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관심을 끈 인물은 정동영, 추미애 의원. 정몽준 의원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2002년 대선에서 투표일 하루 전 날 밤 명동 유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보고 "속도위반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정동영, 추미애도 있다"고 말했었다.
▲ 2002년 대선 유세 당시 모습. ⓒ연합뉴스 |
그러나 이후 이들 둘과 노 전 대통령은 점점 멀어져갔다. 정동영 의원은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고 통일부 장관을 지냈지만 노 전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하며 열린우리당 해체를 주장하는 등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말 껄끄러운 관계가 됐다.
분당시 민주당에 남아 있었던 추미애 의원은 '탄핵풍'에 맞아 야인의 길을 걷다 18대에야 다시 국회에 복귀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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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의원은 23일 밤 조문을 시도했으나 일부 노사모 회원 등에 막혀 조문을 하지 못했었다. 전주에 무소속 출마하며 '친노 386'과 대립각을 세웠던 터라 앙금이 여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고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24일 오전 부인과 함께 다시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정 의원은 "무슨 말이 있겠느냐"며 "있어서는 안 될 아픔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라고만 말했다. 정 의원은 조문을 마친 뒤 김원기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총리, 문재인 전 실장, 안희정 최고위원, 손학규 상임고문 등과 30분 가량 대화를 나눴으나, 정세균 대표는 상경한 터라 조우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추미애 의원도 조문했다. 추 의원은 "대통령께서 슬픔이나 분노나 절박함이나 그런 고통이 없는 곳에 가셔서 편히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먼 곳에서나마 등대지기 같은 역할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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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손학규 상임고문도 조문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그에 대해 '보따리 장수'라며 야박하게 대했었다. 손 고문은 "고인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많이 있었을 텐데 못 다 이룬 뜻을 제가 받들겠다"고 말했다.
방북했던 천정배 의원도 인천공항에서 봉하마을로 직행했고, 전날 봉하마을로 달려 온 김근태 상임고문도 조문을 마친 뒤 계속 머물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압박이 한창이던 당시 많은 민주당 인사들이 노 전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할 때 김 고문은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책임 있는 한 사람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며 반성과 사과를 한 뒤 "검찰의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치졸한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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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한광옥 고문, 정대철 고문 등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노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몰락했던 정치인들도 봉하마을을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박지원 의원의 경우 영정에 동료 의원들로부터 받은 '불구속 수사 탄원 성명서' 61장을 바쳐 주변을 숙연케 했다. 박 의원은 검찰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방문 조사하고 불구속 수사할 것을 끊임없이 주장했었다.
박 의원은 대북송금 특검과 현대 비자금 사건 등으로 인해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부분을 검찰과 법원, 구치소, 병원을 오가며 지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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