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재벌은 왜 '한국병'을 만들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9> 유신의 몰락, 스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중화학 과열 부채질한 유신 정권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의 조급증은 중화학 공업화 문제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나.

서중석 : 중화학 공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외적인 여건을 볼 때 꼭 했어야 할 중요 산업임이 틀림없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1973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도 출범시키고, 그 후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단히 큰 특혜 정책도 여러 가지 썼다. 그렇지만 중화학 공업은 워낙 덩치가 큰 것인지라 초기에는 기업들이 거의 투자를 안 했다. 그러다가 1975~1976년에 대대적인 중동 특수로 큰돈이 들어오면서 기업들이 중화학 공업과 건설업에 막 뛰어들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은 중화학 과열을 부채질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빨리 성장률을 높여야겠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중복 과다 투자 현상에는 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조급함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규모가 큰 중화학 공장을 짓게 하는 게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것보다 성장률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고 본 것이고, 또 재벌들을 중심으로 추진해야 빨리빨리 중화학 공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해서 금융 특혜 등 각종 특혜를 주면서 재벌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중화학 공업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재벌들도 큰 공장을 지으면 재벌 서열에서 앞서고 재계 영토 분할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정부와 재벌들의 입장이 맞아떨어져서 엄청난 중복 과다 투자 현상이라는 게 유신 말기에 발생했다.

이 시기에 국회의원이었고 야당에서 경제통으로 불린 고흥문은 유신 후기에 3대 환상이 있었다고 말했다. '성장률은 높을수록 좋다', '수출 실적은 많을수록 좋다', '모든 가격은 억제할수록 좋다'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의 그와 같은 3대 환상 때문에 대재벌을 비호하고 중소기업은 외면하고 서민은 골병들게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한 3대 현상에 더해 박정희 정권은 조세, 금융 정책 등을 통해 재벌들한테 각종 특혜를 제공했다. 그것에 대해 고흥문 이 사람은 대기업에 의한, 대기업을 위한, 대기업의 정부가 바로 박정희 정권, 유신 정권이라고 했다. 여기서 대기업은 재벌을 가리킨다. 박정희 정권의 이런 모습은 손쉬운 방법으로 고도성장을 이루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 평론가 박병윤은 1978년 말로 접어들면서 중화학 과열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고 말했다. 포항제철 3기 설비 확장 사업 준공식이 1978년 12월 8일에 있었는데, 여기서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1986년까지 우리나라 중공업을 세계 10대 강국 대열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했다. 1979년 1월 19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이걸 다시 한 번 천명했다. 닷새 후인 1월 24일에 열린 무역 진흥 확대회의에서는 중화학 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수출 주도형 전략을 추진하라고 지시하면서 과감한 금융 지원 정책으로 이걸 뒷받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월에 대통령은 연두 순시에서 10대 전략 산업 육성 계획을 연이어 보고받게 된다. 이런 것들은 재계를 엄청나게 충동질했다.

▲ 포항종합제철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 ⓒ연합뉴스


거듭된 중화학 투자 조정…원인은 박정희식 성장 제일주의

프레시안 : 과잉 중복 투자는 한국 경제 전반에 큰 부담을 주지 않았나.

서중석 : 이때쯤 돼서는 중화학 공업 문제가 한국 경제에 굉장히 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1979년 10·26 직후 경제기획원 장관, 경제 부총리를 하게 되는 이한빈은 1970년대 중화학 공장, 원유 값, 이건 1979년 유가 폭등을 가리키는데, 그리고 차관 이자 같은 것들이 한국 경제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줬다고 이야기했다. 바쁜 목을 메우고 이자를 물기 위해 새로운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 악순환이 이 시기에 심하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성장 둔화, 국제 수지 악화, 물가 앙등이라는 3중고에 한국 경제가 시달리게 됐다고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와 재벌은 짝짜꿍해서 중화학 공업 중복 과다 투자를 계속했다. 경제가 큰 병을 앓고 있는데도 그걸 계속 키우는 방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중화학 공업 문제가 당시 '한국병'으로서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이른데다 유가 파동까지 겹치면서 박정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1979년 5월 25일 신현확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투자조정사업위원회는 3원화돼 있는 터빈 제너레이터, 4원화돼 있는 보일러, 발전 설비 등의 분야를 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하면 8개 사업 분야에서 3727억 원이 절약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중화학 공업 중복 과다 투자 문제는 이미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전두환·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1980년 8월 20일 중공업 분야 투자 조정을 단행하게 된다. 재벌들이 쉽게 따르려 하지 않은 사안이지만, 이때는 그야말로 비상시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국보위에서 그걸 단행한 것이다.

프레시안 : 국보위의 투자 조정안,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그 내용을 보면, 발전 설비와 중장비는 대우로 일원화하고 승용차는 3사를 현대로 통폐합한다는 것 등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현대양행의 군포 중장비 공장을 비롯해 창원 종합 기계 공장, 그리고 대우 그룹의 옥포 종합 기계 공단을 1개 법인으로 통합, 합병해 대우 그룹이 책임 경영하게 됐다. 전에 부마항쟁에 대해 얘기할 때, 창원 공단도 불황에 시달렸고 그중에서도 현대양행의 경우 가동이 제대로 안돼 세계 최대의 창고가 돼버렸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투자 조정 대상이 된 현대양행의 창원 종합 기계 공장이 바로 그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현대와 새한이 역시 1개 법인으로 통합, 합병돼 현대 측이 승용차 생산에 전념하기로 했다. 기아산업은 브리사와 피아트, 푸조 등 승용차 생산에서 손을 떼는 대신 타이탄, 복서 등 5톤 이하 트럭 생산에 전업(專業)키로 했다. 새한의 엘프, 현대의 바이스 등 기아와 경쟁하던 차종은 생산을 금지했다.

국보위는 중화학 부문 중복 과다 투자를 방치할 경우 기업은 물론 금융 기관까지 모두 부실화할 우려가 있다며, 과열 투자의 핵심 부문인 발전 설비와 자동차, 건설 중장비 부문을 우선 1차로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보위는 이 조치로 1983년까지 1조1400억 원 정도 투자가 절감되며 그 돈을 그동안 소외됐던 중소기업과 수출 경쟁력이 있는 경공업 전략 업종 등에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시기까지는 좁은 국내 시장을 놓고 발전 설비 4사, 승용차 3사, 중전기 7사, 엔진 3사, 전자 교환 시스템 4사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면서 중공업 개점휴업 상태에 이른 것은 한국 경제 최대의 고질병으로 꼽혔다. 그러면 이때 다른 나라는 어땠느냐. 발전 설비의 경우 당시 프랑스와 서독은 각각 1개 사였고 영국도 일원화를 추진 중이었으며 중공업 대국 일본에서도 '3사로 나뉘어 있는 건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승용차의 경우 유럽에서는 대개 국가별로 2개 회사 체제였다. 중전기의 경우 서독에서는 지멘스 하나가, 엔진은 스위스의 슐츠라는 하나의 회사가 각각 유럽 전역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런 실정이었는데, 그 당시 기술력으로는 외국 시장을 넘보기가 어려웠던 한국의 경우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엄청나게 난립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0년 8월 20일 국보위라는 강권 기구에 의해 통폐합이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중화학 공업 분야 중복 과다 투자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국보위는 그해 9월 13일에 또다시 중화학 투자 조정을 단행했다. 이때는 중전기, 동 제련, 전자교환기, 선박 엔진 등 4개 부문을 통합 조정했다. 박정희의 성장 제일주의, 경제 실적 부풀리기가 1978~1979년부터 한국 경제를 얼마나 어렵게 했는가를 이런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중화학 부문 중복 과다 투자로 '한국병'이라는 새로운 경제 병을 한국은 앓게 됐다. 여기서 유신 체제 후기에 한국 경제 사절단이 대만을 방문해 대만 사례를 참고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신 유지 우선시한 박정희 정권…경제 안정은 뒷전이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목적으로 간 것인가.

서중석 : 함근식 교수가 쓴 글에 따르면, 1977년과 1978년 두 해에 걸쳐 재무부 장관 등 우리 정부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방문단이 대북(타이베이)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1973년, 1974년에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대만은 어떻게 극복했기에 1975년부터 빠르게 경제 안정을 이룩하면서 안정과 성장을 함께 누렸는가, 그 부분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방문단은 높은 투자율과 고수준의 저축률, 공업 부문과 농업 부문의 균형 성장 및 수출 증대, 외원과 외자의 효율적 사용 등이 대만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판단했다. 자유중국이 이룩한 경제 성장은 안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와 동시에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라는 것을 이 사람들이 현장에서 본 것이다.

대만은 석유 파동으로 경제가 심한 충격을 받게 되자 고도성장을 피하고 저성장책으로 대처했다. 이 점에서 한국과 정반대인데, 외적 충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항해 중 태풍이 부는데 고속 항진을 하는 건 모험이며, 태풍을 피하거나 아니면 태풍의 위력이 감소하고 태풍이 지나간 뒤 재항진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냐는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저축률은 물가가 안정되면 자동적으로 올라갈 것이며, 물가가 안정되면 환율도 안정되고 수출도 늘어난다고 보고 안정 위에서 경제 성장을 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프레시안 : 대만에 가서 시찰한 효과가 있었나.

서중석 : 그런데 이렇게 대만에 가서 현장을 보고 공부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빨리 성장하고 국민들한테 그걸 보여줘서 유신 체제를 유지하겠다', 이걸 박정희 유신 정권은 '목숨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만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방향을 수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여튼 중화학 부문 중복 과다 투자 속에서 대재벌만이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비대하게 됐다. 1974년에서 1978년 사이에 현대는 9개 계열군에서 31개 사로 커졌다. 이건 정주영 아우가 경영한 현대양행 6개 사는 제외한 수치다. 대우는 10개 사에서 35개 사로, 럭키는 17개 사에서 43개 사로, 삼성은 24개 사에서 33개 사로 늘어났다. 그러나 중화학 산업의 평균 자기 자본 비율은 22퍼센트에 불과했고 특히 대기업의 경우 20퍼센트 미만이었다.

이렇게 재벌이 기형적으로 팽창한 것은 선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8년 12·12선거에 대한 청와대 보고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공화 위에 재벌 있다"는 구호가 국민들한테 그렇게 인기를 끌면서 잘 먹혀드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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