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군데 찌르고 고문해도 진실 덮을 수는 없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8>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만든 광주의 진실

프레시안 : 광주를 피로 물들인 자들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철저히 은폐하려 했다. 5·16쿠데타 세력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 노력을 힘으로 짓밟으며 '제2의 학살'을 자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후예인 전두환·신군부의 그러한 행위는 광주 시민을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그러한 왜곡과 은폐에 맞서 진상을 규명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 아니었나.

서중석 : 제일 중요한 것은 광주의 진실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광주항쟁이 끝난 후에도 광주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과 관련해 외신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2016년 2월 한겨레는 '5·18 광주 세계에 알린 기자 정신 망월동에 잠든다'는 제목 아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가 1월 25일 별세한 소식을 전했다. 이 사람은 일본 특파원이었는데, 1980년 5월 18일과 19일 광주 현지에서 계엄군에 의한 참상을 카메라로 기록한 뒤 이튿날 도쿄로 돌아가 이 영상을 독일 본사로 보냈다. 광주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5월 23일 다시 광주를 찾은 힌츠페터는 계엄군이 물러난 후 시민들이 자치 공동체를 이룬 '해방 광주'의 모습도 찍어 전 세계에 알렸다.

이런 활동으로 힌츠페터는 2003년에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는데, 광주항쟁 당시 취재와 관련해 이렇게 얘기했다. "모두 10개의 광주 필름을 쿠키 깡통처럼 포장해 함부르크 뉴스 센터로 보냈다. 현상된 필름의 마지막 1센티미터까지도 버리지 않으려 애썼다." 2004년 심장 마비로 쓰러졌을 때 이 사람은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항쟁 당시 외신의 경우 1980년 5월 21일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했다. 국내 신문 기자들은 취재하는 데 제약이 많았고 일부 신문, 방송사 기자에 대해서는 광주 시민들이 심한 반감을 보이며 출입을 봉쇄했다. 그렇지만 광주에 온 외신 기자들의 경우 출입이 자유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내를 받아가며 시위 현장을 방문하고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고 별도의 브리핑을 받기도 했다.

광주의 비극에 관한 진실은 외국 언론을 통해 국내로 거꾸로 유입되기도 했다. 1980년대 내내 그런 일이 있었다. 그만큼 외신 기자들은 바깥세상으로 진실을 알릴 수 있는 통로로 간주됐다.

프레시안 : 광주의 진실은 한국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서중석 : 광주 유혈 사태, 광주항쟁은 특히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광주의 진실, 이것을 접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0년대 내내 되물었다. 잔인한 유혈 사태, 시민을 향한 발포, 그러한 공수 부대에 과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 이 모습들은 1980년대 내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1980년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서강대생 김의기가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김의기가 뛰어내리면서 뿌린 이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 일부를 보자.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광주항쟁 무력 진압 사흘 후인 이날 김의기 학생은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러한 광주의 진실을 세상이 알게 하는 것은 광주항쟁에 이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는데,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천주교 광주 대교구가 큰 역할을 했다.

▲ 천주교 광주 대교구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82년 5월 18일, 광주항쟁 2주기를 맞아 유족들이 천주교 광주 대교구 남동성당에서 추도 미사를 올리는 모습. ⓒ연합뉴스


어두운 시절, 고난을 감내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린 천주교인들

프레시안 : 천주교 쪽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천주교회는 미사 강론이나,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진상 발표 등을 통해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진실 알리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였던 1980년 5월 27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해 6~7월에 걸쳐 천주교인은 다른 어느 종교나 단체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활동은 서울 대교구 같은 데서 개별적으로 한 걸 제외하면 광주 대교구하고 전주 교구에서 주로 했고, 대부분의 교구는 교구 단위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천주교회가 진실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기본 요인은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계엄사,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발표나 보도지침에 따라 왜곡 보도를 일삼지 않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사태, 광주항쟁처럼 일반 한국 사람들이 자기가 들은 경로에 따라 사실을 너무나도 다르게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광주의 진실에 대해 서로 각각 다르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언론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거의 다 그랬다. 그래서 사망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계엄군이 어떤 식의 만행을 저질렀는가, 이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계엄사와 전두환·신군부는 광주항쟁에 대해 모략과 중상, 기만으로 가득 찬 발표를 했고 일부 언론이 이걸 여과 없이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해설 등의 이름으로 악의적인 짜깁기를 교묘하게 해서 국민을 오도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공신력 있는 기관만이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회는 광주의 진실을 전달하는 데 어느 곳보다도 공신력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전주 교구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덕분에 진실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천주교의 진실 알리기 활동은, 그때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해 유포된 글 가운데 좀 잘못 알려져 있는 것도 있었는데 그걸 바로잡는 역할도 했다. 예컨대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찢어진 기폭'이라는 글이 있다. 1980년대에 제일 많이 읽힌 것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많이 알려진 글이다.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에서 번역해서 돌렸고 북아메리카 한국인권연맹에서도, 독일 코리아차이퉁에서도 이걸 돌렸다. 그런데 이 글에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일부 들어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광주에서 탈출한 김성용 신부도 광주항쟁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탈출하면서 김 신부는 광주 상황을 알리고 살인자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서울 대교구에서 김 신부는 오태순 신부 등의 권유로, 이것도 참 많이 읽힌 글인데, '분노보다는 슬픔이'로 알려진 글을 집필했다. 이 글은 녹음테이프로도 만들어져 돌았다. 이것 때문에 또 많은 신도들이 걸려들고 그랬다.

그리고 광주 대교구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을 작성해서 전국에 배포했다. '찢어진 기폭' 등 광주에 관한 글들이 과격하거나 일부 과장돼 있어서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 것이다. 이 글이 나오자 정의구현사제단과 전주, 부산, 마산, 안동, 수원, 순천, 원주, 인천, 청주, 서울의 천주교회 그리고 수도회 사제단은 "우리는 천주교 광주 대교구 사제단이 발표한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 진실임을 믿는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렇지만 대구 대교구 사제들, 서정길이 대주교로 있는 그곳 사제들은 동참하지 않았다. 하여튼 성명서를 낸 곳의 사제들은 그것을 신자들에게 읽혔고, 신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걸 읽게 했다.

(2016년 10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천주교 대구 대교구가 운영하는 사회 복지 시설 희망원 문제를 다뤘다. 이 방송을 통해 희망원에서 2년여 동안 129명이 사망한 사실 등이 널리 알려지며 공분을 샀다. 임성무 전 천주교 대구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은 이 문제를 대구 대교구의 역사적 행보와 연결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 대교구가 갖고 있는 역사에서 부끄러운 점 중 제일 큰 건 친일에 앞장섰다는 거고요. 그 다음에 (1979년) 12·12사태 이후에, (1980년 5월) 광주 이후에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걸 만들었잖아요. (…) 거기에 (대구) 교구 사제들 두 분이 참여했습니다. 다른 어떤 (천주교) 교구도 참여하지 않았고 오직 대구 교구만 참여를 했어요. 시립 희망원도 바로 그때 운영권을 받았습니다. (…) 독재 권력을 비호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걸로 살았다는 게 저희 대구 교구가 갖는 부끄러움 중 하나입니다." '편집자')

진실 알리기에 앞장선 사제와 수녀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따르기도 했다. 예컨대 정마리안느 수녀는 보안사 지하실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 뇌가 손상되고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됐으며 언어도 잘 안됐다. 전주 교구 박창신 신부, 여산성당 주임 신부였던 이 사람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야말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그 옆에 주둔하고 있었던 공수 부대 7여단 쪽 사람들로 보이는데, 1980년 6월 25일 밤 군인 같은 괴한들에게 쇠파이프로 맞고 실신했다. 그 후에도 계속 두들겨 맞고 다섯 군데나 칼에 찔려서 한 달 동안 운신을 못하는 상태에 처했다.

격렬한 갈등 상황에서도 약탈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항쟁 기간에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난 후 광주 시민들은 슬픔과 분노 속에서도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범죄가 한 건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폭도들의 세상이라는 당국의 선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범죄가 그렇게 많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수많은 총기가 시중에 풀려 있던 상황임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큰 규모의 대중 운동 과정 또는 격렬한 갈등 상황에서도 약탈 현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광주항쟁뿐만 아니라 1960년 4월혁명, 1979년 부마항쟁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그러한 상황에서 약탈을 수반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서중석 : 어째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에서 약탈이 없었느냐.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에는 부랑아로 불린 사람들이나 불우 청소년, 실업자들이 대거 가담했으나 약탈은 없었다. 부마항쟁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나 상점의 전등을 깨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도 소등하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에 불이 켜져 있으면 깬 것이지, 약탈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4월혁명 때 분노한 민중이 이기붕 등의 집을 때려 부수고 그 집에 있는 물건도 꺼내고 그랬고, 부마항쟁 때도 권력자의 집을 부수고 그러지 않았나. 그렇지만 약탈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에 좋은 물건들이 있는데도 왜 약탈 행위가 안 일어났느냐. 나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데, 4월혁명이나 부마항쟁, 광주항쟁 기록들을 보면 그 시위대들이 약탈에 관한 생각을 꿈에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주장한 걸 봐라. 4월혁명 때에는 부정 선거 규탄 및 이승만 정권 고발, 부마항쟁 때에는 유신 체제 타도, 광주항쟁에서는 전두환 일당 처단 같은 것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싸웠던 건데, 그런 시위를 벌이면서 약탈을 한다? 그런 생각조차 안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세계에서 일본과 함께 가장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난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강력 범죄가 전혀 없는 건 물론 아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밤에도 비교적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지 않나. 혼자 산에 갔던 여성이 범죄 피해자가 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혼자 등산을 가더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다. 500년이 넘는 조선 역사를 보더라도 강도가 참 많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은 오랫동안 그러한 문화 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전통이 이 문제에서도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항쟁, 1980년대 내내 살아 숨 쉬며 6월항쟁으로 승화되다

프레시안 : 광주항쟁을 한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나. 아울러 항쟁 당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광주 시민이 계층을 넘어 하나가 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희생자 중 하층민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 광주민중항쟁, 5·18항쟁, 광주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 등 명칭이 다양한데 어떤 용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 이런 것들을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1894년), 3·1운동(1919년), 4월혁명, 부마항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킨 집단이나 독재자의 영구 집권욕에 의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항쟁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광주항쟁을 꼽을 수 있다.

광주항쟁은 1980년 5월 19일 이미 학생 운동을 넘어서서 시민 중심의 투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5월 20일에는 택시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기사들의 투쟁도 나타나는데, 22일 이후 시민군으로서 총을 잡은 사람들도 대부분 날품팔이나 구두닦이를 비롯한 하층 노동자로 민중들이었다. 20일에 차량 시위를 한 택시 기사들, 버스 기사들도 민중들이었다. 이들은 공수 부대와 목숨 걸고 싸웠고 희생도 가장 컸다. 광주항쟁에서 이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고 잊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광주항쟁에서는 이들뿐만 아니라 대학생이나 교수, 가톨릭 신부 같은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밥을 지어 함께 나눈 부인들을 비롯해 일반 시민들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3·1운동과 흡사하게 소수를 제외하고는 각계각층이 참여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일시적으로는 최정운 교수가 얘기하는 광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명칭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런 의미에서도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고 본다. 그렇지만 3·1운동, 부마항쟁, 6월항쟁 이렇게 부르는 것과 연관시켜서 볼 때도 그렇고 또 광주항쟁에 소수를 제외한 각계각층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그냥 광주항쟁이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지금은 광주항쟁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같은 건 노태우 정권 때 부른 이름으로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 광주항쟁의 대의는 1980년대 내내 살아 움직이며 민주주의를 추동했다. 사진은 2007년 5월 15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은 어린이가 민주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하는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80년 5월 이후 한국 사회는 오월 광주를 빼놓고는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광주항쟁은 그 후 한국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서중석 : 광주항쟁에 대해 '1980년 5월 27일 대대적인 병력 투입으로 희생을 치르면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일단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서 누가 승리했느냐, 이건 참 알기가 어렵다. 일부 광주 시민들이 좌절했을 수도 있고 불안해했을 수도 있지만, 광주항쟁의 대의는 1980년대 내내 살아 움직였다. 그것에 대해 전두환 등 신군부 집권 세력은 집권 기간 내내 불안하지 않았겠나. 그러면서 결국 김영삼 집권기에 주모자들이 대거 체포돼 재판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광주에서 드러난 민중의 위대함, 그러니까 어떻게 공수 부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가, 더군다나 그런 공수 부대를 물리칠 수까지 있었느냐, 이런 점은 앞으로 더 많이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1871년 파리 코뮌과 비교, 검토해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주항쟁은 누구나 얘기하는 것이지만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부미방'(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주동자인 문부식이 최후 진술에서 "광주사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은 광주를 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돼 있다. 그것은 6월항쟁으로 일단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항쟁이 살아 숨 쉬면서 6월항쟁으로 승화돼 한국 민주주의를 끌어올리고 민주화와 자유, 인권을 쟁취하게 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6월항쟁으로 전두환·신군부가 무릎을 꿇고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이라는 게 나오게 되는데, 6·29선언이 나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군이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 또는 군이 출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건 광주항쟁 경험과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뭐냐 하면 광주항쟁 당시 그 무서운, 막강한, 그리고 숫자도 아주 많았던 군이 결국 광주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 정도로 강한 반발, 투쟁, 저항을 본 것이다.

이러한 광주의 경험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이너 서클한테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준 게 아니라 광주에 내려온 모든 군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난 본다. 그러면서 전체 군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전시를 제외하고 계엄 등으로 출동했을 때 군이 그런 식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일은 그전에는 없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6월항쟁 상황을 보니까 광주항쟁 비슷하게 큰 규모로, 그것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 군이 나갈 수는 없다. 제2의 광주항쟁이, 그것도 전국적으로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런 판단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 등으로서는 6월항쟁 기간 내내 항상 광주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6·29선언이 나왔다고 난 본다.

즉 광주항쟁이 승화돼 6월항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항쟁이 직접적으로는 6·29선언을 갖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도 광주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관련 기사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