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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점은 못난 대로…우리 인연은 모두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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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점은 못난 대로…우리 인연은 모두 '길동무'

[기고] '길동무' 주제로 열린 '2009 화엄제' 참관기

안개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숙소 마당까지 안개가 자욱하게 몰려와 있었다. 이건 엄청난 상징이군, 혼자 중얼거렸다. 가까이에 저수지가 있어 아침이면 안개가 낀다는 과학적인 설명보다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아득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었다. 안개는 가을햇살에 밀려 이내 걷혔지만 마음속 티끌, 헤맴의 길은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것인가. 화엄제의 주제가 시종일관 길 찾기와 연관 있었던 까닭도 이와 멀지 않을 것이다.

첫 해의 '첫 발자국'에서 '길 떠남'으로 다시 '길을 묻다'로 이어졌다가 올해 네 번째 맞는 화엄제 화두는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길동무'로 정했다. 길을 떠나고 길을 찾고 길을 묻는 것, 길을 나선 자들이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이 과정은 인생행로와도 닮았다. 불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깨달음의 벗을 도반이라 부르듯이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도 길동무라 부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을 큰 길이라고 보면 우리가 사는 동안 만나는 인연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다 길동무가 된다. 못난 놈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신경림 시인의 시가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힘을 보태는 상생의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타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첫걸음이다. 그런 생각의 와중에 만난 안개는 내게 모호하고 숨겨진 겉모습과 달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오히려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다가가면 길이 보이고 걸어갈수록 멀었던 길이 점점 더 시야에 잡힌다. 그 안개 속에서 길동무의 손을 잡고 길을 찾아 더듬더듬 남은 길을 줄여가야 하는 것이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리라.

▲ 2009화엄제 전경. ⓒ임종선

첫 출연자인 인도 연주자들은 싯타르와 타블라를 연주하며 수피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사나 언어보다는 소리가 가진 원초적인 힘에 의한 공감을 불러왔다. 그런 점에서는 터키 음악도 유사했다. 터키 음악을 들을 기회도 악기연주를 들어본 적도 거의 없던 내게 터키 음악은 인도 음악과는 또 다른 영성을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슬람 송가 같기도 하고 인도의 챈트 같기도 한 터키의 전통음악은 귀에 익지 않은 새로운 화음으로 관객의 주의를 끌었다.

마음으로 음악을 듣는 것, 연주자가 살아온 인생이 음악에 배어나오는 것에 생각했다. 땅과 공기와 사람과 소리가 각각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었다. 인도든 터키든 한국이든 우리가 내는 소리에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정보가 들어 있다. 한 사람이 내는 소리와 음악에는 그 사람이 사는 곳, 태어난 땅, 몸담고 있는 문화가 묻어난다. 소리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았다면 소리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표현하는 영혼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쉽게 '한'을 한국인의 대표 정서라고 말하지만 너무 구태의연하고 피상적인 평가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진도의 씻김굿 바라지를 들으며 나는 적어도 영혼의 고양과 깊은 상처와 울림에 관해서라면 우리 민족이 어느 민족 못지않음을 절감했다. 그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역사와 문화가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겪게 했다는 말과도 통한다. 영성 음악의 궁극은 사람과 삶과 소리가 하나가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것은 강송대 명창의 구음을 들을 때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가자서라 가자서라."

아쟁, 징, 장고와 구음은 어떤 것이 뒤처지거나 앞서지 않게 말 그대로 소리의 조화, 환상의 화음을 만들어냈다. 손이 아니라 온몸을 기울인 호흡으로 북을 치고 장고를 치고 징을 쳤다. 강송대 명창의 구음은 악기 소리와 숨결과 한 몸을 이루었다. 그 노래와 함께 관객마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 모두가 얼마나 잘 어우러져 한 몸을 이루느냐가 씻김의 역할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가늠쇠일 것이다. 음악의 원천은 무엇일까, 음악회에서 가슴에 휘몰아치는 감동을 받을 때마다 되새기지만 답은 역시 화음이었다. 연주자들 사이에,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주고받는 마음과 정신의 화답과도 같다.

▲ 진도 씻김굿 바라지. ⓒ임종선

"소리 한 자락 하소."

남도 사람들이 술자리에서나 여럿이 모여 입담을 나눌 때 흔히 하는 말이다. 그때 말하는 바로 그 소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소리로 호흡하고, 소리로 대화하고, 소리로 속내를 드러냈다. 그들에게 소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존재 그 자체요, 삶의 이유였다. 거기서 씻김의 힘, 치유와 회복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씻김굿 바라지에 이어 화엄제의 총감독이기도 한 박치음은 자신이 작곡한 새 노래 '내려놓아라'를 기타를 치며 불렀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대목,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산스크리트어 원음에 곡을 붙인 만트라였다.

"가떼 가떼 바라가떼 바라선가떼 보디 스바하."

▲ 화엄제의 총감독 박치음. ⓒ임종선
그의 노래가 몇 마디 이어지자 관객들은 어떤 지시도 가르침도 없이 반복되는 부분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보디 스바하 보디 스바하, 가떼 가떼 바라가떼 바라선가떼 보디 스바하를 외며 손뼉을 쳐 박자를 맞췄다. 마음속 그늘이 조금이라도 걷히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행동이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활은 이렇게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는 것, 저 좋아서 하는 것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스쳐가는 바람에게 길을 물으니 마음속의 짐부터 내려 놓으라네.
거침없는 강물에게 길을 물으니 마음속의 다툼부터 내려 놓으라네."


신비롭고 추상적인, 일반대중에게 약간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터키나 인도의 영성음악과 달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과 멜로디여서 숨통을 틔어준다고 할까, 마음에 잘 들어와 머물도록 쉽게 풀어서 들려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모르는 음악이라는 불편한 마음 없이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랫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박수를 치게 했을 것이다. 붙들지도 않고 매달리지도 않고 모든 것이 흘러 제 갈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우선은 내 손과 몸과 마음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알아들었다.

옷자락이 스쳐 닳듯 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마음을 할퀸 상처, 어쩌면 그 상처는 자신의 품에 안고서 저절로 녹아 없어지길 바라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고해성사나 심리상담 없이 단단한 내 영혼이 스스로 그 상처를 쓰다듬고 살피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영성적인 활동들은 단지 그 일을 돕는 게 아닐까. 많은 의문과 물음들이 마음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지나가게 하는 것, 이 순간의 어떤 것도 다 지나가게 하는 것이 내 영혼이 진정 원하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지막 출연자인 스웨덴의 말로우 베리는 플레이아디안(Pleiadian)이라는 상상의 별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만든 노래를 불렀다. 휘파람 소리나 새소리 같은 맑은 노래로 그녀의 이국적인 외모만큼 관객들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이 지구의 언어는 오염되었다고 생각해 새 언어를 만들었다지만 결국 그 또한 더 평화로워진 이 지구의 언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숨을 죽이고 그녀의 노래와 몸짓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고요했다. 혹시 이 세상 어딘가에 이런 곳이 있지 않을까. 저녁마다 여사제가 먼 데서 마을사람들의 하루 수고와 고통을 위무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평안한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나라. 말로우 베리의 목소리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여사제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 화엄제 출연자들과 종삼 화엄사 주지스님의 게송. ⓒ임종선

곱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노래의 절정에서는 포효하는 사자의 울부짖음처럼 높고 우렁찼다. 마치 오늘 내가 잘못한 일을 꾸짖고 다시는 같은 실수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질책처럼 엄한 음성이었다. 잘못한 만큼 야단을 맞는 건 억울하기보다 마음의 어둠을 걷어내고 홀가분해지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 잘못이 요행히 벌을 비껴가거나 내가 잘못한 것보다 지나친 벌을 받는 것 모두 영혼에 얼룩이 생기는 좋지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화엄제가 덜어낼 건 덜어내고 덧붙일 건 덧붙이면서 온전한 형체를 갖춘 네 살이 되었다. 생명의 씨앗에 불과했던 아이가 손과 발이 생기고 심장과 얼굴이 생겨나듯 처음엔 듣기에도 낯설었던 영성음악이 어떤 것인지 차츰 알아가며 마음으로 듣게 된 것이다.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화엄제가 전달하는 감동도 해마다 달라지는 것을 보며 잘할 때가 가장 어려운 때라는 말을 새겨본다.

진정한 영성음악은 큰 기도인 동시에 작은 속삭임이며 아울러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 다짐이 마음 가득 담기도록 다른 삿된 것을 몰아내는 게 영혼의 바람이고, 그것을 돕고자 하는 것이 영성음악의 본뜻이라고 믿는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마음을 짓누르고 정신을 탁하게 하는 안개와도 같은 인생의 숙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길동무이다. 산중에 울려 퍼지는 법고소리 들으며 속진의 고달픔을 내려놓았듯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길동무 찾기. 가을이 깊어지면서 여름의 열기와 분주함이 빠져나가고 삶의 긴장을 불러오는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주제이다. 곧 닥쳐올 추위에는 아랑곳없이 절정을 향해 불타오르는 단풍의 아름다움은 또 얼마나 역설적인가. 단풍이 아름다운 까닭은 초록을 넘어서 저마다 제 색깔을 드러내며 제 모습으로 한해의 생명활동을 완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슬바람에 몸을 부대끼는 소리도 제각기 다르다. 못난 점을 못난 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길동무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체세간의 보리를 깨쳐보니 부처님이 언제나 벗이 되어주셨더라는 종삼 주지스님의 게송을 다시금 떠올린다. 돌아보면, 거기 또 다른 나이기도 한 길동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 화엄제에 참석한 관객들. ⓒ임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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