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부에 고분고분한 인권위…석연치 않은 인사 발령
별정직 홍보협력과장 이 모 씨에 대한 인사 조치가 발표된 지난달 30일이 고비였다. 인권위는 이날 이 씨를 사무처로 대기 발령하고, 오는 6일 면직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인사 조치의 배경에는 행정안전부의 시정 요구가 있다. 행안부는 지난 8월 12일 "과장·팀장은 조직개편 이후 종전 업무와 비슷한 일만 맡을 수 있다는 별정직 공무원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며 인권위에 시정을 요구했다. 현병철 위원장은 군말 없이 요구를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내부 논의가 없었다. 당사자인 이 씨 역시 인사 발령이 나고서야 내용을 알게 됐다.
정부가 인권위 특정 직원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인사 조치를 요구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인권위는 정부의 조직 축소 방침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청구를 제기한 상태다. 위원장이 행정안전부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권한쟁의심판청구를 제기한 의미가 무색해졌다.
"별정직 솎아내서 인권위 정체성 희석한다"
보수 진영이 인권위 별정직 직원 가운데 시민단체 출신이 많다는 점을 줄곧 문제 삼아왔다는 이유로, 이번 인사를 인권위 내부에서 진행되는 인적 청산 작업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진보, 보수라는 이념 문제는 부차적이며,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별정직을 솎아낸 결과, 인권위가 행정부의 통제를 받는 공무원 조직 가운데 하나가 돼간다는 점 자체 문제라는 것이다.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 소속 정태욱 교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이라는 점이 인권위의 특징"이라며, "비(非)공무원 출신이 줄어든 인권위는 인권위답지 않은 조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출신으로만 채워진 인권위는 여느 행정부처와 다름 없는, 인권 감수성이 무딘 조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같은 공무원 신분이므로 다른 행정부처를 견제하는 역할이 축소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번에 대기 발령이 난 이 모 씨는 10여 년 경력의 일간지 기자 출신이다. 2004년 인권위 법제과장으로 임용됐고, 2006년부터 2년간 홍보협력과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인권 연구팀장을 맡았다가 올해 4월 조직 축소로 부서가 없어지면서 다시 홍보협력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새로 맡은 홍보 업무가 종전 업무인 인권 연구와 비슷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 행안부가 시정을 요구한 근거다. 그러나 이는 억지 논리다. 인권 연구팀장을 맡기 전 2년 동안 홍보 업무를 맡았다는 점, 10년 남짓 일간지 기자로 일하면서 홍보 관련 전문성을 쌓았다는 점 등이 무시됐다.
행정부 소속 인권위에서 행정부 코드 안 맞는 직원 쫓아내기
▲ ⓒ국가인권위원회 |
하지만 현병철 위원장의 시도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위원장의 국회 발언은 인권위 직원들의 불만이 끓는점을 향해 치닫게 한 계기였다. 그리고 12일 뒤 나온 인사 조치는 불만을 펄펄 끓어오르게 한 계기였다. 민감한 인사 결정이 내부 논의 없이 이뤄졌다는 점에 대해 일부 인권위 상임위원들이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불만이 폭발할 경우,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이 입수한 인권위 내부 자료 및 인권위 관계자의 반응을 중심으로 최근 상황을 정리했다.
인권위 노조 "참담함과 절망감"…현병철 "의도와 다른 오해"
위원장 발언의 파장은 컸다. 발언이 인터넷 등에 퍼진 지난달 18일, 인권위 분위기는 내내 흉흉했다. "그렇다면 정부에 부담을 주는 권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냐"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왔다. 인권위가 행정부 소속이라는 입장이 기정사실로 통하면 결국 국가권익위원회와 통합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노동조합이 나섰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인권위 지부는 지난달 23일 내놓은 성명에서 "참담함과 절망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현병철 위원장을 가리켜 "조직의 수장으로서 조직과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와 직원들의 신뢰마저 저버렸다"고 평가했다. "위원장은 인권위 독립성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입장이 무엇인지, 인권위 조직축소의 이유가 있다고 말한 배경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요구도 곁들였다. 위원장의 분명한 입장을 물은 것이다.
5일 뒤인 지난달 28일, 현 위원장이 답변서를 내놓았다. 국회에서의 발언에 대해 현 위원장은 "질문하는 의원도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인권위가 행정부에 속한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다만, 우리 위원회의 인사·예산 등에 대해서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점을 인정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형식적으로만 행정부에 소속돼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는 설명이다.
조직 축소에 대해서도 그는 "행전안전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였고, 이어서 발언을 하려했는데 발언을 할 기회가 없어서 우리 위원회의 입장을 밝힐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의 기본 입장은 행안부와 다르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위원회의 실질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정말 오해였다면, 왜 공개 해명 못하나"
그러나 이런 해명은 인권위 직원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인권위 직원들은 내부 전산망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어느 직원은 "(9월 18일 국회 발언이) 위원장의 의도와 달리, 오해됐다"는 해명에 대해 "오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만약 오해가 분명하다면, 기자 간담회나 대국민 성명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뒤따르지 않았다. 위원장 해명은 인권위 내부용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지난달 30일, 현 위원장은 행안부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인사 조치를 발표했다. 특정 직원을 겨냥한 인사 조치에 노조가 다시 들고 일어섰다.
전공노 인권위 지부는 이날 즉각 성명을 내고 인사 발령 철회를 요구했다. 노조는 이날 성명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조직개편이 있기 전 우리 위원회는 3차례 직제령을 개정한 바 있다. 이는 모두 위원회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행정안전부는 단지 이에 대해 검토의견을 제출하고 위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협의가 진행되었다"라고 밝혔다. 별정직 홍보협력과장 이 모 씨에 대한 행안부의 요구가 기존 관행을 깨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노조는 이틀 전 현 위원장이 발표한 입장에 대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금번 인사조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위원장 해명의 진정성조차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다.
내부 논의마저 생략…"안 맞는 옷, 다른 분이 입게 해야"
▲ 현병철 인권위원장. ⓒ뉴시스 |
이어 노조는 "그런데도 위원장은 사안의 중요성과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상임위원을 비롯한 위원회 내부의 논의 과정을 전면 생략한 채 이번 인사발령을 단행하였다"며 "특히 지난 4월 단행된 인사가 상임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금번 인사와 관련하여 상임위원회 차원의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원회 운영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인권위 상임위원들도 강하게 비판했다는 말이 나온다.
인권위 내부 전산망도 들끓었다. 이 무렵부터 실명으로 올라온 비판 글이 쏟아졌다. 어느 직원은 실명으로 올린 글에서 "멋지고 좋아 보여도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옷은 다른 분이 입게 하셔야지요"라고 적었다. 현병철 위원장이 국가인권위원장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유다.
인권단체, 현병철 퇴진 1인 시위
인권단체 및 학자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은 5일부터 닷새 동안 인권위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첫날인 5일에는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 소속 정태욱 교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가 점심 시간에 맞춰 시위를 했다.
이런 분위기에도, 현병철 위원장은 공개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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