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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지옥의 문턱에 서 있다"

교육 전문가 한목소리 "국제중 설립, 공교육 끝장내는 길"

"자폭하거나, 어디로 증발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 9월 30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토론회에 참석한 최홍이 서울시교육위원은 무력감을 느끼는 현재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자리에 모여 있던 다른 이도 대개 같은 심정이었다. 바로 서울시교육청의 국제중학교 설립 계획 때문이다.

공정택 교육감이 지난 7월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서울시교육청은 국제중학교 설립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지난 9월, 교육과학기술부가 최종 승인을 하면서 국제중 설립은 사실상 확정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관문이 남아있다. 바로 서울시교육위원회다. 지난 달 26일 교육위원회는 서울시교육청에 여론조사를 권고했다. 그러나 교육청은 권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만 보이고 있다.

교육청의 이 같은 입장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미 경기 청심중, 부산 국제중이 있는데다 '국제중 설립을 원하는' 여론이 확인됐다는 것. 교육청은 행정 예고 과정에서 사전에 국제중 설립 계획이 시민에게 알려졌다는 점도 여론 수렴의 한 예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온 여론 조사는 한결같이 반대가 찬성보다 높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 CBS 여론 조사에서도 전국적으로 반대 41.6%, 찬성 26.5%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교육청은 학교 설립이 교육감 권한이라는 주장까지 전개하면서 강행하려는 기세다.

교육위원은 이와 별도로 오는 14일 오후 서대문구 미근동 미동초등학교에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를 열 예정이다. 그러나 이 공청회가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여론 조사 권고마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고집을 감추지 않는 시교육청이 물러서긴 쉽지 않아 보인다.

독주하는 교육청에 항의하는 뜻으로 교육사회단체들이 지난 1일부터 교육청과 교육위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재 교육전문가, 관계자의 위기 의식은 더 크다. 국제중이 실제로 설립될 경우 도미노식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국가가 교육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 국제중이 들어서게 되면 고액의 등록금은 차치하더라도 초등학교 사교육을 대폭 늘릴 것이라는 것은 교육계의 정설이다. ⓒ뉴시스

"인형극을 볼 때 관객들은 인형의 움직임만 보고 감동하거나 분노하면서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은 잊어버린다. 어둠속에서 손이 움직이면서 못된 짓을 다 하는데…."


최홍이 위원은 국제중 설립을 추진하는 정부의 의도를 '무대 뒤 보이지 않는 손'에 비유했다. 그는 "국제중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가에서 교육에 손을 떼겠다는 것을 간파해야 되지 않는가"라며 "국제중, 외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는 사람'은 살고, '없는 사람'은 주저앉게 하려는 정부의 기본 의도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2개의 국제중이 생길 경우 서울 시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국제중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최 위원은 "다른 구에서 '우리도 설립해달라'고 하면 안 들어줄 수 없게 된다"며 "이건 역사적인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중 설립이 '명문중'이 난무했던, 중학교 평준화가 이뤄지기 전 상황으로 사회가 되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최홍이 위원은 "가장 지엽적인 문제를 보더라도 영훈중, 대원중에서는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는 학교를 신설하고자 하면서 재원 조달 방법을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재원 조달 방법도 하나도 없고, 전입금도 거의 없는 재단"이라며 "이런 허술한 상태로 인가를 받고 나면 한 학생당 등록금 2000만 원까지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식적인 학부모는 아이를 사교육으로 '중무장' 시킬 것"

국제중이 들어서게 되면 고액의 등록금은 차치하더라도 초등학교 사교육을 대폭 늘릴 것이라는 것은 교육계의 정설이다. 교육청은 사교육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3단계 전형 중 마지막을 정원의 세 배수 가운데 추첨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교장 추천과 생활기록부, 면접과 토론을 거치는 1, 2단계에서 이미 사교육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범 곰TV 이사는 "국제중이 설립되면,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는 학부모들은 상식적으로 아이를 영어로 중무장시킬 것"이라며 "정원이 320명 밖에 되지 않는 두 학교를 만들면서 세 배수 추첨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1000명짜리 학교를 만드는 것과 유사한 사교육 유발 효과를 만들어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발 절차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학원 돈 많이 벌게 해주려고 했을까 할 정도로 기막히게 만들었다"며 "정책 뒤에 사교육 업자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국제중이 교육 당국의 의도대로 외국어에 유능한 국제적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 역시 전무하다. 이종태 전 청소년정책연구원장은 "국제중이라는 명칭은 마치 '특수목적중학교'인양 국민을 기만하는 이름"이라며 "결국 국제중은 교육적, 도덕성 정당성을 갖지 못하고 단지 특목고와 명문대로 가기 위한 특권적 경로라는 의미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 연구원장은 "부실한 교육 내용으로 인해 현재 국제중 1학년 학생 중 상당수가 자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국제중은 어떤 명분으로도 존속될 가능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정부는 이념이 아닌 실용이라고 얘기하면서 가장 이념적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어 거품 속,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한편, 국제중이 중학교 서열화는 물론 국제중이 한국 사회에서 과잉된 영어 사교육 현상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도 계속되고 있다.

이병민 서울대 교수는 앞서 지난 달 23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주최한 '영어 사교육 대책 1차 토론회'에서 "앞으로 만들어질 국제중이나 일반 외고는 우리 사회에 영어 거품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며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은 학교 영어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학부모들의 관심과 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병민 교수는 "이 게임에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며 "수천만 원을 들여서 아이를 영어권에 조기유학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나, 부모를 따라서 해외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아이, 코끼리 비스켓만큼 제공되는 학교 영어 교육 과정을 믿지 않고, 부모의 도움으로 모든 영어 사교육과 영어학원을 전전한 아이들만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시교육청이 교육위에 제출한 국제중 설립 동의안은 오는 14일과 15일 임시회에서 처리된다. 교육위 15명인 재적위원의 과반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이 나오면 통과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시교육위 의원 중에는 국제중 설립에 찬성하는 쪽이 반대하는 쪽보다 많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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