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실규모, 끝을 알 수 없는 금융위기. 미국정부가 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투입해도 위기를 늦출 수는 있어도 원천적 해소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속에 각국은 당면한 위기극복을 넘어서는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 강구에 고민을 집중하는 모습들이다. 신자유주의 모델을 넘어서는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한 지속가능 경제모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해법도 이런 모색 중의 하나일 것이다.
스티글리츠 해법의 핵심은 금융시스템의 안전성과 건전성을 개선하기 위해서 금융기관 임원들의 과도한 욕망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경제'를 시스템화한 신자유주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 '욕망'의 통제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논쟁은 변론으로 하자. 금융우월주의, 금융 CEO우월주의에 겸손과 상식을 가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신자유주의의 키워드인 민영화, 자율화, 탈규제 전반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지난 20여년간 시대적 트렌드로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던 '신자유주의 성역'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꾸준한 정책적 노력으로 부동산 관련 악성 부채를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10년'에서 얻은 교훈으로 최근의 '국제적 머니 게임'에 휘말려 들지 않고 신중한 행보를 한 일본이 금융위기의 와중에도 비교적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사례다.
무한경쟁의 세계경제에서 살아남는 길은 '무작정' 트렌드와 추세를 좇는 것도 아니고 중심과의 관계를 '막연하게' 돈독히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자국의 사정에 맞게 기초체력을 강화하고 안정성, 건강성, 투명성을 확보해 경쟁력을 높여나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어쩌면 유일한 생존전략이라는 상식적 테제를 다시 한 번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발표된 정부의 주택정책은 10년간 500만호 건설이라는 정책내용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듯이 물량적 공급정책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공급정책이 공급자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하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 재개발 재건축 심의기간을 대폭 단축하고 용적률을 높인 것 등은 건설업계의 오래된 민원들이라 치더라도, 수도권에서 여의도의 12.1배에 달하는 면적의 그린벨트를 해제하기로 한 것에서는 정부의 만용이랄까.
"대통령이 지시하면 우리는 한다"는 일종의 '돌쇠 기질'까지 보게 되는데, 과연 이 정책들이 최근의 세계금융위기는 물론, 우리 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진단이라도 거쳐 나온 정책들인지, 더 나아가 녹색성장을 강조한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배치되지는 않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검토나 하고 나온 정책들인지, 참으로 우려되는 바 크다.
이번 부동산 대책의 키워드는 의연히 민영화, 자유화, 탈규제다. 신자유주의적 공급확대정책을 통해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시키고 건설업계를 활성화시켜 국민이 체감하는 고용창출효과와 내수경기진작 효과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신자유주의 부동산정책에 시장이 예상대로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린데다 "버티면 푼다"는 나쁜 선례까지 계속 만들고 있는 정부에 대해 시장이 정직하게 반응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것 아닐까 싶다. 최소한 며칠은 두고 보아야 하겠으나 이번의 규제완화일변도의 공급정책에도 시장이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책기조를 근본적으로 돌아볼 마음을 먹게 될지….
신자유주의의 폐단은 그 추세와 흐름이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분출된다는데 있다. '권력의 절제'와 '욕망의 조절'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공기업선진화 방안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민영 미디어렙 도입과 각 부처의 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교과서 개편작업 등은 '절제되지 않은 권력' '조절되지 않은 욕망' '통제되지 않은 집단행동'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갈등 상황, 소모적인 분쟁상황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다문화, 다매체 시대 미디어 다양성의 핵심인 종교방송, 지역방송의 광고 취약성을 노골적으로 겨냥한 민영 미디어렙 도입을 공기업 선진화 방안으로 추진하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방송관련 정부 부처들의 발상을 신자유주의의 물신화라는 말 이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전두환 정권의 폭력통치까지 정당화하고 여·야가 협의해 만들고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지난 역사에 대해 유감표명까지 한 4.3사건을 좌익반란으로 다시 규정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에 정부부처까지 이리저리 휘둘리는 작금의 사태를 신자유주의적 이념과잉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상황은 간단명료하다. 선진 각국이 그 효용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모델이 아직도 절대적 가치로 숭배되고 있다는 것이며, 선진 각국은 이미 신자유주의 모델의 절대성을 해체한 위에 실사구시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절대성이 전사회적으로 이념과잉 양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돌려지는 시계, 개방의 세기에 쇄국을 단행하고, 탈냉전의 세기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던 역사의 오류를 또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가슴위에 손을 얹고 돌아볼 일이다. 권한이 무거운 만큼 책임이 무겁다는 점을 생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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