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려서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사제단은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시국미사'를 진행했다. 서울시내 한복판 열린 공간에서 대규모 시국미사를 연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미사는 원래 저녁 6시에 열리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음향 설비를 실은 차량의 이동을 막아서 1시간 30분 가량 늦게 시작됐다. 경찰은 이날 오후, 미사가 열리는 광장으로 향하는 서울 지하철 시청역 출구를 봉쇄했다.
"여론 제압하려 몽둥이 드는 정부, 존재 근거 물을 수밖에 없다"
사제단은 이날 미사에 앞서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전문 보기)
이날 성명에서 사제단은 최근 정부와 경찰이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을 향해 휘두른 폭력에 대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제단은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 사제단은 이렇게 밝혔다.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하여 (정부는)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국민을 속이는 정부와 보수 언론, 그들의 병든 양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꾸짖는다"
사제단은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사제단은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언론이 국민에게 저지른 죄상에 대해 지적했다. 정권에 따라 논조가 바뀌는 이들 매체에 대해 사제단은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제단은 "정론직필의 본분을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사제단은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아니냐'라는 청와대의 입장에 대한 설명이 뒤따랐다. 이런 내용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돈만 벌면 된다'는 정부의 물신 숭배가 재앙 불렀다"
이어 사제단은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돈을 벌 수 있다"라는 변명으로 모든 게 용납되는 현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또 이런 세태에 편승한 정부 정책과 정치가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사제단은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억측이 설령 옳아도, 사회 양극화 심화는 피할 수 없다"
이어 사제단은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 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이라는 게 현 정국에 대한 사제단의 진단이다.
"압수수색과 체포로 진실을 가두려는 정부,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사제단은 매일 밤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에게 지지하고 격려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런 뜻을 전하기 위해 사제단이 고른 성경 구절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복음 1장 5절)"라는 것.
이어 사제단은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한다"라고 다짐했다.
이와 함께 사제단은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제단의 성명은 이명박 대통령과 국민에게 전하는 호소로 끝난다. 내용은 이렇다.
"촛불은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서로에게 빛이 되자"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2.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의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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