아나운서가 뉴스 원고를 읽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사건이 나자 전두환 정권은 고별 방송에 관한 지침이라는 걸 내렸다. 동아방송, TBC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기 위한 조치였다.

▲ 언론 통폐합을 주도한 허문도(오른쪽, 1988년 9월 국회 광주 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모습). ⓒ연합뉴스


노동 관계법 개악하고 민주 노조 때려잡은 전두환·신군부

프레시안 : 언론 통폐합을 비롯한 전두환·신군부의 언론 공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 허문도다. 허문도를 주축으로 한 공작을 통해 언론을 손아귀에 넣은 전두환·신군부는 그 후에도 보도지침 등을 통해 언론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길은 빼앗긴 말, 제대로 된 언론을 다시 찾고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언론을 장악해 보도를 쥐락펴락하려는 정치 권력의 뒤틀린 욕망은 6월항쟁 이후에도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이명박 정권 출범 후 KBS, MBC, YTN 등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박근혜 정권 출범 후에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과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세월호 관련 통화 내용을 접한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얘기다. 올바른 말을 지키고 권력은 물론 언론도 감시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을 절감하게 하는 사례들이다. 다시 돌아오면,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가결한 노동 관계법 및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었나.

서중석 : 그전보다 월등히 노동을 국가 권력이 통제하는 것, 그게 핵심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가결한 노동 관계법 및 개정안을 보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전두환·신군부 이전, 그러니까 유신 체제에서도 노동 통제에 많은 힘을 쏟았다. 박정희 정권이 이미 1971년에 국가보위법을 통과시켜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든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런 속에서 1980년대에는 산업 노동자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 아래, 그렇게 되면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보고 그걸 통제하기 위해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 관계법에 손을 댄 것이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우선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신설했다. 그리고 노조 설립 요건을 강화하는 한편 기업별 노조 체제를 만들게 했다. 박정희 집권기의 노동조합 체제를 제대로 된 산별 체제라고 얘기할 수는 없어도 그때는 상위 노조가 일정하게 역할을 하지 않았나. 예컨대 섬유노조 본부에서 단위 노조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악당 역할도 했다. 그런 걸 사실상 막아버리고 기업별 체제로 바꾸게 한 것이다. 그 이외에 노조 임원 자격 및 조합비 사용 제한, 쟁의 냉각기간 연장, 직권중재 대상 확장 등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악법 조항으로 꼽힌 건 제3자 개입 금지였다. 유신 정권의 경우 1979년에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을 일으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관계자들을 교육시킨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하지 않았나. 그리고 도시산업선교회 등도 좌경 단체로 매도했다. 그렇게 해서 노조 활동을 비롯한 노동자 활동 전반에 바깥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제3자 개입 금지라고 해가지고 외부에서 개별 기업 노조를 도울 길을 차단한 것이다. 박정희 때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보부 등 국가 기관을 통해 노동자들의 활동을 강력히 통제하고 기업을 지원하면서, 힘이 약한 개별 노조가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프레시안 : 노동 운동도 된서리를 맞지 않았나.

서중석 : 악법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것과 함께 정책적, 행정적 통제 수단을 동원해 노동 운동을 억압했다. 그러한 민주 노조 파괴 활동을 노동 전문가 이원보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980년 8월 21일 전두환·신군부는 노동청을 통해 노동조합 정화 지침이라는 걸 내렸다. 산별 위원장급 12명은 즉시 사퇴하고, 산별 노조 산하 지역 지부를 즉각 폐지하며, 노조 정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노총 및 산별 노조 위원장급 상층 간부 12명이 바로 사직서를 쓰고 떠난다. 그러면서 지역 지부 105개도 해산되고 조합원도 14만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그러한 지침을 내린 데 이어 전두환·신군부는 노동계 인사 191명을 이른바 정화 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들한테 노조 간부를 그만두고 현장에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노조 민주화를 비롯한 민주 노조 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여기에 다 포함됐다.

12월 8일 원풍모방 40명, 청계피복노조 9명 등 민주 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이 연행됐다. 계엄사로 끌려간 이들은 협박과 폭행 속에서 사표를 강요당했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원풍모방에서는 일부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아야 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서울의 봄 시기에 8일간 농성, 시위 투쟁을 벌여 10인 이상 사업장의 퇴직금 지급을 제도화한, 그래서 이 시기 노동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1981년 1월 6일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노조원 21명이 농성에 돌입했지만,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11명이 구속되고 농성하던 사람들은 다 해산되고 말았다. 청계피복노조와 더불어 대표적인 민주 노조로 얘기되던 콘트롤데이타 노조, 반도상사 노조도 소위 정화 조치에 이은 폐업으로 1981년과 1982년에 각각 노조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민주 노조 파괴는 원풍모방에서 절정을 이뤘다. 전두환·신군부는 1980년 9월 방용석 지부장 등을 소위 정화 조치했고, 12월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노동자들을 연행해 강제로 사표를 받는 한편 그중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그렇지만 원풍모방 노조는 굴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그런 속에서 1982년 9월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원 1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노조 간부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부쉈다.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자, 9월 30일 밤부터 추석날인 10월 1일 새벽에 걸쳐 전투 경찰까지 합세해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끌어냈다. 그것에 이어 경찰은 노조 조합장 등 노조 간부 전원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10월 7일과 13일 회사 앞과 영등포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수십 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거나 구류에 처했다. 회사는 574명을 해고했다. 11월 12일에는 핵심 간부 11명이 전원 체포됐다. 재기하려는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마지막 시도도 그것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원풍모방 노조 파괴는 1970년대에 활약했던 민주 노조들에 대한 파괴가 일단락됐다는 걸 말해줬다.

반공법 없앤 대신 국가보안법 독소 조항 강화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는 사상의 자유를 더욱 옥죄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나.

서중석 :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980년 12월 30일 반공법을 폐지해 국가보안법으로 흡수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반공법은 5·16쿠데타 직후 최고회의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전 세계에 반공법이 있는 나라가 한두 군데밖에 안 된다고 당시 이야기하고 그랬다. '반공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식의 사상 통제법이 있을 수 있느냐'는 얘기들이 나돌고 하니까 반공법을 폐지한 것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에 흡수된 그 내용을 보면 불고지죄를 통합하고 형량도 전체적으로 높이는 등 독소 조항을 강화했다.

지난번에 말한 사회보호법도 1980년 12월에 통과됐다. 사회보호법은 1980년대에 많은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법, 특히 전과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기를 마친 후에도 다시 갇히게 만드는 인권 유린 악법으로 비난을 받았는데 1990년대에도 여전히 존속했다. 이 법은 2000년대에 노무현 정권에 와서 간신히, 검찰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폐지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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