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16일 북한당국을 겨냥한 논평을 냈다. 지난 6일 북한이 황강댐을 방류해서 임진강 부근에서 야영하던 한국인 6명이 사망한 사고에 관한 내용이다. 이를 놓고, 현 위원장이 이번 사고를 기회로 삼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권위가 북한에 대한 입장을 내도록 종용했던 대통령과 보수 진영의 요구에 부응할 기회라는 것. 하지만 황강댐 사태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권위원장이 무리한 논평을 냈다는 반발도 거세다.
"북한, 생명권 존중하라" 논평…권고안 대신 선택한 고육책?
현 위원장은 이날 논평에서 "이 참사와 관련하여 북한 당국이 보여준 생명권에 대한 무시와 몰이해의 태도를 준엄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현 위원장은 "북한 당국은 생명권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것에 최우선으로 존중되어야 할 인류보편의 기본준칙이라는 점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논평은 지난 14일 전원위원회에서 논의된 것이다. 당시 한 참가자가 황강댐 사태에 대해 인권위원장이 논평을 낼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권고안이 아니라 위원장 논평 형식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인권위법에 따르면, 인권위가 북한당국을 상대로 권고안은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공기관이 인권을 침해했을 경우, 인권위는 해당 기관에 대해 조사를 거쳐 권고안을 내도록 돼 있다. 그런데 북한당국에 대해 인권위가 조사할 방법은 없다. 지난 2006년 북한 주민 손명남 씨 사건이 이런 경우다. 당시 손 씨에 대한 구명 진정이 들어왔지만, 인권위는 "인권위의 조사영역에서 벗어났다"며 이를 각하했다.
"임진강 참사, 북한당국 고의성 여부는 아직 불분명"
16일 논평은 권고안이 아니므로 법적인 문제는 없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이날 논평은 "2009년 9월 6일 북한당국의 임진강 황강댐 무단 방류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 6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하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권활동가들이 우선 꼽은 문제는 '무단 방류'라는 표현이다. 사실 관계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권위가 섣불리 단정했다는 지적이다. "북한 당국이 보여준 생명권에 대한 무시와 몰이해의 태도"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이런 표현이 성립하려면, 북한 당국이 댐을 고의로 방류했다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은 관계 당국 사이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한국과 미국 정보당국에 따르면, 황강댐은 물이 가득 찬 상태에서 방류됐다. 물론 댐을 방류하면서 한국 측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있지만, "임진강 상류에 있는 북측 댐의 수위가 높아져 긴급히 방류하게 됐다"는 북한 측 해명이 꼭 틀렸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황강댐은 사력댐(중앙에는 점토로, 주변에는 자갈과 모래로 다지고 돌을 쌓아 만든 댐)이어서 물이 찼을 때 붕괴 위험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생명권' 강조한 논평, MB 발언에 맞장구?
이처럼 무리한 입장을 담은 논평을 굳이 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천주교인권위원회 조백기 활동가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북한 당국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알리바이'다. 현병철 위원장은 임명 당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을 받았었다. 보수 언론 역시 이런 주장을 일관되게 밀어 붙였다. 따라서 현 위원장은 북한 당국에 대해 한번쯤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고, 이번 사고가 그 계기였다는 해석이다.
'생명권'을 강조한 이날 논평이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과 닮았다는 점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지난 9일 한나라당 소속 국회 상임위원장단과의 오찬에서 이 대통령은 "저쪽(북한)의 생명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무시당하는 인권위, 진짜 급한 일은 국내에
다른 목소리도 나온다. 인권위의 위상 추락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지금, 인권위가 할 일은 따로 있다는 지적이다. 논평을 내도 실효를 거두기 힘든 북한 문제보다 국내 인권 문제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
인권위에 따르면, 성희롱 등 차별 행위에 대한 권고가 수용된 비율은 2004년 95.5%에서 지난해 83.3%로 떨어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인권위 기구 축소 등을 계기로 인권위 권고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로 번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인권위 내부에서도 나온다. 인권위 수장이 할 일은 대통령의 주문을 따르는 게 아니라 인권위 권고가 다시 존중받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는 목소리다.
하지만 위원장에 이어 사무총장까지 '인권 문외한'이 들어서려는 현 상황에서 이런 목소리에 얼마나 힘이 실릴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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