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인의 처지는 그 사회 인권 감수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사회적 편견, 의사소통 능력 부족 등으로 인해 이들은 억울한 일을 겪어도 하소연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만만해 보인다. 피해를 입어도 보복하기 힘든, 이런 이들에게도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곳이 진짜 선진국이다.
한국은 어떨까. 마침, 국가인권위원회가 4일 '정신장애인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가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내용은 참혹하다. 국내 정신장애인 대다수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치료기관에 입원 돼 장기간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병원 측이 강제입원을 선호하는 탓도 있지만, 가족과 사회의 인권불감증이 더 큰 이유다.
정신장애인 강제입원 비율, 한국은 86%. 다른 OECD 국가는 3~30%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정신병원, 정신요양시설, 사회복귀시설 등에서 지내는 환자 가운데 본인의 뜻에 따라 입원, 입소한 경우는 14%에 불과하다. 나머지 86%는 보호의무자, 시·도지사 등이 강제로 입원, 입소시킨 경우다. 이는 주요 선진국과 정반대 상황이다. 다른 OECD 국가의 경우, 정신장애인이 강제로 입원하는 비율이 3~30%에 불과하다.
한국이 유난히 강제입원 비율이 높은 이유에 대해 인권위 관계자는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선 병원들은 매출이 정신장애인 수에 비례하므로 장애인을 되도록 많이 오래 받으려 한다. 본인의 뜻에 따라 입원한 환자는 당사자가 원할 때 바로 퇴원할 수 있다. 그래서 상당수 병원들은 자의로 입원해도 보호의무자가 강제로 입원시킨 것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하면, 환자가 마음대로 병원을 떠날 수 없다. 여기에는 병원과 가족의 암묵적인 공모가 있다. 가족 등 보호의무자들이 정신장애인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고 싶어 한다는 것.
외국은 정신과 병상 줄이는데, 한국은 거꾸로
장기입원 비율이 유난히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한국의 정신장애인 평균입원일수는 233일로 영국의 52일(1999년), 독일의 26.9일(1997년), 이탈리아13.4일(1998년)과 큰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는 퇴원한 환자를 다시 입원시키는 관행도 한몫 한다. 한국의 정신장애인 4명 가운데 1명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가족 등 보호의무자에 의해 다른 곳으로 강제 입원된다. 이들 가운데 55.9%는 퇴원해서 다시 입원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채 하루가 되지 않는다.
OECD 국가들과 거꾸로 가는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다른 나라들은 1960년대 이후 정신과 병상 수를 감소시키고 지역사회 시설을 늘리는 추세다. 반면, 한국은 정신과 병상 수가 1999년 이후 계속 증가했다. 인권위가 19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정신병상 수 증가율을 비교한 결과, 아일랜드는 -1.43, 오스트리아는 -0.34, 영국은 -0.72를 기록했지만, 한국은 +0.49로 나타났다. (단위는 %)
인권위 "'자의 입원 원칙' 법으로 못 박아야"
이런 상황이 꼭 병원과 가족들의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인권위의 판단이다. 퇴원한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자리 잡기 힘든 지역사회 풍토가 진짜 이유라는 것.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씻기 위해 인권위는 △사회복귀 시설의 확충 △정신분열증 등 부정적 병명의 변경 △정신보건 복지 예산 확대 △재활모임 지원 등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정신보건법을 개정해 '자의(自意) 입원 원칙'을 명문화하고, 입원 요건과 추가 입원 절차를 강화해 환자가 장기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치료를 받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자신의 입·퇴원 수속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전화 통화 및 면담을 제한받는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정신보건법에 '정보제공 및 외부 소통권 보장' 조항을 넣자는 제안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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