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학살 '공로'로 훈장…반성은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5>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탱크 앞세운 계엄군에게 비무장 상태로 나아간 죽음의 행진

프레시안 : 계엄군은 1980년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그 후 광주를 고립시키는 한편 터무니없는 거짓 선전을 거듭하며 무력 진압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그런 속에서 항쟁이 막바지로 치닫게 되는 5월 26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5월 26일 새벽 5시 30분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도청에 들어왔다. 그 소리에 도청에 있던 시민군,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도청에는 전날 들어와서 철야한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수습위원 17명이 있었다. '탱크가 있는 곳으로 우리가 가자'고 김 신부가 제의하자 다들 찬동했다. 이 사람들은 '한 시간 이내에 군은 본래의 위치로 철퇴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 시민의 무장화를 호소하고 끝까지 싸울 것이며 마지막 순간에는 도청에 있는 TNT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한다', 이러한 결의를 군에 전하기로 했다.

시민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물러나게 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시민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랐고 외신 기자도 따랐다. 4킬로미터 정도 행진해 오전 9시경 바리케이드 앞까지 나아가자 계엄군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착검한 계엄군이 실탄을 장전하고 양쪽 인도에서 시민들을 경계했다. 군인들은 근처 건물 2층과 옥상에서도 기관총을 내걸고 시민들을 향해 발포 태세를 취했다.

김성용 신부 등이 오자 계엄군 쪽에서는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이 나왔다. 김 신부 등이 강력히 항의하자 탱크는 사라졌다. 그렇게 탱크를 일단 빼긴 했지만 계엄군 측은 막무가내였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시민수습위원들이 군에 요구한 사항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엄군 측은 일방적으로 최후통첩까지 했다. 시민 대표들은 결국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여러 사람들, 그러니까 항쟁 본부의 일부 요원들이나 종교계 인사들은 '탈출해 서울에 가서 만행을 알려야 한다'며 김성용 신부에게 길을 떠날 것을 강권했다. 그래서 김 신부는 이날 밤 가까스로 탈출해 다음 날(27일) 밤 10시경 명동성당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러 갔다. 이 과정에서 김 신부는 9번이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인 1980년 5월 25일 김성용 신부는 미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론을 했다. "이제 우리는 네발로 기어 다녀야 하며, 개돼지처럼 입을 그릇에 처박고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 잔당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치고 박고 개 잡듯이 끌고 가며,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걸으며 인간답게 살려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투신해야 한다. 지난날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결단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비굴하게 짐승처럼 천한 목숨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인간다운 민주 시민으로서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광주항쟁이 막을 내린 후, 광주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들도 김 신부가 이 강론에서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걸고 이 문제를 고민했고, 고뇌 끝에 결단을 내리고 몸을 던져 행동했다. 그러한 고뇌와 실천은 한국 사회가 1987년 6월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등을 거치며 민주주의 쪽으로 이만큼이나마 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싸워야 하는 대상과 달성해야 할 과제는 그때와 약간 다르지만, "개돼지" 취급을 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민주 시민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편집자')

6168명 대 157명…신군부는 왜 시민군의 39배가 넘는 정예 병력을 동원했나

ⓒ오월의봄
프레시안 : 무력 진압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26일 오전 10시, 2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도청 광장에서 제4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는 "모든 책임은 과도 정부에 있다. 과도 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가라" 등 강경한 결의를 채택했다. 오후 3시에는 제5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날 하루에 두 번 열린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과도 정부의 최규하 대통령께 보내는 글'도 채택했는데 이 글에서는 "서울을 비롯한 모든 시외 전화의 소통을 호소합니다" 등의 온건한 주장을 폈다.

오후 5시경 정시채 부지사가 김종배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항쟁 본부 요원들에게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니 빠져나가라고 종용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25일 저녁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로 개편됐다. '편집자') 그렇지만 200여 명은 도청을 사수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박남선 항쟁 본부 상황실장의 지휘 아래 도청에 들어가 무장했다.

오후 6시경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상당수는 무기를 반납하고 처벌을 받자고 주장했지만, 윤상원과 박남선 등은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밤 9시경 학생 및 시민수습위원 11명이 계엄분소에 찾아가서 '오늘 밤에 진입하지 말아달라'는 등의 요청을 했지만, 계엄군 측은 다시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 새벽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진압한다는 상무 충정 작전 구상을 강력히 내비쳤다. 밤 11시쯤 도청에서는 박남선 상황실장의 지휘 아래 무장한 시민군의 배치 상황을 점검했다.

27일 0시 시내 전화가 두절되고 0시 1분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계엄군 가운데 이날 상무 충정 작전에 실제로 투입된 병력은 6168명이었다.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러면 상대는 몇 명이었느냐. 무기라고 해봤자 카빈, M1 소총으로 무장한 157명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시민군 숫자가 157명에 불과했는데도, 공수 부대를 포함해 6000명이 넘는 병력을 투입한 것이다.

프레시안 : 6168명은 157명의 39배가 넘는 인원이다. 사생결단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적군과 싸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한 건가.

서중석 : 왜 이토록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느냐. 지난번에 5월 18일 상황을 이야기할 때, 그날 오후 4시경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 전에는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상대가 100여 명뿐이었던 5월 27일 이때도 군이 아니라 경찰만 투입하거나 또는 몇 시간만 더 기다리고 대화를 했더라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시민군은 전투라는 걸 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중 다수는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항쟁에 참여해 시민군이 된 사람들 아닌가. (1980년 5월 25일 "시민군 일동" 명의로 발표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는 시민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글 중 하나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차에 깔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의 젖가슴을 찌르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편집자') 그런 157명에 대해서 이런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마치 대단한 작전을 펴는 것처럼 한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 전두환·신군부, 이걸 계엄사 측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지만, 이쪽은 5월 18일, 19일에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이른바 위력 과시, 선제 타격이라는 걸 하지 않았나. 상대방을 궤멸시키다시피 제압해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5월 19일 오후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면서 광주항쟁이 본격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오히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쪽이나 계엄군으로서는 굉장한 치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상태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27일에 그런 식으로 보복해 만회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5월 17일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어떤 지역에서건 전두환·신군부에 대항해 시위가 벌어지면 철저한 선제 타격, 위력 과시를 통해 짓밟아버리겠다는 방안을 미리 마련해놓지 않았나. 그걸 마지막에, 그러니까 5월 27일에 광주에서 157명을 상대로 펼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수 있다.

항쟁 진압 후 요란하게 군가 틀고 탱크 앞세워 무력시위


프레시안 : 시민군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나.

서중석 : 27일 새벽 1시경 3공수여단 특공조가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새벽 4시가 조금 지난 때에 도청 후문 쪽 담을 넘었다. 그러면서 시민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새벽 5시 21분 공수 부대는 도청 본관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3공수여단 특공조는 도청 건물에 진입한 후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여기저기 던져 넣었다. 그리고 확인 사살도 했다. 건물 안에 있던 시민군들은 특공조가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기도 했다. 그와 달리 특공조는 손들고 항복하러 나오는 시민군들에게까지 총격을 퍼부었다. 작전 결과 3공수여단 특공조에서는 2명의 부상자가 생겼지만, 시민군 쪽에서는 끝까지 저항하던 윤상원 등 13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7공수여단은 새벽 5시가 조금 지난 때에 광주공원을 점거했다. 11공수여단은 오전 6시 20분경 YWCA 건물을 장악했다. 20사단 61연대는 새벽 2시부터 새벽 5시 10분까지 도청을 탈환하는 공수 부대 특공조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계엄군이 도청으로 향하던 27일 새벽 시민군 쪽에서 마지막으로 내보낸 거리 방송이다. 이 방송은 도청 등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과 마음만은 함께했던 많은 시민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자리하게 된다. '편집자')

이날 아침 7시 30분 도청 앞마당에서 군가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집총한 군인들을 가득 태우고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 20여 대가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 시내를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 1980년 5월 27일 줄에 묶여 도청에서 끌려 나오는 광주 시민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쿠데타로 권력을 훔친 것에 더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짓밟은 다음 '이겼다'며 군가를 요란하게 틀고 무력시위까지 하는 모습은 이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러한 후안무치한 본색은 광주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항쟁을 무력 진압한 것을 이른바 공적으로 내세우며 자기들끼리 무더기로 훈장을 주고받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 후 군 인사법 규정을 어기고 멋대로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상훈법도 무시하고 훈·포장을 남발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12·12쿠데타 및 '광주사태'와 관련된 인물들 중 훈장을 받은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를 포함해 115명에 이른다. '광주사태 진압에 공헌했다'는 공적으로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특전사령관 정호용, 20사단장 박준병, 3공수여단장 최세창 등 69명이다. 광주항쟁 무력 진압 관련자들은 훗날 특별법에 의해 훈·포장이 박탈되지만, 12·12쿠데타 관련자들의 경우 실형이 선고된 사람들만 훈·포장이 박탈된다.

이러한 서훈 문제와 더불어 전두환·신군부, 이 세력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진정성 있게 반성하거나 참회한 적이 없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컨대 1980년대 후반 광주 청문회에서도 이들은 자위권 운운하며 '정당한 임무 수행이었다'고 강변하거나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였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에는 전두환이 "내가 반란의 수괴라면 5공은 반란의 수괴가 통치한 정권이냐", "이번 기회에 광주사태의 진상도 철저히 가려야 한다"고 반발하며 안양교도소에서 단식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시 돌아오면, 1980년 5월 전두환·신군부가 광주에서 일으킨 유혈 사태로 희생자가 어느 정도 발생했나.

서중석 : 광주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1980년 5월 31일 계엄사에서 광주사태의 전모라는 걸 발표하는데 거기에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70명이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다쳤고 총 1740명을 연행했다고 돼 있다.

1995년에 가면 공식 사망자 숫자가 약간 늘어난다. 1995년 7월 검찰의 5·18 수사 결과 발표문을 보면 "현재까지 정부의 관련 자료에 의하여 확인된 광주 시위 관련 사망자는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고 광주 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은 47명임", 이렇게 돼 있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상당수는 오인 사격으로 희생됐다. 1980년 5월 24일 11공수여단과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오인 총격전을 벌여 9명이 사망했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경찰 4명은 차량 시위가 있던 1980년 5월 20일 사망했다. 경찰 최루탄이 버스 안에서 터지자 기사가 놀라서 운전대를 놓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재판 상황을 보자. 1980년 10월 25일, 광주항쟁으로 구속 기소된 175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상무대 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열렸다. 보통군법회의는 정동년, 김종배, 박남선, 배용주, 박노정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후 고등군법회의는 이 가운데 김종배와 박남선에게는 무기 징역을 선고하고 나머지 3명에 대해서는 사형 선고를 유지했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에게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러니까 대법원은 고등군법회의에서 정한 그대로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 판결을 더 살펴보면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등 7명에게는 무기 징역이 선고됐다. 그리고 김성용 신부, 명노근 전남대 교수, 전옥주, 김상윤 등 11명에게는 징역 10년에서 20년이 선고됐다.

1980년 10월 30일 계엄사는 88명을 형 집행 정지로 석방했다. 전두환·신군부는 1980년 10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광주항쟁 관련자를 전원 석방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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