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당신이 10년 넘게 외출 못한 군인이라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당신이 10년 넘게 외출 못한 군인이라면…"

[인터뷰] <국가의 사생활> 펴낸 소설가 이응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南橘北枳)"는 말이 있다. 토양과 기후가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다른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귤나무를 예로 든 고사성어지만, 사실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 역시 다른 사회 체제로 옮겨가면, 확 달라진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체제가 마주보고 있는 한반도는 이런 고사(故事)를 현실에서 확인시켜줄 준비가 돼 있는 무대다.

마약과 성매매, 총기사고가 판치는 통일 한국

휴전선 이북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울에 내려와 살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소설가 이응준이 이런 상상을 글로 옮겼다. 그가 그려낸 모습은 끔찍한 지옥도.

"통일 정부의 999가지 실수들 가운데 최고의 흥행작은 의무 복무 기간이 10년에서 13년가량인 과거 북한의 120만 대군에 대한 서투른 처리였다. 꺼림칙하다고 서둘러 일방적인 해체 과정을 간신히 치르고 나니 엄청난 양의 재래식 무기들이 부엌 식기 분실되듯 사라졌고 120만 장정들은 당장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남으로 내려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도시 하층민이 되거나 군사 경험이 풍부한 조직폭력배가 되었다. 공권력? 수입할 수만 있다면 얼른 수입해야 했다."

이응준의 최근 작품 <국가의 사생활>(민음사 펴냄)의 한 대목이다. '2011년,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와 남한 주도 흡수통일. 그리고 5년 뒤, 서울.' 이런 배경을 둔 소설이다.

영화를 보는듯한 속도감으로 그려낸 2016년 통일한국의 수도 서울은 마약과 성매매, 총기사고가 넘쳐나는 곳이다. 북한에서 교수, 교사, 의사, 방송인 등 전문직에 종사했던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빈곤과 범죄로 내몰린다. 이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북한 출신 한국인 전체에게 전염병보다 빨리 번진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가슴에 증오를 채워왔던 이들은, 주체사상이 조롱받는 현실로 풀려나와 방향 없는 분노를 터뜨린다. 북한 사람들에 대해 편견 또는 환상만 품고 있던 남한 사람들은, 이웃이 된 북한 사람들에게 적개심과 실망을 쏟아낸다.

"'통일 이후'를 다룬 소설이 왜 없을까"

지나치게 잔인한 상상 아닐까.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작가는 잠시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통일 이후'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누구든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통일'이라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서 너무 익숙한 주제인 탓인지 정작 '통일 이후'에 대해서는 다들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본격 문학 영역에서 '통일 이후'를 다룬 소설을 한편도 보지 못했다. 이게 정상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통일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대부분 사회과학 전공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가 전공한 분야의 관점에서만, 통일과 북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통일 이후'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북한 사람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려 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다른 체제와 환경에서 자랐을 뿐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10년 넘게 군 복무한 남자가 있다. 제대하기 직전까지 한 번도 외박, 외출을 못했다. 당신이, 혹은 당신 친구가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해보라. '통일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출발해서 도착한 지점이 <국가의 사생활>이다."

지난 17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민음사 사옥에서 만난 작가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아침 일찍 잡힌 인터뷰 일정 때문이라고 한다. 피곤한 표정이 안쓰러워서 느긋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북한 사람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 볼펜을 움켜쥐게 했다. 더불어 작가의 표정에도 활기가 살아났다. 이렇게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 정리했다.

▲ 소설가 이응준. ⓒ프레시안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 모르는 우리에게 통일은 재앙

- 이응준의 이력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의 사생활>이 대단한 변신으로 읽혔을 듯하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등의 예전에 냈던 소설과 비교하면, 내용과 문체가 너무 다르다. 이런 변신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갑자기 전화를 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게다가 나는 한동안 문단을 떠났었다. (소설가 이응준은 최근까지 영화계에서 일했다. 그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Lemon Tree'는 지난해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과거에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기를 바라며 글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며 소설을 쓴다. 대표적인 경우가 민법학자인 내 아버지다. 예전 작품들은 영 재미없어 하셨는데, 이번 책은 한달음에 읽으셨다고 한다."

-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체제와 문화가 확연히 다른 북한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 내용과도 관계가 있다는 느낌이다. 통일 이후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살면서 빚어지는 비극은, 결국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닌가.

"그렇다. 이번 작품에 담은 바람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변화'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돌려 읽는 글은 변화를 낳을 수 없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전염'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도 서로 변화해 갔으면 좋겠다. 소설을 쓰는 내내 이런 꿈을 꿨다."

"필연적인 혼란 앞에서 고개 돌리지 말자"

- 소설에서 '자본주의는 못 본 척 하는 것', '자본주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2009년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늘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은 억지로 외면하거나, 보고 싶은 모양새로 왜곡해서 이해해 버린다. 여기에는 진보, 보수의 구분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게 가능할까 싶다.

반세기 이상 국가적인 염원만으로 취급됐을 뿐 진지한 연구는 부족했던 '통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섞여 지내면서 빚어질 숱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그저 외면과 왜곡으로 일관해버리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 한 뒤, 독일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런데 서독보다 훨씬 경제력이 약한 남한이 동독보다 훨씬 가난한 북한을 흡수통일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뻔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 다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비극적인 혼란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보기 싫은 것이니까 그냥 외면해버린다. 통일 이후를 다룬 소설이 없었던 것도 그래서라고 본다.

통일과 그에 따른 혼란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이게 내 질문이다.

폭력조직을 소재로 삼은 이번 소설은 온통 범죄에 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누가 죄인이고 무엇이 악(惡)인지는 그저 혼돈스럽기만 하다. 혼돈 속에 살면서도 그 혼돈 자체를 부인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자들. 나는 그들이 진짜 죄인이라고 본다.

혼란과 재앙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을 변화와 치유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인해 고통의 비등점에 서 있지 않는 자를 존경할 수 없다. 통일 이후 펼쳐질 지옥도를 묘사한 글을 썼지만, 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고통을 머금고 변화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혼란과 고통 없이 치유가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게 하는 게 내 소설의 역할이다.

나는 내 소설을 한 문장, 한 단어로 요약해보곤 한다. 이번 소설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통일이 되어 우리는 불행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나서 좋았다'."

"북한 사람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게 왜 지나친 상상력인가"

▲ <국가의 사생활>(이응준 지음,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 '너를 만나서 좋은' 이유는 우리가 변화 할 수 있다는 기대,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 게다. 그런데 이런 희망을 품고 쓴 소설치고는, 내용이 너무 끔찍하다. 조금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지나친 상상력? 전혀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나도 북한 사람들을 '만화 주인공'처럼 여겼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북한 여자 축구 경기를 본 뒤, 생각이 확 바뀌었다. 골을 넣고 즐거워하는 그들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10년을 꼬박 군대에서만 보낸 사람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라.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것 같은가. 내가 발휘한 상상력은 딱 이 정도 수준이다.

북한에서 전문직, 상류층이었던 여성이 룸살롱 접대부가 되는 게 지나친 상상일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더 이상해 보인다. 성매매, 유사 성매매 업소가 편의점보다 많은 곳이 서울이다.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그렇다. 서울 거리는 온통 안마시술소, 룸살롱 간판으로 넘쳐난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유난히 특이한 사람들일 리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내몰린 것이다. 북한에서 평범하게, 혹은 상류층으로 살던 여성들이 통일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우리라는 것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이런 상상이 왜 지나친 것인지 모르겠다."

'준비 없는 통일'의 폭발적 화학반응, 지옥도를 그린다

영화처럼 읽히는 소설 <국가의 사생활>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무대는 서울 외곽에 있는 광복빌딩이다. 북한 인민군 출신이 주축을 이루는 폭력조직 '대동강'의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김일성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전직 교수는 광복빌딩에서 허드렛일을 한다.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있던 소년은 통일과 함께 수용소 문이 열리자 무당이 됐다. 소년 무당 '장군도령'은 폭력조직 '대동강'에서 '위대한 수령'을 대신하는 정신적 구심점이다.

주로 북한 출신 여성들이 접대부로 일하는 룸살롱 '은좌'도 같은 건물에 있다. 어색하게 끼어있는 양미라는 남한 출신 접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장군도령'의 신통력이 지배하는 건물 안에서 양미는 술에 취할 때마다 '전도'를 시도한다. 룸살롱 지하에는 비밀 공간이 있는데, '대동강'이 살인과 고문을 저지르는 장소다. 피가 쏟아지고 비명이 터지는 지하실 위 룸살롱에서 통일한국 국방부 장관이 북한 출신 접대부를 끌어안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통일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장면은, 사실 낯설지가 않다. 총소리만 없을 뿐, 폭력과 성매매는 서울 거리에서 이미 넘쳐난다. 취한 표정으로 '전도'하는 양미, 그리고 욕망에 불이 붙도록 축원하는 '장군도령'도 서울에선 흔히 만날 수 있다. '준비 없는 통일'이 이런 풍경과 만나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다룬 게 <국가의 사생활>이다. 책을 펼치면 지옥도가 펼쳐지지만,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는 작가의 설명에 고개를 가로젓기는 힘들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