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의 돌풍에 청와대 '2중대'는 추풍낙엽이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9> 6월항쟁,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죽었던 정치가 부활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린 2·12총선

프레시안 : 1985년 2·12총선은 정국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85년 2월 12일 겨울철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사실상 전두환·신군부 집권 제2기로 들어가는 선거라고 볼 수 있다. 유신 체제가 제2기로 들어가는 총선,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그 선거가 유신 체제를 붕괴시키는 도화선이라고 할까 단초가 됐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2·12총선은 유신 체제 못지않게 막강해 보였던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뿌리부터 흔들고 개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됐다.

1978년 12·12선거 때에는 긴급 조치 9호도 있고 유신 체제이기도 해서 선거 운동에서 정치라는 게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유신 체제에 대해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 대해 '잘못' 말하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잡혀갈 수 있었다. 긴급 조치 9호가 시퍼렇게 독기를 내뿜을 때 아니었나. 그래서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이, 이때 투표율이 높았는데, 이심전심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투표장에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랬는데도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지르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1985년 2·12총선 때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2·12총선 유세장은 전두환 정권을 강도 높게, 물론 일정한 한도 내에서 그럴 수 있었지만, 비판하고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묻는 장소가 됐다. 그런 점에서 2·12총선은 1972년 유신 쿠데타 이후 죽었던 정치가 되살아나는 시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선거이기도 했다.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가, 민심을 표출하는 중요한 계기로 얼마나 의미 있게 작용하는가를 12·12선거 못지않게 2·12선거는 똑똑히, 잘 보여줬다.

프레시안 : 2·12총선에서는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지 않았나.

서중석 : 이 선거에서 신민당이라는 신당이 크게 바람을 일으키고 각광을 받았는데, 먼저 신민당이 어떤 식으로 대오를 정비해갔는가를 보자. 신당이 출현하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1984년 11월 30일에 있었던 제3차 해금 조치다. 3차 해금 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2·12총선을 앞두고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인데 1, 2차 해금에서 제외된 99명 중 84명이 이때 정치 규제에서 풀려났다. 3차 해금에서 제외된 15명에는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규제된 김종필, 이후락 등 옛 여권 인사 6명도 들어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옛 야권으로 전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소속 정치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일 핵심이 되는 인물들은 아직 안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3차 해금으로 많은 인사가 규제에서 풀려나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3차 해금 조치 이후 총선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가지고 민추협 내부에서 논란이 많았다. 처음에는 선거 거부파와 참여파가 팽팽했다. 그러나 1984년 12월 7일 민추협 전체 회의에서 대세는 총선 참여 쪽으로 기울었고, 12월 11일에는 신당을 결성해 총선에 참여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신당 결성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추진돼 12월 20일 신한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2·12총선에서는 학생들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984년 연말에 대학가에서는 선거 거부론과 선거 활용론이 맞서고 있었다. 선거 거부를 역설한 쪽에서는 1985년 총선이라는 건 민정당과 군부의 장기 독재로 가는 포석에 지나지 않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당은 미국, 일본과 야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는 의회주의라는 건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고 모순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 민중의 역량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었다. 이와 달리 선거 활용론 쪽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민주화 문제, 민중 문제를 부각할 수 있는 통로로 2·12총선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는데, 한때 총선 거부론이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1984년 연말을 거쳐 1985년 연초에 들어가면서 학생 운동권에서는 총선 참여론으로 대세가 기울게 된다.

선명 야당 바람 분 유세장, 민정당·민한당은 죽을 맛

ⓒ오월의봄
프레시안 : 선거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전두환 정권은 추운 날씨를 택하는 것이 민정당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선거 일자를 2월 12일로 정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기 때문에 선거 바람이 잘 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건 큰 오산이었다.

우선 선거 기간에 기온이 예년보다 5~6도 높았다. 그러다가 묘하게도 선거가 끝난 후에 다시 영하권으로 내려갔다. 그뿐 아니라 선거 유세장, 특히 합동 유세장에서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합동 유세(연설회)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는 후보들이 모여서 자신의 경륜을 펴는 합동 유세가 유권자들이 몰려와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컸던 때 아닌가.

합동 유세는 1월 30일에 시작됐다. 2월 1일에는 서울의 12개 지역구에서 일제히 합동 유세에 돌입했는데, 신민당은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치 열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는데, 날씨가 풀리면서 분위기가 더 살아났다. 2월 2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현행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기 위해 헌법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광주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한 국정 조사권을 발동토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 또한 유세장의 열기를 부채질했다.

선거 바람은 합동 유세장에서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합동 유세장에서 후보자건 청중이건 발언 수위 또는 성역 같은 문제 때문에 두려워하고 쭈뼛거리기도 했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유세장을 찾은 유권자 숫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수위나 성역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봇물 터지듯 하고 싶은 말들을 하게 되면서 유세장에 청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신 쿠데타 이래 정치권에서 언로가 꽉 막혀 있었는데, 이게 단숨에 트이면서 정치 쟁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유세장에 가면 들을 만하다'는 얘기가 나돌았고, 그러면서 유세장에 오는 사람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유세장에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운동권 학생들의 야유가 유세장에서 큰 역할을 했다.

프레시안 : 어떤 야유를 퍼부었나.

서중석 : 유세장에서 민정당을 1중대, 민한당을 2중대, 국민당을 3중대로 야유하는 소리, 이게 단골 메뉴였다. 당시 20~30대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58퍼센트를 차지했는데 학생들은 유세장을 돌면서 군부 독재 재집권 결사반대, 민정당·민한당 반대, 민중 생존권 쟁취를 주요 구호로 외쳤다. 학생들은 "KBS 9시 뉴스", 이걸 '땡전 뉴스'라고도 했는데, "믿는 사람 손들어보라", "요즘 박사 위에 육사가 있다더라",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군사 공화국이다"라고 외쳤다. 그뿐 아니라 "광주사태 최고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 이때는 나중처럼 전두환이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계속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이 연호하며 일제히 "우우우" 하고 야유를 보낼 때 대도시의 민정당과 민한당 후보들은 폭음이 울리고 고막이 찢어지는 듯해 뭐라고 응수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도시 유세장 곳곳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다녔다. 민한당의 한 중진은 당시 민한당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세장에 몰려든 인파의 뜨거운 열풍이 민한당한테는 생기를 잃어가는 나뭇잎에 몰아치는 초겨울 바람과도 같았다."

또한 시민들은 신민당의 '직공법(直攻法)'에 갈채하고 환성을 올렸다. 2주 가까이 계속된 합동 연설회는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했다. 합동 유세장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그랬지만 김대중, 김영삼의 인기는 2·12선거 과정에서 최고로 올랐다. 선거 공보조차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노동자들도 "진짜 야당은 어디래"라고 하면서 선명 야당을 찾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한당 후보들은 바람에 낙엽이 쓸려가듯이 도처에서 쓸려갔다.

인기 치솟은 김영삼과 김대중

프레시안 : 양김의 인기,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김영삼,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생애 최고의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신민당이건 민한당이건 야당 후보 팸플릿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이 양김과 함께 찍거나 찍힌 사진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민주 투사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40대 기수를 자임했고 그 후 신민당 당수까지 한 이철승조차 양김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내놓았다.

1982년 12월 미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은 2·12총선을 나흘 앞둔 1985년 2월 8일 귀국했다. 이날 민한당 후보들도 멀리 지방에서까지 올라와 김포공항으로 몰려왔다. 김대중과 사진 한 장이라고 같이 찍으려고 바쁜 선거 일정을 팽개치고 몰려든 것이었다. 김포공항 안팎은 "김대중,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의 물결이었다. 경찰은 공항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을 썼다. 그렇지만 전국 각지에서 "공항으로 가자", "공항으로 가자"고 하면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환영장에 나온 인파는 김대중이 입국장에서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김대중은 2월 8일 오전 11시 40분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공항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사복 경찰이 뛰어나와서 일반 승객과 김대중 일행을 갈라놓은 다음 김대중과 그의 부인을 에워쌌다. 김대중과 그의 부인은 동행한 인사들이나 취재진과도 강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이들을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우고 이동했다. 입국 수속도 없었다. 마이크로버스 안에는 커튼을 쳐놓아서 김대중 등이 밖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엄청난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볼 수조차 없게 한 것이다.

▲ 2·12총선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1985년 2월 13일 자 10면과 11면. ⓒ동아일보


격전지 종로·중구와 성북구에서 맥없이 떨어진 민한당 후보들

프레시안 : 2·12총선에서 대표적인 격전지는 어디였나.

서중석 : 이 선거에서 제일 인기 있고 말이 많은 지역은 서울 종로·중구와 성북구였다. 종로·중구의 경우, 이때는 두 지역이 하나의 선거구였는데, 민정당에서 이종찬, 민한당에서 정대철이 일종의 아성처럼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넘보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2·12총선에서 승부처를 종로·중구로 잡았다. 역시 김영삼다운 정치 감각이었는데, 당시 종로·중구는 한국 정치 1번지로 불리고 있었다. 김영삼은 이민우를 이쪽에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당 창당 대회 순회 차 경상도에 가 있던 이민우에게 김덕룡 비서실장을 보냈다. 종로·중구에 출마하라는 얘기를 들은 이민우는 "고희를 넘긴 나를 사지로 보내려 하느냐"고 하면서 펄쩍 뛰었다. 김영삼은 자신이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부산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격론을 벌인 끝에 결국 자정 무렵이 돼서야 이민우가 출마하겠다고 했다. 이때가 1985년 1월 11일인데, 일주일 후인 1월 18일 신한민주당이 창당되고 이민우가 총재에 추대됐다.

종로·중구는 합동 유세 첫날부터 야단이었다. 서울에서 합동 유세가 시작된 2월 1일에 1만 명 넘게 모였다고 보도됐다. 이날 이민우가 피켓에 둘러싸여 유세장에 들어서자마자 청중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강당에서 연설 중이던 다른 후보가 연설을 중단하고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김영삼 예측대로 종로·중구, 바로 이곳부터 정치 열기가 되살아났다.

2월 6일에는 옛 서울고 자리에서 종로·중구 합동 연설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동아일보는 5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보도했고, 김영삼 회고록에는 10만 인파가 운집했다고 돼 있다. 하여튼 2월 6일 이날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그때 장충단 유세에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그 유세 이후 유세장에 사람이 제일 많이 모였다.

이날 이민우가 연설을 마치고 유세장을 나서자 청중 1만여 명이 뒤따라 나왔는데, 이때 나온 청중 일부가 "이민우", "독재 타도"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중 1000여 명은 세종로 네거리에 이를 무렵 차도에서 스크럼을 짜고 인도에서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전날인 5일에도 이민우가 연설을 마치고 장내를 빠져나가자 청중의 3분의 1 정도인 6000여 명이 거리에 몰려나오는 일이 있었다. 당황한 경찰이 길을 통제하자, 학생 200여 명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여 시민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기도 했다. '편집자')

이 선거에서 이민우 인기가 대단했다. 이민우는 결국 이종찬에 이어 2등으로 당선됐다. 근소한 차이로 이종찬이 1등을 하긴 했지만, 이민우와 이종찬은 개표 과정에서 엎치락뒤치락했고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였다. 정대철은 떨어졌다.

프레시안 : 1950년대 후반에 민주당 구파였고 그 후 유진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이민우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로 분류된다. 그런데도 2·12총선에서 이민우가 그 정도 인기를 누렸다는 건 전두환 정권 및 관제 야당에 대한 반발이 그만큼 강했음을 보여준다. 성북구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성북구의 신민당 후보는 민청학련 사건(1974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바 있던 이철이었다. 이철은 재야인사들과 신민당에서 거의 반강제로 출마를 요구해 후보로 나서게 됐는데, '정치 사형수 이철, 성북에 돌아오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 유세에 돌입했다. 사실 사형 선고는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받은 것이고 그 후 국방부 장관 확인 과정에서 그리고 2심에 가면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는데, 사람들한테 제일 인상적인 게 군사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라 그렇게 얘기됐다.

영국 시인 바이런이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말을 했지만, 이철 후보는 성북구에 등장하고 나서 바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 성북구 유세장마다 돌아다니며 이철을 목말 태우고 "이철, 이철"을 연호했다.

그렇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은 "여기는 데모장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데모식 선거 운동이 결국 조직적 득표 활동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얘기가 나온 건 성북구에서 현직 보사부 장관인 김정례가 민정당 후보로, 민한당에서는 민한당 선거대책본부장이자 조병옥의 아들인 조윤형이 나왔기 때문이다. 워낙 강적이기 때문에 이철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들 본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정치에 입문한 지 보름밖에 안된 이철이, 그것도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철의 뒤를 이어 김정례가 2등으로 당선됐고, 민한당 후보 조윤형은 떨어졌다.

민의의 돌풍에 힘입어 제1야당으로 떠오른 신민당

프레시안 : 2·12총선 전체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투표일인 2월 12일 아침부터 젊은 유권자가 투표소에서 많이 보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투표율은 신당 바람으로 84.6퍼센트를 기록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이었다. 서울이 81.1퍼센트나 돼서 4년 전 총선 때보다 10퍼센트포인트 높았고, 부산은 85.3퍼센트로 4년 전보다 8.6퍼센트포인트 높았다. 대통령 선거건 국회의원 선거건 투표가 끝나면 누가 당선될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흥분하기 마련이지만, 특히 이날은 흥분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신민당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휩쓸면서 도시에서 압승했다. 도시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31개 선거구(전체 선거구는 92개) 가운데 21개에서 신민당이 1위를 했다. 득표율(2월 13일 오전 10시 집계 기준)을 보면 서울에서 민정당은 27.0퍼센트인데 신민당은 42.7퍼센트였다. 부산에서는 민정당 27.6퍼센트, 신민당 35.9퍼센트였다. 심지어 대구에서조차 신민당은 민정당의 28.7퍼센트보다 아슬아슬하게 0.1퍼센트포인트 높은 28.8퍼센트를 기록했다. 이와 달리 2중대로 불리던 민한당은 도처에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신민당의 거센 돌풍으로 이변과 의외가 속출한 선거였다. 유권자도, 후보도, 여야 정당도 모두 깜짝 놀란 민의의 돌풍이었다. 전두환·신군부 등장 이래 장외 정치권으로 분류됐던 재야 정치 세력과 학생들이 합동 유세장을 메우고 바람을 일으켜서 유권자들의 민주주의 열망에 부응한 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2월 13일 자 사설에 "민정당 주도 아래 제1중대, 제2중대 식으로 불리던 정당의 기본 편제는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썼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정치가 살아나기 시작해서 정당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2·12총선은 보여줬다는 얘기다. 신민당은 "12대 국회에서 국민의 염원인 민주화를 반드시 쟁취하는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선거에서 민정당은 148석(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 신민당은 67석(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 민한당은 35석(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 국민당은 20석(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을 차지했다. 1981년 총선과 비교하면 민정당은 3석, 민한당은 46석, 국민당은 5석이 각각 줄었다. 내용상 패배가 분명했음에도 민정당 의석이 3석밖에 줄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대도시에서는 참패했지만 농촌에서는 앞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크게 작용한 것은 제1당이 전국구 92석의 3분의 2인 61석을 차지하게 만든 기형적인 선거법이었다. 그 덕분에 민정당은 득표율에서 신민당을 6퍼센트포인트밖에 앞서지 못했는데도 신민당보다 81석이나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한편 2중대 노릇을 하던 관제 야당 민한당 의원의 대다수는 2·12총선 후 신민당에 입당했다. 1985년 5월 신민당 의석은 103석으로 늘어났다. '편집자')

프레시안 : 창당한 지 한 달도 안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 아닌가.

서중석 : 그렇다. 김영삼, 김대중은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훌륭해서 인기가 좋았던 게 아니라, 민주화 열망이 강했던 국민들이 그 사람들을 내세워서 민주화로 나아가려 했다고 봐야 한다.

2·12총선은 신당 바람을 일으켰고 새로운 정치가 출현할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한 선명 야당의 등장 못지않게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도 이 선거를 거치며 큰 힘을 얻게 됐다. 그러면서 1980년대에 재야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고 1987년 6월항쟁에서 학생, 천주교, 개신교와 함께 큰 역할을 하게 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1985년 3월 29일 출현하게 된다.

▲ 1985년 2월 8일, 귀국하는 김대중을 환영하기 위해 김포공항 쪽으로 몰려든 인파와 이를 막는 전경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2·12총선 한 달 후 재야의 중심축 민통련 탄생

프레시안 : 민통련은 어떤 과정을 거쳐 결성됐나.

서중석 : 민통련은 1984년 6월에 조직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1984년 10월에 조직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한 단체였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가톨릭농민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 청년, 노동자, 농민, 재야, 종교계의 민주화 운동 단체 12개가 참여했다. 이것의 출현은 과거에 민주화 운동 단체가 명망가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과 달리 이제 조직적 역량을 갖춘 단체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해줬다. 그 반면 민주통일국민회의는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이 중요 간부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재야 원로들과 청년 활동가들이 결합해 만든 단체였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두 단체 모두 통일을 대단히 중시했다는 점이다. 통일이 실현되지 않고는 분단 극복이나 민족 해방, 민족 자주가 이뤄질 수 없으며, 민주화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분단 극복 및 민족 통일을 성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단체 이름에도 민주통일국민회의의 경우 통일 자가 들어가 있는데, 새로 조직된 민통련도 단체 이름에 통일이 민주, 민중과 함께 들어가 있을 정도로 통일, 민족 자주를 중시했다. 민족 문제가 1980년대에 중요하게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사실 통일 문제는 1970년대 말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주로 해외에서 나타난 모습이었고, 국내에서 통일 문제와 관련된 큰 움직임이 나타나는 건 1983년, 1984년부터라고 봐야 한다.

민통련은 2·12총선을 통해 드러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부응해 범민주 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 독재 종식을 위한 민주, 민권, 민족 통일 운동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결의했다. 민통련에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 들어가 있었던 전국 단위 단체들이 거의 대부분 들어왔다. 그와 함께 역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 들어가 있었던 지역 단체들이 민통련 서울지부, 경북지부, 경남지부, 강원지부의 이름으로 참여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 들어가 있었던 단체 가운데 민청련 등은 나중에 민통련에 합류하게 된다. 1985년 9월 20일 민통련 확대 개편 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민청련, 민중불교연합,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가입했고 개신교 운동 단체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지역 운동 단체가 6개 더 추가돼서 인천, 충남, 충북, 부산, 전북, 전남 등의 지역 운동 단체가 민통련에 들어왔다.

민통련에 여러 단체가 참여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4개 지역 단체에 이어 나중에 6개 지역 단체가 더 들어왔는데, 이것은 6월항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다발 투쟁을 가능케 한 지방 조직으로 기능하게 된다. 지방에 있는 단체들은 민통련 산하 지역운동협의회로, 이걸 지운협이라고 불렀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민통련에는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단체들이 가입했고 민통련 관계자들은 민중 운동을 아주 중시했다.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민통련에 가입한 단체 가운데 민청련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프레시안 : 민청련은 어떠한 단체였나.

서중석 : 민청련은 민통련보다 2년 앞서 만들어진 중요한 단체였다. 1960년대, 1970년대에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학생 시절에만 운동을 펼 것이 아니라 대학 졸업 후에도 민주화 운동에 계속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이 1980년대에 들어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한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이라고 할까 직업적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이라고 할까,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러한 진보적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 단체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1983년 9월 30일 민청련이 탄생했다. 의장으로는 나중에 고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김근태를 추대했다.

민청련은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온몸으로 매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족 통일의 대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참된 민주 정치를 반드시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성 다음 해인 1984년 3월부터 기관지로 <민주화의 길>과 민중신문 등을 발간했다. 이것을 통해 민청련은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 운동, 민주화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면서 관제 언론에 대항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무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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