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씨가 마르게 됐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학자로 꼽히는 김수행 교수가 올해 2월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정년퇴임 하면서, 이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가 아예 사라졌다. 그래서 대학원생과 연구자들, 관련 학자들은 서울대 측이 김 교수의 후임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뽑도록 올해 초부터 계속 요구해 왔다.
서울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 사실상 거부
하지만, 지난 6월 11일 열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회의는 2학기 신임교수 채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올해 3월, 서울대 측은 '경제학 일반(정치경제학 포함) 2명'이라는 신규 교수 채용공고를 냈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흔히 정치경제학으로 분류된다. 공고대로라면, 서울대 측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채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중진 학자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서울대 경제학부 학부장인 이영훈 교수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개채용에 지원한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여러 측면에서 채용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채용이 무산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다음 학기에도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선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대학원생들 "논문지도, 누구에게서 받나?"
채용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지원자들의 학문적 성취도가 매우 높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외국 유명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된 실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현재 서울대 경제학부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조차도 상당수가 그 기준에 미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게다가 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논문이 게재될 수 있는 학술지의 수가 매우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 지원한 학자들의 연구업적은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보다 처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가장 큰 충격에 빠진 것은 대학원생들이다. 이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은 학위 논문을 지도할 교수를 찾을 수 없게 된 셈이기 때문. 오랫동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대학원생들이 학위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해졌다.
"다시 지하에서 공부해야 하나?"
올해 초부터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 운동을 주도했던 한 대학원생은 "다시 지하(地下)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는 학문이 제도권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단지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용'에만 치우쳐, '비판'과 '성찰'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상황은 거의 모든 대학에서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이 대학에 마르크스 경제학이 정규 교과목으로 개설된 것은 20년 전이다. 당시 대학가에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사회과학 공부 모임이 흔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의 커리큘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필수 과목에 가까웠다. 많은 학생이 강의실 안에서 이뤄지는 배움보다, 강의식 밖에서 얻는 지식에 더 힘을 쏟았다. 그래서 강의실 안과 밖 사이의 괴리에 답답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결국 지난 1988년,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며, 일 년 동안 탄원, 시위 등을 벌였다. 수업 거부 운동도 일어났다. 주류 경제학 전공자로 메워져 있던 서울대 경제학과에 김수행 교수가 채용된 것은 이런 집단행동의 결과였다.
앞서 대학원생이 입에 올린 '지하'라는 말은 결국 '20년 전'의 상황을 뜻하는 셈이다. 당시처럼, 마르크스 경제학은 강의실 바깥의 학문으로 남게 됐다는 이야기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독서토론 모임을 통해서만 전수될 수 있는 학문이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주류 경제학자들의 적대감, 20년 전과 변한 게 없다"
이런 답답함은 대학원생들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으로 다시 이어졌다. 17일 오전, 이 대학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마르크스 경제학 후임 교수 채용무산에 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재했다. (☞ 대자보 전문 보기)
대학원생들은 이 대학 당국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를 뽑지 않기로 한 이유를 "신임교수 임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주류경제학 전공 교수들의 대부분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에 적대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오해 및 무지가 원인이라는 뜻이다. 교수 사회가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20년 전과 지금이 다를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학원생들은 "2008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이 김수행 교수가 채용되었던 1988년에 비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결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주류경제학의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태도는 변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변한 것은 '실천적 지식인'의 수일 뿐"
교수 사회는 변한 게 없는데, 20년 전에는 왜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가 채용될 수 있었을까? 대학원생들이 내놓은 대답은 '힘'이다. 그들의 설명은 이렇다.
"마르크스 경제학 후임 교수의 채용을 요구한 대학원생들은 학문의 균형과 비판정신의 복원을 위해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류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방법론 이외에 다른 경제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서로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결국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20년 전 김수행 교수의 채용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힘의 논리에서 우세를 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원생들의 반 이상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마르크스경제학이 갖는 의미를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이해했고, 지식인의 학문과 실천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다시 마르크스를 부른다"
학문과 실천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지식인의 수가 줄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20년 전을 닮아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오히려 더 심해졌. 대자보를 작성한 대학원생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제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전공교수를 갖지 못했던 20년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서울대 경제학부가 전공 교수를 뽑지 않았다고 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사라질 리는 없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근로인민들을 갈수록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주류경제학이 제공하는 설명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제학도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마르크스 경제학으로부터 답을 구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은 극악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질식되고 있던 대학 사회까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전파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1987년을 닮아가고 있다. 미친 쇠고기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제 민영화와 대운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고 있으며, 더 이상 노동자들의 파업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고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 '무기의 비판'으로 되살아날 것"
광우병 위험 쇠고기를 수입하려는 정부에 분노한 시민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더 이상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강의실 밖으로 쫓겨난 마르크스 경제학에 다시 힘을 불어넣고 있다. 대자보는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비판의 무기로서 이론은 그 자체로는 힘을 가질 수 없지만, 대중의 이해와 지지를 얻은 이론은 현실적인 힘을 갖는다. 대중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마르크스 경제학은 비판의 무기가 아닌 무기의 비판으로서 조만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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