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은 2009년 '직장인 100만 명이 뽑은 내 인생의 시 한편'에서 1위를 차지한 '담쟁이'를 낭독하며 2시간 넘게 진행한 강연을 마무리했다. 도종환 시인은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벽(제도, 이념 등)을 인정한 뒤, 멈추지 말고 담쟁이처럼 느리게라도 변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길담서원'에서 주최한 '질주하는 사회, 성찰하는 삶' 강연 자리에서였다.
도종환 시인의 삶은 굴곡이 많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1989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만 했다. 10년 만에 복직된 뒤엔 '자율신경실조증'이란 병에 걸려 다시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이후 5년 동안 산 속에서 칩거했다. 겨우 몸을 추스른 2년 전부터는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런 그가 '우리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놓고 근본적인 해답을 고민했다. 도종환 시인은 "공개수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며 입을 열었다.
"현대는 경쟁의 시대, 하지만 이것이 자연의 원리인가"
도종환 시인은 "현재의 시대는 '강자의 논리, 식민지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제는 이것을 대부분 사람들이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것이 자연의 원리인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뱀을 예로 들며 "같은 뱀끼리 싸울 때는 서로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며 "동족간 싸움에서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하지만 사람의 경우, 싸움에서 지면 뱀이 독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것으로 끝이 난다"며 "어떻게 보면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일수도 있다"고 말했다.
▲ 도종환 시인은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벽(제도, 이념 등)을 인정한 뒤, 멈추지 말고 담쟁이처럼 느리게라도 변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며 말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길담서원'에서 주최한 '질주하는 사회, 성찰하는 삶' 강연 자리에서였다. ⓒ프레시안(허환주) |
그렇기에 도종환 시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지배하는 경쟁 구조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 높은, 더 나은 삶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
"경쟁 속에서 다들 열심히 지치도록 일하고 쫓기듯 살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이룹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언가 허전하고 놓치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봤습니다. 주황색 빛깔 모양의 처음보는 꽃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멈추고 그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멀찌감치 가고 있던 친구들은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라고 소리쳤습니다. 친구들은 정해진 시간 속에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로 항상 딴 눈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당시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하지만 반대로 친구들처럼 성실하지 않고 가끔 한눈을 파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여유를 되찾는 삶, 즉 질 높은 삶을 꿈꾸고 있다"며 "하지만 그 삶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기에 지금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종환 시인은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면서도 자신이 지난 1월 방문한 핀란드 교육 시스템을 예로 들며 자신이 생각하는 보다 나은 삶, 즉 행복하게 사는 삶을 이야기했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는 삶이 행복할까"
도종환 시인은 "학업성취도 1위인 핀란드는 교실 당 교사가 2~3명 배치돼 있고 학생도 고작 열 댓 명에 불과했다"며 "이곳은 학생에게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무료다. 교통비, 생활비도 전액 국가에서 지원해준다. 도종환 시인은 "이 나라에서 교육은 한 사람이 잘 살도록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되게 하고, 공동체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라며 "그렇기에 교육을 받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도종환 시인 ⓒ프레시안 |
도종환 시인은 "한국의 경우 일률적으로 교육 목표를 정한 뒤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아이의 경우, 탈락시키는 구조"라면서 "하지만 핀란드의 경우, 학부모, 아이, 선생이 모여 학생의 목표를 정한다"고 설명했다. 학생마다 각기 특성에 맞춰 학습 목표를 다르게 정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습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스템이다.
자연히 학습 성취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도종환 시인은 "한국의 경우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게 평가지만 핀란드의 평가는 딱 세 가지다.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아주아주 잘했어요'"라고 밝혔다.
핀란드 교육에서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는 점이다. 종교, 출신지, 나이 등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을 가르친다. 도종환 시인은 "이러한 교육이 있기 때문에 사회도 협력과 배려로 운영된다"며 "학생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소중한 존재로 교육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의지를 견지해야 한다"
도종환 시인은 핀란드 교육 시스템을 목격한 뒤 '행복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됐다.
"한국의 많은 이들이 박탈감 때문에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물질이 더 많이 생긴다고 행복할까요? 늘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 중에 장미꽃이 제일 예쁩니다. 그렇다고 모든 꽃이 장미꽃이라면 어떨까요. 아름다움이란 제 빛깔, 제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개인의 특성을 인정하기란 요원하다. 도종환 시인은 "핀란드에서 만난 교육자들이 '한국의 학업 성취율이 우리 다음인데, 뭘 그렇게 우리에 대해 묻느냐'고 했다"며 "우리 교육 사정을 말로 설명하기가 부끄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도종환 시인은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은 5~10년 안에는 이뤄지지 못할 듯하다"면서도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려는 태도는 지속적으로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 '담쟁이'에 등장하는 벽을 지금의 현실로 비유했다.
"우리 앞에 넘어야 할 벽은 높습니다. 담쟁이도 벽에 살게 됐을 때 얼마나 원망이 많았을까요. '왜 나만 이럴까' 하면서 원망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원망만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벽을 뚫지는 못하지만 벽을 붙잡고 한 발자국씩 움직였습니다. 이파리들과 함께 말이죠. 그러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꿨습니다. 우리도 벽을 인정하고, 그러나 멈추지 말고, 느리게 가는 방법 밖에 없다면 그렇게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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