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가 광주 집단 발포 신호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직자도 분노케 한 공수 부대의 만행

프레시안 : 광주항쟁 이틀째인 1980년 5월 19일 오후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 싸우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사흘째인 20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5월 19일 오후가 광주사태가 본격적인 광주항쟁으로 전환된 역사적인 오후라면, 5월 20일 오후는 시민들에게 계엄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용기를 분명하게 불어넣어줬다. 그러한 것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택시 기사들의 투쟁이었다.

20일 오전 금남로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분노케 한 잔혹한 광경이 또 나타났다. 30명이 넘는 남녀가 4열로 줄지어 서서 남자는 팬티, 여자는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채 거의 알몸 상태로 기합을 받고 있었다. 대개 20대였고 그 밖에 30대가 몇 명 있었는데, 여성도 10여 명 포함돼 있었다. 공수 부대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이 사람들을 삥 둘러싼 다음 "엎드려뻗쳐", "쪼그려 앉아" 등을 외치면서 갖가지 동작을 강요했다. 구령에 조금이라도 따라 하지 않거나 느리게 하면 여지없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 모습을 본 조철현(조비오) 신부는 "내가 비록 성직자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오후 3시 계엄사령부는 그때까지 사용된 진압봉보다 더 길고 두툼한 진압봉 2300여 개를 광주로 공수해서 7공수, 3공수, 11공수 부대에 나눠줬다. 이때는 11공수여단뿐만 아니라 3공수여단까지 광주에 추가 투입된 상태였는데 하여튼 더 위력적으로, 더 세게, 더 철저히 타격하라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오후가 되면서 도청 광장 부근에 3만여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민중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후 4시경부터 택시, 버스, 트럭 등 차량 200여 대가 무등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5시 30분경 기사들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도청 광장 쪽으로 나아갔다.

항쟁 수위를 끌어올린 기사들의 차량 시위

▲ 차량 시위(1980년 5월 20일)는 광주항쟁 수위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프레시안 : 기사들이 그렇게 함께 모여 행동한 계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전날 버스, 택시 운전사들은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공수 부대의 만행으로 크게 다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공수 부대원들이 그런 차들을 세우고 운전사까지 마구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택시 기사들이 '이걸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 모이자', 이렇게 의견을 모으고 거리에 나온 건데 거기에 버스, 트럭도 함께한 것이다.

오후 7시 무렵 헤드라이트를 켠 200여 대의 차량 행렬이 금남로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대형 버스 4대를 비롯한 8대를 앞세우고 계속 전진했고, 화물차와 택시들이 그 뒤를 이었으며,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구호를 함께 외쳤다. 사진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참 장관이었다. 무서운 위력이었고, 이제 새로운 무기가 생겨난 것이다.

공수 부대와 경찰은 차량 저지 특공대를 급조해서 선두 차량의 유리창을 부순 다음 최루탄을 던져 넣었다. 그러면서 시위대와 육박전이 벌어졌다. 많은 부상자가 여기서 발생했다. 차량 시위대는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 부대의 저지로 도청 광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경찰이 지키고 있던 노동청 쪽으로 길을 택했다. 밤 9시가 지났을 때 시위 차량들이 총공세를 펼쳤다. 그때 경찰 저지선으로 버스 한 대가 돌진했다. 경찰의 최루탄이 버스 안에서 터지자 놀란 기사가 운전대를 놓치면서 벌어진 사태였는데,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숨지고 5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밤 9시 50분쯤 광주 MBC 방송국에서 갑자기 불기둥이 치솟아 방송국을 태워버렸다. 말도 안 되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 시민들의 분노를 산 끝에 그렇게 된 것이다.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날 불을 지른 건 시위 군중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몇몇 광주항쟁 참가자는 1989년 2월 국회 청문회에서 '시민들은 광주 MBC에 몰려가 광주의 실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MBC 측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1층 셔터를 내렸다. 그 때문에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방송국 안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났고, 시민들이 셔터를 부수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불에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편집자') 광주 KBS 방송국 건물도 "전두환 꼭두각시 방송국"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다음 날 새벽 불길에 휩싸였다.

20일 밤 계엄사는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3공수여단에 이어 서울에 주둔하던 보병 제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대는 21일 아침 광주에 도착한다. 이 20사단 투입을 미군이 인정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20일 오후 택시, 버스를 앞세운 시위대와 공수 부대의 싸움은 그야말로 시가전이 벌어진 것과 같은 강렬함을 수반했고 그런 속에서 방송국도 불타고 그랬다. 이제 시위대가 월등 기세가 오르게 된다. 그뿐 아니라 광주 전역에서 이렇게 시위가 벌어지니까 공수 부대원들을 곳곳에 다 보내는 것이 간단하지 않게 돼버렸다. 한두 곳에서 투쟁하는 게 아니지 않았나. 또한 골목 같은 데를 잘못 다니다가는 분노한 시민들한테 당하게 됐다, 이 말이다. 그러면서 이제 공수 부대는 시민들을 제압하기는커녕 시민들과 싸우는 데 아주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속에서 20일 이날 전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다. 이른바 '소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신현확 내각이 총사퇴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또한 전두환이 몹시도 기다리고 기다렸던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도 이날 나왔다. 대법원 전원 합의체의 판사 14명 중 6명이 소수 의견을 내고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들은 이 판결 후 강요된 사표를 내거나 재임용에서 탈락하며 옷을 벗게 됐고 몇몇 판사는 전두환 신군부한테 심하게 당하기도 했다.

애국가 나올 때 일제히 울린 수백 발의 총성, 그 직후부터 시민 정조준해 발포

ⓒ오월의봄
프레시안 :
5월 21일은 광주항쟁에서 분수령으로 꼽히는 날 중 하나다. 21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21일 오전 6시 30분쯤, 밤새워 시위를 벌인 시민들은 커다란 태극기에 덮인 시체 두 구를 손수레에 싣고 가톨릭회관 앞에서 공수 부대와 맞섰다. 사망자가 없다고 당국에서 거짓 발표한 것에 항의하는 뜻이었다고 그런다.

오전 9시쯤 시위대는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날 밤에 이미 애잔한 목소리로 광주 시민 가슴을 파고들었던 전옥주가 청바지에 빨간 점퍼 차림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때 누군가가 '계엄군과 협상하자'고 외쳤다. 더 이상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시민들은 즉석에서 전옥주 등 4명을 협상 대표로 뽑았다.

4명의 협상 대표는 유혈 사태에 대한 도지사의 사과, 공수 부대 철수 등 4개 항을 가지고 도청에 가서 장형태 전남 도지사를 만났다. 장형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받아들이고 다른 건 건의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합의를 봤는데, 그러면 도지사가 시민들 앞에 나와서 그걸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시민들은 다시 계속해서 공수 부대를 밀어붙였다. 그런 속에서 21일 오후 1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졌다.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광주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인 엄청난 사건이었다. 오후 1시 정각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데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애국가에 맞춰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인지를 두고 오랫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명확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시간에 그렇게 많은 총성이 울렸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일과 20일에도 공수 부대가 발포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수백 발을 일제히 쏜 건 21일 오후 1시 이때가 처음이었다. 집단 발포에 동요하는 듯했던 시민들은 한 10분쯤 지나자 금남로에 다시 모여들었다. 시민들과 공수 부대가 대치하는 속에서 일부 젊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대여섯 명의 젊은이가 큰길로 뛰어나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때 다시 총성이 울리고, 구호를 외치던 젊은이 몇 명이 쓰러졌다.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공수 부대원들이 집중 발포한 건데, 오후 1시에 수백 발을 공중에 쏜 것과 달리 이때는 시위대를 정조준해 발사한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대여섯 사람이 이번에도 태극기를 들고 나가 흔들면서 구호를 외쳤다. 공수 부대는 또 사격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또 쓰러졌다. 또 다른 사람들이 다시 태극기를 들고 나가 구호를 외쳤다. 이들도 공수 부대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런 일이 대여섯 번이나 거듭됐다.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친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들에게도 공수 부대가 발포하는 일이 이어졌다. 이렇게 오후 1시경부터 발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도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갔다. 일부 시위대는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화순 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 카빈 소총 같은 걸 입수했고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도 M1 소총이라든가 카빈 소총, 수류탄, 실탄 같은 걸 가져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나주에 가서 경찰서, 파출소 등에 있던 총과 탄약 같은 걸 가지고 돌아왔다. 그 밖에도 장성, 담양, 영광, 보성, 무안, 영암, 함평, 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 등 전남 전 지역으로 가서 무기, 탄약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전남 전체가 들끓게 된다. 광주 시위대가 목포에 도착하자 목포역 광장에 시민 2만여 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시위대가 광주로 돌아간 후 목포 시민들은 "계엄 철폐" 등을 외치면서 행진했고, 밤 9시경에는 경찰서에 가서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경찰 트럭 1대와 호송차 1대를 불태웠다. 이곳 경찰서는 경찰들이 거의 다 광주로 징발돼 텅 비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날 또 하나의 상황이 있었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오후 4시경 육군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은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으로부터 전차를 동원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구호 준장은 '동원을 요청하려면 정식 지휘 계통을 통해 명령하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황영시가 "이 자식,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소리쳤다. (광주항쟁 당시 '전교사' 부사령관이었던 김기석도 이구호와 같은 취지의 진술을 했다. 김기석은 1980년 5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황영시가 네 차례에 걸쳐 전화로 "전차와 무장 헬기를 동원해 진압하라"고 질책했다고 1996년 7월 15일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기석은 황영시와 통화한 내용을 적어둔 1980년 당시 메모지도 제시했다. 황영시는 이를 부인했다. 한편 김기석은 같은 날 법정에서 "광주 진압에 미온적인 대처를 했다는 이유로, 사태가 수습된 뒤 전교사 부사령관에서 하루아침에 참모장으로 강등됐다"고 주장했다. '편집자')

이처럼 21일에는 시민을 향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주 시민들은 전남 전 지역으로 나아가 무기를 확보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전체가 들끓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를 확보하면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 계엄군이 시민들을 정조준해 발포하면서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다. 훗날 '오월의 신부'로 불리게 되는 스물세 살 최미애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최 씨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전남대 부근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당시 최 씨는 임신 8개월이었다. 사진은 5·18민주묘지에 있는 최 씨 영정(오월 광주 35년 후인 2015년 5월 모습). ⓒ연합뉴스


한편으로는 계엄군 철수 후 광주 봉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위권 담화문 발표

프레시안 : 나라를 지키라고 시민이 낸 세금으로 무장을 갖춘 군대가 정당한 요구를 하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애국가가 집단 발포의 신호탄 아니었느냐는 논란을 군이 자초한 것도 서글픈 일이다.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선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뼈아픈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군 내부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사실 그대로 명확히 교육해야 할 터인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21일 오후 계엄군이 본격적으로 시민을 겨냥해 발포한 후에도 항쟁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으면서 상황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지 않나.

서중석 : 21일 오후 5시 25분 도청 직원들이 뒷담을 넘어 철수했다. 5분 후인 5시 30분에는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병력이 도청에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조선대 캠퍼스로 철수했다. 3공수여단 병력은 오후 4시 30분쯤 전남대에서 출발해 광주교도소로 이동, 교도소 경비 임무를 맡게 된다. 시내에서 철수한 공수 부대를 비롯한 47개 대대, 2만 317명의 계엄군은 송정리 방면의 화정동 등 7개 외곽 지점을 거점 삼아 광주를 봉쇄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광주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계엄군이 물러나면서 도청 건물은 텅 빈 상태가 됐다. 시위대는 공수 부대가 철수했다는 사실을 오후 8시쯤에야 알고 도청에 들어갔다. 이로써 광주는 정부의 통치를 벗어난, 치안 및 행정 공백의 '해방구'라고도 불리는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

이날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더 크게 했다.

프레시안 : 담화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이희성은 담화문에서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했다. 이 중에서 "평화적 시위"라고 돼 있는 그 부분은 사실이다. 그리고 '고첩'은 고정 간첩이라는 뜻이다.

담화문을 계속 보면, 아래쪽에 '경고'라고 해놓고는 첫 번째로 이렇게 밝혔다.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 지역 난동은", 앞에서는 평화적 시위라고 해놓고 여기서는 난동이라고 했는데, "치안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날 담화문의 주요 내용은 이제는 이른바 자위권을 발동하겠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자위권이라는 게 언제 발동됐느냐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하여튼 이날 오후 1시에 애국가가 나올 때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로부터 10여 분쯤 후부터 시민을 정조준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사람들이 막 죽어가지 않았나. 그것과 관련된 담화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광주에서 이런 엄청난 사태가 확산된 것이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 간첩들 때문이다'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광주항쟁을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그중에서도 특히 유신 시기에 많이 사용했던 방식으로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가, 광주항쟁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싸워왔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일방적으로 몰아간 것 아닌가. 박정희 정권 때에도 많이 주장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렇게 몰고 갔으니 광주 시민들로서는 더 큰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재산 약탈 행위도 있다? 광주에서 그렇게 큰 항쟁이 일어났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공공시설 파괴, 방화라는 것도 MBC, KBS 등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왜곡 방송을 한 것에 대한, 계엄사와 정부 쪽의 일방적인 선전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전한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공공건물 중에서도 예컨대 경찰서처럼 전두환·신군부 권력을 뒷받침하는 데 역할을 하고 있는 그런 건물에 대해 파괴, 방화가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은 일반 공공시설은 잘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엄사에서 몰아붙이고 있었으니 광주 사람들로서는 분노와 함께 답답함, 우려 같은 걸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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