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일당은 왜 쿠데타 날짜를 바꿔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0>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12·12쿠데타에 이은 또 하나의 쿠데타 계획안, 시국 수습 방안

프레시안 :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 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쪽이 남침설을 퍼뜨린 것을 지난번에 살펴봤는데, 그것에 더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나.

서중석 : 신군부로서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신군부는 이미 집권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다 짜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에 말한 것처럼 미리 병력을 움직여 각지에 군을 배치한 것이었다. 이제 그런 계획안이 어떤 식으로 짜였는가를 보도록 하자.

이때 등장하는 게 바로 시국 수습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보안사 간부였던 권정달은 김영삼 정권 들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시국 수습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는데, 1996년 1월 4일에 작성된 검찰 조서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다.

이 시국 수습 방안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였고 둘째는 국회 해산, 셋째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였다. 세 번째 것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특히 두 번째 것은 유신 헌법조차 짓밟으면서 강권,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겠다는 얘기라고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시국 수습 방안에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 규제 방안 등도 들어 있었다. (전두환·신군부를 비판하는 이들을 "시위 배후 조종자 등 국기 문란자"로 몰아 예비 검속하는 방안과 권력형 부정 축재자 중 일부를 수사할 계획도 시국 수습 방안에 담겨 있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79년 12·12쿠데타에 이은 또 하나의 쿠데타 계획안인 시국 수습 방안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나.

서중석 : 시국 수습 방안 작성을 지시한 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권정달 진술에 의하면 전두환 퇴진, 계엄 해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1980년 4월 말경 보안사 핵심 참모인 허화평, 허삼수, 정도영, 이학봉, 그리고 권정달은 군부가 정국을 강력히 장악할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 그런 속에서 5월 초순경 전두환은 시국 수습 방안을 정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권정달은 보안사 정보처 산하에 4~5명으로 구성된 정세 분석반을 활용해 문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996년 4월 22일에 열린 12·12쿠데타 및 광주항쟁 관련 5차 공판에서 전두환은 시국 수습 방안 작성을 자신이 지시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집권 시나리오가 아니었으며 정당한 업무 수행이었다고 강변했다. '편집자')

그렇게 해서 초안을 만든 다음에 보안사 핵심 참모 5명과 신군부 핵심 세력들이 시국 수습 방안이라는 이름의 쿠데타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모이는데, 그때가 5월 4일경이었다고 권정달은 진술했다. 이날 모인 신군부 핵심, 이건 상층부를 가리키는데 유학성 3군 사령관,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 차규헌 육사 교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이러한 모임이 열릴 때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연락을 했다.

바로 이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그리고 수괴는 물론 전두환일 터인데, 이자들을 이너 서클(inner circle)이라고 부를 수 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유혈 사태를 비롯해 모든 것에서 이자들이 최고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쿠데타에서도 이자들이 주요 역할을 했다. 여기에 더해 보안사 핵심 참모 5인방이 들어가야 한다고 난 본다. 그중에서도 특히 핵심 중 핵심인 '투 허'(허화평, 허삼수), 그리고 이학봉은 들어가야 한다. 그게 전두환·신군부의 이너 서클이라고 본다. 앞으로 내가 이너 서클이라는 말을 이따금 쓰게 될 텐데, 이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신군부 핵심 장성들과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시국 수습 방안이 나오게 된다. 권정달은 그걸 5월 12일경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 보고했다.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 날짜를 바꾼 이유

▲ 1995년 12월 10일, 12·12쿠데타와 광주항쟁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두하는 권정달 전 보안사 정보처장. ⓒ연합뉴스
프레시안 : 쿠데타 날짜를 1980년 5월 17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시국 수습 방안을 언제 실행에 옮기려고 했느냐. 권정달 진술에 의하면 전두환은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의 재판 진행 상황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5월 20일로 잡혀 있던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재판, 그게 끝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고 돼 있다.

나중에 국보위 탄생을 다룰 때 다시 얘기하게 될 텐데, 실제로는 5월 20일 이전에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하여튼 전두환은 김재규 재판을 굉장히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를 사형에 처해야 자신과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일을 마음 편하게 실행할 수 있다고 봤던 것 같다.

그런데 5월 15일 저녁 무렵 전두환, 그리고 권정달을 비롯한 보안사 핵심 참모 5명, 거기에다가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노태우, 정호용 이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국 수습 방안 실행 시기를 갑자기 변경했다. 본래 5월 20일 이후에 실행하려고 했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다음 날인 5월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한 데에는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대학생들이 다시 대규모 데모를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와 함께 국회의 움직임도 영향을 줬다. 이것에 대해 권정달은 "여야 합의로 국회를 소집해 계엄 해제를 결의할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런 움직임이 있기 전에 시국 수습 방안을 실행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국회를 소집하기로 5월 12일에 여야가 합의한 것이 5월 17일 자정을 쿠데타 디데이로 잡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시국 수습 방안 실행 시기를 이처럼 앞당긴 건 전두환이 직접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신군부의 다른 주요 인사들과 논의를 거쳤다고 볼 수 있다.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보안사에 와서 시국 수습 방안의 시행 방법 등을 전두환과 상의했는데 여기서 합의를 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권정달은 얘기했다.

프레시안 : 사전에 곳곳에서 정보가 샌 1961년 5·16쿠데타와 달리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 때 나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980년 5·17쿠데타 과정에서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 것 아닌가 싶다.

서중석 : 나름대로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짰다. 전두환·신군부가 꾸민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다.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이런 계획을 짜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학생과 시민들이 큰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비해 군을 미리 움직여 서울과 전국 주요 지역에 배치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5월 10일 일본에서 들어온 첩보, 그러니까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는 그 근거 없는 첩보를 활용해 5월 12일 임시 국무회의를 거쳐 군과 경찰에 비상 경계 체제 돌입령이 시달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5월 17일에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기만적인 정보를 주면서 적극 협력한 것은 물론이고 미국도 협조하고 있었다. 미국의 협조는 적극적이라고까지 보기에는 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미국이 이런 변화하는 사태의 의미를 몰랐겠나. 미국은 계엄군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았는데, 군을 그런 식으로 배치한 게 뭘 의미하는지를 몰랐겠나. 몰랐을 리 없다고 본다.

분열한 양김의 뒤늦은 대처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 쪽에서 5·17쿠데타 계획을 착착 세우고 있을 때 정치권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상황이 이렇게 되는 속에서 3김이 마지막으로 대처하는 게 나온다. 1980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양김은 분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5월 6일 신민당 비당권파, 이건 동교동계를 가리키는데, 의원 24명이 동교동 김대중 집에서 모임을 열고 독자 기구 구성을 결정한 것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그런데 5월 9일 김영삼은 계엄 해제, 임시 국회 즉각 소집,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10일 신현확 총리는 사회가 안정됐다고 판단되면 즉시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건 신군부와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게 공표했다. 13일에는 정부 쪽에서 개헌안이 국회와 이견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사전 조정을 하겠다고 나왔다.

이처럼 큰 테두리에서 계엄 해제 및 국회와 정부의 개헌안 조정, 이런 틀로 정국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12·12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할 수 없게끔 만들어가는 수순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에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도 움직였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을 보면 12일에는 김대중을, 13일에는 김영삼을 만나서 학생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해달라고 한 것으로 돼 있다. '이거 문제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가고 있다. 사태가 심각하니까 사태 수습에 적극 나서라', 이런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글라이스틴과 김대중이 만난 날짜가 두 사람이 남긴 기록에서 차이가 난다.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글라이스틴이 14일에 찾아온 것으로 돼 있다. 이때는 하루하루 어떤 판단을 했느냐가 아주 중요한데, 두 사람 기록에는 만난 날짜가 다르게 나온다.

5월 13일 김대중은 기자 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최규하, 김영삼, 김종필, 전두환, 김대중의 5인 회담을 제의했다. 언론에는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계엄사 검열 때문이었다. 이처럼 마지막에 와서 이제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김대중, 김영삼은 알게 되고 거기에 대처를 하게 된다.

그런 속에서 5월 15일 지식인 134인 시국 선언이 발표됐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비상 계엄을 즉각 해제하고 평화적 정권 이양의 시기를 단축하라고 주장했다. 이 시국 선언에는 당대를 대표한다고 할까,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많은 지식인이 함께했다.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김대중 집에서 만났다. 그러면서 비상 계엄 즉각 해제, 정부 주도의 개헌 포기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17일에는 민관식 국회의장 대리가 5월 20일에 국회를 소집한다는 공고를 정식으로 냈다. 이대로 가면 20일에 국회가 열리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전두환·신군부가 5·17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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