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쏟아내는 말이 어지럽다. 현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인권단체들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 11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선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라고 말했다. 채 보름도 안 돼서 말이 바뀐 셈.
국보법 찬성 측도, 폐지 측도 "현병철 위원장 퇴진하라"
결국 현 위원장은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는 측과 폐지를 주장하는 측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게 됐다. 서울시 재향군인회 회원 100여 명은 12일 오전 서울 중구 인권위 건물 앞에서 현 위원장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날 쏟아진 폭우도 "현병철 위원장은 사퇴하라"는 구호를 덮지 못했다.
이런 목소리는 같은 날 다른 곳에서도 나왔다. 현 위원장이 인권 문외한이라며 취임을 반대했던 인권단체들의 모임인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은 현 위원장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발언을 계기로 성명을 냈다. 공동행동은 12일 성명에서 "현병철 씨는 8월 11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밝혔다. 이어 이 단체는 현 위원장을 가리켜 "'무자격자'라는 인권단체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꿋꿋이 자리를 탐내더니, 이제는 반인권적 본색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법이 인권을 섬기게 할 책임 있는 곳이 인권위인데…"
공동행동이 이날 문제 삼은 현 위원장의 발언은 국가보안법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현 위원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떤 충돌 현장에서건 공권력이 정당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동행동은 "국가인권위원장은 무엇이 '정당한 법 집행'인지를 인권의 기준으로 따져물어야 할 자리"라고 맞받았다. 이어 공동행동은 "설령 어떤 행위가 현행법상으로는 '정당한 법 집행'이라 하더라도, 그 법의 정당성을 인권의 기준으로 엄밀히 살펴 시정과 개선을 요구해야 할 자리"라면서, "'인권'과 '준법'의 긴장 관계를 살피고 법이 인권을 섬기게 해야 할 책임을 가진 기구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공동행동은 "그럼에도 '준법'만을 강조한 현병철 씨의 발언은 '형식적 법치주의'에 사로잡힌 구시대적 법률가나 입에 올릴 만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병철 북한 인권 발언, MB 명령에 복종하는 꼴"
북한 인권 관련 발언도 도마에 올랐다. 원고지 6.5매 분량에 불과한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현 위원장의 북한 인권 관련 발언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현 위원장은 "인권위는 준국제기구이고, 북한도 국제법이 적용되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라며 "북한 인권 문제 해결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북한 인권 관련 연구·조사 활동을 한층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북한 형법이 북한 주민들에게 가하는 억압에 대해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본다"며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시키기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다양한 노력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주민이 우리 인권위에 인권 침해 사례를 진정해도 우리 인권위가 북한에서 조사를 벌이거나 북한 당국에 시정을 권고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이런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이탈 주민(탈북자)이 제3국과 한국에서 겪는 인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동행동은 "북한 인권 문제는 정치적 도구로 악용돼 온 선례에 비추어볼 때 주의 깊은 접근을 요하는 문제"라며 "이 같은 정치적 맥락과 역학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권 문외한이며 반인권적 인식을 가진 인사가 북한 주민에 대해서도 얼마나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가짜 인권 정책을 쏟아낼 것인지 심히 우려되기까지 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동행동은 "이런 발언은 취임 당시 북한 인권에 힘쓰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하는 꼴"이라며 "남한 정부의 인권침해를 은폐, 왜곡하기 위하여 북한 인권 문제를 악용해온 악습을 또 다시 이어가겠다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오락가락 행보의 결론은?…후임 사무총장에 관심 쏠려
현 위원장의 오락가락 발언의 배후에는 보수언론이 있다는 게 인권 활동가들의 판단이다. 현 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인권단체들에게 보낸 답변서가 공개된 지난 4일 이후, 보수 언론과 단체는 현 위원장을 격렬히 비난했다. "현병철 인권위원장, 청와대 인사실패 아닌가"라는 제목의 지난 6일자 <동아일보> 사설이 대표적이다. 서울재향군인회가 12일 오전 인권위 앞에서 연 규탄 대회 역시 같은 연장선 위에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현 위원장 자신이다. 인권 활동가들이 현 위원장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높아지자 현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답변서에서 인권단체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런데 보수 언론이 반발하자, 다시 입장을 바꿨다. '인권 문외한'이어서 인권 문제에 대한 소신이 없다는 비판에 스스로 힘을 실어준 셈이다.
이런 오락가락 행보의 귀결점은 어디일까. 인권위 주변에서는 후임 사무총장 인선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김칠준 사무총장이 지난 10일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인권 현장 경험이 풍부한 김 사무총장이 나간 자리에 누가 들어서는지가 향후 인권위의 정체성을 결정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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