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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박을 일삼는 시절을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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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박을 일삼는 시절을 살며

[기고] 우리가 바란 민주주의가 콘크리트 구조물인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화예술위원회')가 한국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에 불법집회 불참 확인서라나 뭐라나 그것을 제출해야 작가회의 기관지 <내일을 여는 작가> 제작 지원비와 '세계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필요한 지원금을 주겠다고 했다가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작가회의가 지원받기로 한 사업비 3400만 원은 문화예술위원회가 작가회의에 베푸는 시혜도 아니고 무슨 명절 특별 보너스도 아니라는 점이다. 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자신의 역할 및 임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현장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10명의 위원들이 합의를 통해 문화예술정책을 이끌어내며, 민간이 공공영역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공공영역이 민간에 참여하는 동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정책의 일방적인 수혜자였던 문화예술인들이 정책의 입안자이자 수행자로 진입하는 것" 운운.

그런데 이 사태에 대한 문화예술위원회의 입장은 실소를 짓게 하기에 충분하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이 사태의 책임을 정부에 떠넘겼고 그것을 다시 문화체육관광부는 국회로 공을 던져버렸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한나라당이 장악한) 대한민국 국회가 문화 정책의 입안자인 문화예술인들의 권리를 침해한 사태가 된다. 참으로 웃기도 힘든 난센스다.

내가 알기로 위에서 거론한 문화예술위원회의 임무는 문예진흥원이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면서 개정된 법에 근거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단지 문화예술인들의 사업을 지원해야 하는 임무만 주어진 기관이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문화예술인들의 사업에 관여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단지 대통령의 거수기에 지나지 않는 (한나라당이 장악한) 대한민국 국회가 돈줄을 잡고 문화예술위원회를 사주한 것이 된다.

그에 대해서 작가회의가 그 돈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은, 미안하지만 신경질(유인촌 장관)이 아니다. (하기야 신경질은 유인촌 장관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작가회의의 확인서 제출 거부는 현 집권세력에 대한 조롱과 멸시도 함의하고 있음을 좀 알아듣기 바란다. 하기야 그것을 알아먹을 줄 아는 지성이나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람을 태워 죽이고도 도리어 뒤집어씌우고 강을 파헤치면서 녹색 성장을 운운하는 후안무치한 경지에까지는 아마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문단의 말석에서 꾀죄죄하니 기웃거리는 처지에 이러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서글프고 염려 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나는 문학이 순수하거나 초월적이거나 또는 정교한 지성이 빚어낸 텍스트라기보다는 다소간 오염된 토양에서 자라나는 실제적인 '더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좀 막돼먹은 입장이기 때문에 이 같은 사태에 대해서 없는 능력이라도 부려볼 용의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현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무지와 저급함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들 하시는 모양인데, 나는 현 집권세력 전체의 영혼 자체가 콘크리트 구조물인 게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당지역 유기농업을 육성하겠다"고 한 약속을 가볍게 뒤집어엎고 포클레인과 경찰을 투입할 리가 없으며 흐르는 강을 파헤치지 못해 동원한 거짓과 말 바꾸기가 그리 현란할 리가 없다. 심지어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가 그로테스크할 지경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무의식은 지난 2년을 자꾸 망각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잠시 지난 2년을 되돌아보려니 두통이 일고 안개가 의식 안에 자욱하게 피어오르기까지 한다. 이런 경우는 지난 2년 간 벌어진 일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 내 개체적 삶을 보존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몸의 반응일 것이다, 아마도. 현 집권세력의 무지막지한 반(反)생명관이 지금 여기저기서 희한한 양태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작가회의에 저지른 하나도 안 웃기는 코미디도 그 흐름의 하나이다. 이게 어디 문학에만 국한된 일인가 말이다. 여기저기서 벌이고 있는 한탄스러운 작태에 도대체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차라리 작가회의 내부의 몇몇 분이 말하는, 저항할 가치도 없다는 냉소도 자못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단순히 지난 2년여 전의 선거에 대한 반성을 하자거나 소위 민주정부라는 10년 사이에 벌어진 씁쓸한 일들에 대한 회오를 거듭하자는 게 아니다. 저항이든 조롱이든 거기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이 배(胚)의 형태로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우리는 너무 분노에만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자는 것이다.

만일 저항이 창조가 아니라면 차라리 냉소주의자가 되자. 냉소주의자는 차라리 침묵이라도 실천하는 이들이다. 저항의 언어가 새로움을 창조하지 못하면 훗날 우리는 우리가 뱉은 언어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 것이다. 지금 저 흐르는 강에 가해지는 폭력이라든지 노동자들에게 남용되는 해고통지서라든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 대한 위협과 불이익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이제는 정말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지만 쓰레기를 치운대서 유사한 쓰레기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쓰레기를 치운 자리에 화단을 만들든지 나무 한 그루를 심든지 그도 아니면 바람이라도 지나가게 해 두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세상에 넘실댈 때만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생명은 움직이는 것이다. 생명은 흐르는 것이고 생명은 다른 것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레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콘크리트 구조물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없는 것이며 죽이는 것이며 미워하는 것이다. 이게 콘크리트 구조물의 속성이고 본질이다. 우리가 바랐던 민주주의가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지금껏 한 걸음 한 걸음 콘크리트 구조물을 신봉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속도를 찬양했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안달하였고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혈안이 된 채 살았다.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만든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은 내게는 과분한 역할이니 이 '더러운 글'은 여기까지다.

참고로, 현 집권세력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적은 것이 아니니 사실 나는 그들에게 뭔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회의에 지원금을 주든지 말든지 (나도 회원이지만) 관심 없다. 다만 우리의 삶을 겁박해서 불안을 퍼뜨리고, 다시 그 불안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반생명적·반공동체적·반문화적 세력이 쳐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고픈 벗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봄의 초입에 허락된 꿀 같은 휴일 사흘을 가득 채웠다는 것만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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