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 고사 시험문제를 냈다. 이럴 때마다 깊은 반성을 한다. 가르친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럴 때마다 강변하는 마음도 생긴다. 흥, 대학 공부는 혼자하는 거라구! 아무튼 싱숭생숭하는 마음으로 시험문제를 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문제1. 제4기 영진위가 주력해야 할 한국영화산업 진흥책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350자 이내로 설득력있게 기술하시오. 20점! 요런 문제를 낼 때는 좀 가학적인 느낌이 든다. 자슥들. 쉽게 쓰기 어려울 걸, 끌끌끌. 그러면서 내친 김에 한번 더 나간다. 문제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환경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 혹은 거기서 나오는 학자들의 코멘트를 기술하고 이 작품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200자 이내로 기술하시오. 역시 20점! 이 문제를 낼 때는 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저작권 위반사례가 염려됨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수업시간에 틀었던 영화다. 그런데 30여명의 학생들 거의 대개가 애브리바디, 잤다! 아침 첫 시간 수업이어서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다큐멘터리를 싫어해서일 것이다. 우리 88만원 예비세대들에게는 <11번째 시간>같은 다큐가 제기하는 지구 생태계 문제가 가까이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취업과 생계가 더 급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낼 때는 미간에 주름살을 모으고, 요놈들 그때 다 잤지, 그러고나서 다시 챙겨들 안봤겠지, 요놈들 한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칫 이 다큐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서 시험이 끝나고나서도 안보게 되면 이건 교육의 역효과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걱정도 팔자.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다큐가 얼마나 귀중한 작품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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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시간 |
문제3과 문제4는 논란에 휩싸일 여지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3은 아프리카TV를 운영하는 나우콤의 대표가 최근 구속된 사건과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일고있는 한국영화 불매운동 논란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200자 이내로 기술하시오,였고 문제4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이름을 쓰라는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 대통령과 총리 이름, 최근에 사망한 할리우드 감독 이름, 브라질과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대통령 이름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내면서 아이들이 시험지에다 대고 짓는 불만스러운 표정들이 떠올랐다. 칫! 이런 게 다 영화수업하고 무슨 상관이람. 저 교수 저거 영화과 교수 맞아,할 애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만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골백번 얘기했었다. 영화는 영어를 배우듯 문법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을 알려고 하면 영화가 보이지만 영화만 알려고 하면 절대 영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영화바보가 되느니 차라리 영화를 하지 말라고. 러시아의 푸틴이 대통령에서 실권 총리로 슬쩍 자리를 옮기고 대통령에 자신의 측근인 알렉산더 메드베데프를 앉힌 일이 과연 우리가 사는 삶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브라질의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실바 대통령과 베네주엘라의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등이 추진하는 이른바 남미 좌파연합과 우리의 삶이 현격하게 유리돼 있는 것일까. 난 진정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과 그 사람들로 인해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학기말 고사로 아이들에게 만만치 않은 반발을 살 가능성은 높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언제 그 많은 걸 가르쳐 줬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학점이 공표되면 항의성 이메일과 문자가 수북히 쌓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래도 좋다. 영화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거니까.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게 옳은 길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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