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배신·염탐' 강요케 한 비정한 청와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6>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스물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전두환·신군부 강제 징집, 박정희 정권 때보다 더 독했다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는 학생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학생들을 군대에 강제로 끌고 가서 몹쓸 짓을 한 것도 그중 하나다. 강제 징집은 박정희 정권 때에도 있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상황이 어떠했나.

서중석 : 학생 운동은 '부미방' 사건이 일어났던 1982년 1학기에도 계속됐고, 그해 2학기에도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면서 전두환·신군부가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이라는 또 하나의 인권 유린 사태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제 징집은 1960~1970년대에도 있었다. 특히 1971년에는 보안사에서 ASP(Anti-Student Power) 딱지, 이걸 아스피린 딱지라고도 불렀는데, 그걸 붙여가지고 학생 운동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학생 100여 명을 끌어다가 일선 소총 부대에 배치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 때에도 강제 징집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전두환·신군부가 추진한 강제 징집에는 그것하고 차이가 나는 면이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는 1980년 9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계속 강제 징집을 실시했다. 일회적인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그런 점에서 그전과 차이가 있다. 그뿐 아니라 녹화 사업이라는 아주 지독한 짓까지 하지 않았나.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전두환·신군부는 강제 징집을 시작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1981년 12월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 조치 방침이라는 걸 만들었다. 그러면서 시위 현장에서 검거하면 바로 경찰서에서 학생을 군부대로 직접 인계하는 강제 징집을 제도화했다.

(강제 징집 경로는 수사 기관이 군부대로 바로 넘기는 것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었다. 검찰에서 석방되거나 재판을 받은 직후 강제 징집되기도 했고, 무림 사건 같은 공안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강제 징집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지도 휴학제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지도 휴학제는 당사자의 뜻과 상관없이 대학 총장이 휴학을 명령할 수 있게 한 제도로 1979년 10·26 직전 유신 정권의 방침에 따라 도입됐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움켜쥔 후 눈엣가시로 찍힌 일부 학생들을 지도 휴학 대상으로 지목한 다음 강제 징집하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마구잡이 강제 징집을 실시했기 때문에 현역 입영 대상이 아닌데도 하루아침에 군대에 끌려가는 일도 생겼다. 예컨대 한쪽 눈의 시력이 없어도, 소아마비 장애가 있어도 끌려갔다. 녹화 사업 과정에서 희생된 이윤성, 정성희도 현역 입영 대상자가 아니었다. 또한 입사 원서를 접수하러 가다가 시위 참가자로 오인돼 끌려가는 등 학생 운동과 무관하게 강제 징집된 사례도 있었다. '편집자')

강제 징집과 짝을 이루는 것이 1982년 8월에 나온 대학생 사상 대책이라는 문건이다. 여기서는 "기존 의식분자에 대한 사상 전향 대책을 마련, 시행해야 한다"면서 사상경찰 및 특별 공안반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일제의 특별고등경찰까지 생각나게 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제적과 입대, 소위 의식분자의 사후 관리,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전향 기법까지 얘기했다. 의식분자의 사후 관리와 공산주의자의 전향 기법 실시, 이런 것들은 바로 녹화 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배신과 염탐을 강요한 녹화 사업으로 몸도, 마음도 죽어간 젊은이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녹화 사업은 얼핏 들으면 산림녹화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니었나.

서중석 : 보안사는 강제 징집자 및 정상 입대자 중 학생 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소위 순화 업무라는 걸 진행했다. 순화 업무라는 건 '좌경 오염 방지'라는 명목 아래 학생 운동 활동 사항과 조직 체계 등을 조사하고 대상자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도록 하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순화된 것으로 판단되는 병사들에게 출신 대학교의 학원 첩보를 수집해오도록 요구했다.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이다. 이걸 녹화 사업이라고 부른다.

전두환·신군부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하거나 녹화 사업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됐느냐. 강제 징집된 학생은 1152명, 녹화 사업을 당한 사람은 1192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녹화 사업 등의 진상을 밝히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988년 정부는 강제 징집 447명, 녹화 사업 265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축소된 숫자였고,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게 2000년대에 들어와서 드러난다. '편집자') 녹화 사업 대상자 1192명 중 921명은 강제 징집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271명은 정상 입대자 및 민간인이었다. 강제 징집을 가장 많이 당한 학교는 서울대(254명)였고 고려대, 성균관대가 그 뒤를 이었다. 녹화 사업 대상자도 서울대가 제일 많았다. 강제 징집 상황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1983년에 461명으로 가장 많았고 1981년과 1982년에도 각각 230명, 371명에 달했다.

강제 징집된 학생들은 안보 현실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적성, 특기와 상관없이 최전방에 배치됐다. 강제 징집도 당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특히 녹화 사업 대상자들은 아주 모진 일을 겪어야 했다. 보안사는 이 사람들한테 자신이 과거에 한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선후배들의 활동 사항까지 다 불라고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구타를 비롯한 가혹 행위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사람들, 다시 말해 친구, 동료, 선후배를 배신하고 염탐해 보고하라고 강요당한 이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겠나. 정말 심한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이것에 대해 국방부 과거사위는 "당사자에게 동료들을 배신해야 한다는 정신적 폐해를 초래했고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든 중대한 위법 행위"라고 밝혔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녹화 사업과 관련해 의문사가 많이 생겼다. 이윤성,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 김두황, 녹화 사업 대상자였던 이 6명의 병사가 1980년대 초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군 당국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유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그래서 나중에 이 부분은 여러 차례 문제가 되고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게 된다. (안타까운 죽음에 더해 녹화 사업 희생자가 사후 누명까지 써야 하는 일도 있었다. 예컨대 이윤성의 경우 군 당국은 '월북을 기도했고 불온 전단을 소지해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고 밝혔다.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당국의 서슬이 무서워 유가족은 곡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이윤성이 불온 전단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혐의는 조작된 것이며 조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하는 모습을 봤다는 진술이 나왔다. '편집자')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의 폐해는 피해 당사자들이 군복을 벗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를 보면 '강제 징집, 녹화 사업 과정에서 받은 가장 큰 피해는 무엇이냐'는 물음을 담은 질문지를 돌려 답변을 받은 내용이 나온다. 75명이 답했는데 인간적 모멸감, 정신적 황폐, 수치심과 자괴감, 굴욕감과 강박 관념 등의 정신적 고통이라고 답한 의견이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답변자 대부분은 이러한 정신적 고통으로 피해망상 및 대인 기피증, 인간관계 기피 현상 등으로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다고 증언했다.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

프레시안 :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두환의 역할이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전두환이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을 지시, 승인했음을 관련 문서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1년 4월 2일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 부대에 입영 조치하라"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또한 보안사 관계자들은 녹화 사업 진행 과정에서 청와대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1983년 12월 전두환이 서명한 '1984년도 학원 종합 대책' 문서에도 녹화 사업 추진 실적이 포함돼 있었다.

녹화 사업 탄생 과정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보안사 대공처장이었던 최경조는 2001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 만찬을 할 때 전(두환) 대통령이 (운동권 입대자들이 불온 낙서를 쓰고 있다는) 군내 상황을 듣다가 '야, 최경조, 너 인마 뭐하는 거야'라며 혼을 내는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의 질책을 받고 녹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아울러 공식적으로는 1984년 말 녹화 사업을 끝낸 것으로 돼 있지만, 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며 민간인을 사찰한 못된 짓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90년 보안사 이병 윤석양의 양심선언을 통해서도 그 점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다른 사안을 짚었으면 한다. 전두환 집권기에 있었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이산가족 찾기다. 당시 그 열기,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북 관계도 변화를 보였다. 1980년 10월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이라는 걸 제기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 구상이었다. 장군 멍군 하듯이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월 남북 정상 회담을 제의했다. 이어서 이듬해(1982년) 1월에는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 속에서 1983년 6월 30일에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시작됐다. 이건 남북 관계와 직접 연결된 건 아니었지만,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점에서 분단 문제와 직결돼 있었다. 이산가족은 월남한 사람들과 북한 주민들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피란 과정에서 자식이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서 이산가족이 생긴, 이걸 남남 이산가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도 많았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 1TV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특별 생방송을 내보냈다. 원래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에는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하기로 돼 있었는데, 방청석에 무려 1000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몰려왔다. 그리고 방송 도중에 전화가 폭주해서 방송사가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 예정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서 그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생방송을 했다. 이날 방송에 총 850가족이 출연해서 36가족이 상봉했다.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7월 1일 새벽부터 시민들이, 이산가족들일 텐데, KBS로 몰려왔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엄청난 호응에 KBS는 너무나 놀랐고, 그래서 이날 바로 이산가족 찾기 추진 본부를 차렸다. 방송 이틀째인 7월 1일에는 그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생방송을 했는데, 이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요즘에는 그 시간대까지 방송하는 게 심심찮게 있는 일이지만, 그때는 이런 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7월 1일 이날은 전날보다도 훨씬 길게 8시간 45분 동안 생방송했다. 2일에는 14시간 동안 생방송했다. 이런 식으로 그해 11월 14일까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이 방송을 내보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긴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이었다. 10만여 명이 신청해 5만 3536명이 출연했고 1만 189명이 상봉했다. 전 국민의 53.9퍼센트가 이 방송을 시청했다고 답변했고 그중 88.8퍼센트가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여의도 KBS 건물 담벼락 등에는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만 장 붙어 있었다. 그래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국민들도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에는 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없었을까

프레시안 :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와서야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인가.

서중석 : 그때 나는 매일같이 여기 가서 수만 장의 벽보와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점심때만 되면 여기 가서 돌아다니고 그랬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 1980년대에 와서야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전쟁 때 헤어졌다고들 하지만 대개 1950년에 아이를 잃고 헤어진 건데, 1950년에 어린 자식이 부모를 잃었을 때 그것에 관한 기억을 제대로 하기가 아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헤어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30년 넘게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식, 부모를 찾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때쯤 되면 누가 누군지 기억도 잘 안 나기 마련이고 얼굴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실 이때쯤 되면 자식과 부모가 각자 살아온 경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도 어떤 자식들, 어떤 부모들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길소뜸>의 마지막 장면처럼 서로 만나는 걸 두려워할 수도 있었다.

어째서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서는 이런 노력을 안 했는가, 이 생각을 그 당시에 난 참 많이 했다. 이승만 정권 때에는 헤어진 사람들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었고, 박정희 정권 때에는 라디오가 대거 보급되고 1970년대 후반에 가면 흑백TV도 대다수 가정에 보급돼 있었는데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그 해답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승만 정부도 그렇고 박정희 정부, 특히 유신 체제에서는 긴장 완화 또는 분단 체제 이완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남북 간에 갈등이 있는 것이 그 당시 정권에 더 유용한 면도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반공, 반북 운동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던 때 아닌가. 그런데 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아무리 남남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반공, 반북 운동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이산가족 찾기 방송 같은 것이 없었던 데에는 그런 점이 작용한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본다. 물론 매스컴을 이용하는 방식이 1980년대와는 달라서 그렇다는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아무튼 한국인이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린 건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 그 후에도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그걸로 며칠간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1983년 이때는 정말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느냐, 이 말이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이원홍 KBS 사장이 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KBS가 워낙 못된 방송을 많이 해서 이원홍 이 사람도 욕을 많이 얻어먹었는데, 하여튼 이 방송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이원홍보다 더 윗선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난 해봤는데, 지금까지는 그 윗선이 있다는 자료를 보지 못했다.

▲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영화 <길소뜸>의 한 장면. ⓒ화천공사


대통령 일행 노리고 아웅산에서 테러 저지른 북한

프레시안 :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KBS에서 계속되던 시기에 버마에서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았나.

서중석 : 1983년 10월 9일 한글날에 아웅산 묘소에서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아웅산 묘소는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가리킨다. 아웅산 장군은 버마, 지금은 미얀마인 버마의 독립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시기에 전두환 대통령은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을 순방할 일정을 잡고 첫 방문지로 버마를 찾았다. 처음에 계획을 짤 때는 버마가 들어 있지 않았는데, 나중에 버마 방문이 추가됐다. 그렇게 해서 버마를 방문해 아웅산 묘소에 갔는데 거기서 폭파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폭탄이 터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서석준 부총리,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이범석 외무부 장관을 비롯한 장관 3명과 김재익 경제수석 등 고위 관료 16명이 숨지고 이기백 합참의장 등 15명이 다쳤다. 부상자 중 한 사람이 귀국 후 숨져 사망자는 17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전두환 대통령은 괜찮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대통령보다 각료들이 아웅산 묘소에 먼저 도착했는데, 천병득 청와대 경호처장이 묘소를 지키고 있던 버마 장병들한테 "나팔 불 준비는 됐느냐?"고 물어보고 손으로 나팔 부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버마 장병들이 이걸 잘못 알아듣고 나팔을 불었다고 그런다. 근처에 숨어 있던 북한 테러범들이 이 나팔 소리를 듣고 '한국 대통령 일행의 참배가 시작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원격 조종 장치를 누른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역사상 고위 인사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죽은 건 드문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그중에서도 김재익 수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재익은 전두환의 경제 가정 교사로 불리며 전두환·신군부 집권 전반기에 물가 안정, 수입 자유화, 금융 자율화 등을 추진했다. 전두환은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후 군에서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 주장이 나왔지만 자신이 이를 진정시켰다고 밝혔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83년 9월 1일에는 소련 사할린 부근에서 KAL기가 격추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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