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매체도 거기에 공감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보도거리여서인지 가끔 개헌론을 보도하기도 하고 특집물을 편집하기도 한다. 심심파적인 것 같은 경우도 있다.
대화문화아카데미는 여러 차례의 분과 모임을 선행한 후에 지난 5월 하순 '헌정 20년, 새로운 정부형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큰 규모의 포럼을 가졌다. <한겨레>(5.22)는 "한동안 잠잠했던 개헌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자리를 펼쳤다… 대화문화아카데미는 노무현 정부 후반기 개헌 논의의 한 진앙지었다"라고 약간 차가운 듯한 시각으로 보도하였다.
그 모임에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들어보니 미리 합의한 것은 없는 듯 발표자마다 각양각색이고 토론자들도 중구난방이다.
A 교수는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통령과 국회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것을 제안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 운운하고 불쑥 나온 것과 같다. 그리고 부통령제를 신설하여 정부후보가 연계출마(running mate)하게 하자는 것이며 그럴 때 총리제는 폐지하게 된다. 개헌사항은 아니지만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있어서 비례대표 증대, 중선거구 도입, 권역별 비례대표제 시행도 내놓았다.
B 교수는 완전한 의원내각제로 개헌하여야 좋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의 대통령제의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중앙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지방자치의 광역화를 통하여 지방정부를 강화시키는 방안, 혼합정부제(이원정부제)를 채택하는 방안, 의원정부제(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방안이 있는데 의원내각제로 하는 것이 한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대적인 우위를 가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C 교수는 대통령중심제인 현행 헌법은 건드리지 않고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으로 예컨대 국회 원내교섭단체의 인원 수의 하한선이 20석인 것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높은 선이니 15석 또는 10석쯤으로 낮추고, 국회의원 비례대표 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하였다.
토론에서 주목되었던 것은 한 중견 정치학 교수가 이른바 87 헌정체제 이후 우리 정치가 오히려 발전해왔다며 새로운 체제가 필요치 않다고 한 것이다. 그는 내각제로 바꾼다고 해서 개선될 게 없다고 했다.
또한 통합민주당의 한 다선 의원은 현재의 정치수준에서 내각제가 되면 인구에 있어서 영남이 압도적이기에 한나라당 체제가 고착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색다른 시각 같다.
그 자리에서 필자가 밝힌 견해를 자료를 추가하여 전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지금 개헌을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현재의 제도가 불만인 채로 그럭저럭 참고 지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꼭 굳이 개헌을 하겠다면 대통령 4년 중임에 선거 시기를 일치시키는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이 지금으로선 그런대로 많은 지지를 받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5년 단임제와 4년 중임제를 비교해서 생각해본다면 모두가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어서 꼭 어느 쪽이 아주 좋다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7년 단임의 전두환, 그리고 5년 단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등에 국민은 흡족해하고 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만이 많았다. 그래도 5년 단임이기에 4년 중임의 8년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8년이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감각일 것이다.
내각제로 하여도 외국의 좋은 예에 따라 조각 후 2년 안에는 불신임을 못하도록 규정하자는 것이 헌법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내각제가 되어도 정권(총리)은 2년 이상 유지될 것이다. 제2공화국 1년 미만의 경험밖에 없어 말하기 어렵지만 주먹구구의 짐작으로는 2, 3년짜리도 있겠지만 길면 4년쯤 갈 정권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한다.(극단으로는 싱가포르의 경우처럼 아주 부자가 잇따라 하는 준독재적인 장기집권도 있다.) 만약에 길어서 4년쯤 간다면 현행의 익숙해진 제도를 굳이 바꾸어 생소한 내각제로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통령제 약 60년의 헌정 경험은 섣불리 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관행의 중요성에 비추어 본다면 바꾼
다 해도 조금씩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제도개혁의 지혜이다.
개헌 논의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18대 국회의 의석분포다. 보수세력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개혁세력은 3분의 1 미달이다. 즉 개헌저지선이 무너진 '정치적인 중대사태'인 것이다.
아직은 개헌 논의에서 크게 부각 안 되어 있고 4년 중임이냐 내각제냐에 파묻혀 바닥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개헌이라는 거센 움직임인 것이다.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부문별 선행 토론에서도 그 논쟁이 이미 있었다. 약간 격렬했다고 하겠다. 문제는 헌법 제119조 2항이다. 그것을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 조항이 없어지면 이미 있는 많은 법령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미국의 뉴딜정책 때처럼 국민복지를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입법을 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이라는 평판인 헌법재판소가 잇달아 위헌결정을 내릴 것이다. 거기에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성립되면 이른바 국가소송제가 발동되어 미국식이 아닌 제도는 그 존립이 크게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이 협정(한미FTA)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경제의 미래 행로를 영·미형으로 제한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다른 모델을 택하고 싶어도 투자자-국가 제소라는 무서운 장치가 들어와 있어 우리 경제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될 것입니다"(이정우 경북대 교수의 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프레시안북 펴냄)에서 인용)
전문가들이 한 번 세밀분석을 해볼 일이다. 앞질러 말하는 것이 되겠는데 4년 연임제냐, 내각제냐에 정신이 팔려 얼떨결에 개헌 논의에 올라타다 보면 결국은 헌법 제119조 2항 폐지운동의 길라잡이가 되고 말 것이란 육감이다. 전혀 본의 아니게 말이다. 헌법 제119조 2항은 이렇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1987년 개정헌법)
'경제의 민주화' 조항이라 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제2차대전 후의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공세가 있어 왔다. 좌승희 박사와 민경국 교수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강원대학의 민경국 교수는 지난 6월에 '경제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방향'을 발표했는데 <동아일보>(6.5)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교수는 '경제선진화를 위한 헌법은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헌법, 즉 시장경제를 보호하는 자유 헌법'이라고 규정했다. 민 교수는 오늘날 경제불안의 원인으로 '국가가 무제한적으로 시장에 간섭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헌법을 꼽았다. 그는… 제119조 2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한국 헌법은 복지국가의 환상에 젖어 있어 시혜성 복지를 막기 위해선 최소의 보장만 명문화해야 한다'며 '이익단체에 정치가 흔들리고 다수결 논리에 따라 일관성 없는 정책이 나오는 등 민주주의의 부정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좌승희 박사는 전경련 산하의 경제연구원 원장 때부터 제119조 2항 삭제를 주장해 왔는데 그의 견해는 <동아일보>(5.31)에 잘 나타나 있다.
"좌 원장은 '차별‧선택‧복제(증폭)의 과정을 거쳐 경제가 발전한다'는 '복잡계 경제발전원리'를 내세웠다. '발전은 성공하는 주체에게 더 많은 인기와 부‧명예를 안겨줘 차등과 차별을 만드는 과정'이란 설명이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의 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선진경제 도약을 위한 해법으로 '차별화를 통한 무한경쟁'을 제시했다. 그는 '중소기업‧농민‧근로자‧지방‧지방대학‧낙후지역 혹은 약자라야 대접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홀로 서서 성공하는 사람을 더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 대안으로 △ 수도권 규제 철폐 △ 평준화 교육 탈피 △ 대기업 역차별 및 중소기업 우대 금지 등을 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신자유주의 미국 모델로, 그것도 그 극단으로 가자는 이야기이다. 제119조 2항을 입안한 당시의 헌법개정위원이었던 김종인 박사는 그 입법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국회보 2005년 12월호 '개헌…제119조②항, 헌재, 편집권 독립')
"한국 경제는 1962년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이룩하였다. 압축성장은 자유시장경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의 효율만을 강조하여 일부 대기업집단에 자원을 인위적으로 집중 배분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벌그룹이라는 거대 경제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에 압도적으로 열세이다. 하지만 경제세력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고 이로써 정치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세력이 사회조화를 위하여 경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경제세력은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이 경우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경제세력은 언론, 법률가 등을 총동원하여 헌법소원이라는 방식으로 정치세력의 의도를 무산시키려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 결과는 정치세력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사회조화는 이룩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법제화하였을 때 미국의 각종 이익집단이 위헌을 제기하고 이를 대심원(대법원)이 수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헌법 제119조 ②항은 이러한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다."
김종인 박사와 비슷한 논리를 조순 전 경제부총리에게 들을 수 있다. <경향신문>(6.14)을 보면 조순 박사는 'MB 정부의 대외경제정책' 세미나 기조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모두 타결되면 (우리나라는) 엄청난 부자유에 묶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식의 경제모델은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신자유주의는 이미 정책으로서의 타당성을 잃었다고 평가한 조 교수는 '한국이 새삼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모델을 그대로 들여올 경우 한국 경제는 그 하중에 눌려 견디지 못할 것이고 사회는 끊임없는 내부 파열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측의 주장은 학문적으로도 케인즈파니 하이에크파니 하고 오래 전부터 대립해 온 것이고 또한 앵글로아메리칸 모델이냐 북유럽 모델이냐, 하고 모델 논쟁을 해오던 터다. 다만 문제는 한국의 '여기·지금'에 어느 이론, 어느 모델이 적합하냐 하는 것이다.
마침 숭실대 서병훈 교수가 쓴 글이 공감이 간다.(<동아일보> 6.16)
"서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맹종하며 경제에 도움이 되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는 천박한 속물근성은 프래그머티즘과 다르다'며 '실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원칙을 무시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을 속물주의의 제단에 몰아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헌법은 여야나 국민 모두가 합의해야 하는, 말하자면 경기 규칙 같은 것이기에 개헌은 여야 합의(타협)에 의해 하는 것이 순리이다. 국민의 공감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완전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충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개헌 저지선이 무너진 지금 개헌선을 넉넉히 확보한 보수진영이 여론의 개헌논의에 편승하여 혹시라도, 혹시라도 신자유주의적 개헌이란 어리석음을 감행할까 우려되는 것이다. 기우일까.
물론 그럴 때 이번 미국 쇠고기 문제 촛불데모가 보여주는 것처럼 국민의 저항이 거셀 것은 뻔하다. 선거제도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지만 국회 의석의 분포와 국민성향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번 촛불데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다. 그 평가는 다른 곳으로 미루고 한 가지만 말한다면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에서도 자발적으로 몇 만 명이 모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날에 정당들이 세 과시용 유세에 군중을 동원할 때에 여당의 경우는 점심값과 왕복 여비조로 1인당 1만 원 이상(요즘 같으면 2만 원 이상)을 썼다는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야당의 경우도 엄청난 돈을 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돈으로의 동원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에 신자유주의적인 개헌을 강행하려 한다면 이번 촛불데모와 유사한 호헌 투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마치 일본에서 헌법 제9조 전쟁관련 조항 개정을 둘러싸고 개헌과 호헌의 실랑이가 줄기차게 계속되어 오는 것과 어떤 면 유사하게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