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귀가 고장났다"는 <조선일보>
광우병 촛불 집회가 격화되면서 <조선일보>에 대통령, 청와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기사가 부쩍 늘었다. 지난 6일자만 하더라도 강천석 논설위원이 쓴 '청와대 담장에 큰 귀(耳)를 달아라'는 칼럼이 실렸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통령의 귀(耳), 정권의 귀에 큰 고장이 난 것이다. (…) 국민의 소리가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담장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단 말인가. (…) 대통령을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 대통령의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 사적(私的) 감정, 무지(無知)까지 숭배하는 데까지 나가버리면 나라에 큰 탈이 나고 만다."
강천석 논설위원의 말이다.
대통령 '귀'만 문제인가, 조선일보의 '입'은?
의문이 생긴다. <조선일보>가 걱정하듯이 국민의 소리가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담장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이유는 뭘까?
사실 짧게는 지난 2월 25일 대통령의 취임 이후, 길게는 대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조선일보>의 입맛에 맞는 일만 해왔다.
한미동맹 강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중단, 영어 몰입 교육 도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철을 위한 쇠고기 협상 양보, 친(親)재벌 경제 정책, 국민건강보험 민영화, 광우병에 대한 국민 우려를 인터넷 '괴담'으로 치부하기 등 이명박 정부가 <조선일보>의 '코드'에 맞춰 추진한 정책은 끝이 없다. 대통령, 청와대, 내각, 한나라당은 <조선일보>가 쏟아낸 논리에 충실하고 또 충실하게 지난 100일을 보낸 것이다.
대통령의 귀는 고장 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열심히 '조·중·동', 특히 그 맏형인 <조선일보>가 주장해온 말에 따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통령의 귀가 문제라니?
"북한 문제에 설득, 대화, 신뢰 말아야"
"우리는 이명박 시대에도 계속 북한 당국과 친북 세력에 이끌려 다녀야 한다는 것인지 한숨이 나온다. 이 당선자는 알아야 한다. 북한의 제스처에 속지 말고 단호히 대응하는 것이 진정 북한을 돕고 화해를 이끌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에 앞선 십 수 년 모든 남쪽의 지도자들이 북한문제에 항상 설득·대화·신뢰를 내세워 유화적인 척했으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다."
지난 1월 14일자에 실린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글이다. 취임 100일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 고문의 '입'을 좇아, 북한을 설득하고, 북한과 대화하며, 북한을 신뢰하는 유화적인 정책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반도 정세는 물론 동북아 관계에서조차 한국 정부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고 국익은 손상되었다.
"영어 몰입 교육은 가수 박진영의 길로"
"언어 문화의 전문가도 아닌 가수 신해철 씨는 인수위가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비아냥조로 미국의 '51개주(州)' 운운하며 정책을 비판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외국어를 배운다고 그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다. 영어가 필요 없는 사람까지 '강제적'으로, 또 '몰입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과외의 비용에 견주어 가장 효율적이며 실용적인 것이 언어, 특히 영어에 대한 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같은 신문 2월 11일자에 실린 김대중 고문의 글이다. 그는 영어몰입 교육을 둘러싼 갈등을 "신해철로 갈 것인가, '박진영'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로 몰아갔다. 박진영은 이명박 대통령이 각종 자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가수다.
"20 대 80의 사회는 허구"
"대한상의 조사에 따르면 코스피 200대 기업의 절반이 경영권 공격에 아무 대책이 없다고 한다. 하이에나들이 설치는 정글에 우리의 알짜배기 기업들이 무방비로 풀을 뜯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할 정글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것이지 '20%가 80%를 착취한다'는 허구의 정글이 아니다."
박정훈 <조선일보> 경제부장이 지난해 11월 22일자에 쓴 글이다. 국민들 대다수가 피부로 느끼는 '20대 80의 사회'는 허구이고,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쪽은 대기업이기에 각종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100일 동안 대기업이 반대해온 규제정책을 푸는 데 정말 열심이었다.
"의료 산업, 의료 보험에 대한 규제를 풀어라"
"20대 80의 사회'가 이 시대를 풍미하는 경제정책의 핵심 이데올로기라면 '80대 20의 원칙'은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미래 경제정책의 핵심 원리가 되어야 한다. 교육 기회조차 가지기 어려운 20%에게 공교육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자. 나머지 80%에서는 개인 및 학교의 차별화와 다양성을 인정하자. (…) 병원 근처에 가지 못하는 20%를 위해 공적인 의료체계를 확립하자. 그러나 나머지 80%를 위해 그리고 의료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료산업, 의료보험에 대한 규제를 과감하게 완화하고 대외 개방을 추진하자. (…) 20%를 위해 공공 주거시설을 확실하게 보급하자. 그러나 나머지 80%는 그들만의 리그를 갖게 하자. 이를 통해 주택 건설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그들이 원하는 다양하고 차별화된 주택에 살 수 있도록 하자."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가 <조선일보> 4월 6일자에 실은 글이다. 공교육의 축소, 병원의 산업화, 건설 규제 완화 등은 취임 이후 100일 동안, 아니 인수위 시절부터 지난 6개월 동안 이명박 정부가 열심히 추진했던 정책들과 기조가 일치한다.
"큰 정부 주창자들은 또 세출을 증대해야만 건강보험을 확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비대한 건보(健保) 조직을 법제화해서 건보 수요자들을 오히려 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 '작은 정부, 큰 시장(市場)'이 선진화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아주 중요한 한 축(軸)임에는 틀림없다. '이명박 정부'가 선진화의 한 요건을 자유시장주의의 확대에서 찾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같은 '비대한 국가' '과부하(過負荷) 국가' '국가 통제주의'는 불가피하게 혁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월 22일자에 류근일 씨가 쓴 글이다. 이명박 정부는 의료산업화를 내세우며 영리병원을 도입하고 국민건강보험 환자를 받지 않는 병원을 허용하며, 재벌이 장악한 사보험회사로 하여금 국민건강보험과 경쟁시킨다는 '의료 선진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국민 정서와 정치 논리에 굴복하지 말라"
"최근까지도 이자율 상한제, 분양가 규제, 아파트 원가공개와 같은 불량규제들이 계속 도입되고 있다. (…) 지역균형발전, 투기억제, 재벌규제, 환경보호, 비정규직 해소를 위한 규제는 목적이 정당하므로 무슨 수단이든지 정당화된다는 단순논리로 규제 수단과 내용의 적정성을 따지지 않고 마구 도입되고 있다. 국민정서나 정치논리, 이익단체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규제개혁 원칙에 어긋나는 불량규제의 도입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여론의 역풍 속에서도 '이건 아니오'라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해 3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종석 홍익대 교수의 주장이다. 국민 정서와 정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것은 물론 이명박 정부가 지난 100일 동안 확고하게 견지했던 입장이다.
"돌아가자! 주류 경제학으로"
"비주류 경제학자들과 참여정부는 (…) 한결같이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장을 해 봤자 일부 자본가들, 특히 다국적 기업들만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의 대표들은 성장의 혜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성장을 해도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기 때문에 성장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분배가 개선돼야 내수가 살아나고 경기가 회복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 이제 한국 경제는 비주류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성숙하고 국제적 안목을 지닌 주류의 경제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7월 19일자에 실린 이두원 연세대 교수의 주장이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100일 동안 좌측 깜박이 등을 키고 우회전을 하던 노무현 정부의 경 제정책을 깜박이 등마저 확실히 우향우 시켜 '주류의 경제학'을 정부 경제 정책의 철학으로 확립해놓았다.
"21세기를 가로막은 민노당 강기갑 의원"
"이날 통외통위 회의를 앞두고 민노당 강기갑 의원이 전날 새벽 5시부터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결사 저지하겠다"며 회의장을 점거해 버렸다. 강 의원은 안에서 나사못과 걸쇠로 문을 잠근 채 통외통위 위원장석에 버티고 앉아 단식까지 벌였다. 원내 1, 2당이 합의한 의사일정이 민노당 의원 한 명 때문에 이틀이나 연기되고 회의장까지 바뀌는가 하면, 그렇게 정해진 임시 회의실마저 민노당 소속 의원 몇 명의 동조 무력시위로 뒷문을 찾아 돌아가야 했다. 10명도 채 되지 않는 민노당 의원들의 80년대식 투쟁이 나머지 290명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4800만 국민의 21세기 준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최경운 정치부 기사의 글이다. 최 기자는 지난 2월 14일자 기사를 통해 "290명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4800만 국민의 21세기"를 운운했다. FTA를 지지해야 "의정 활동"이고, FTA를 지지해야 "4800만 국민"이며, "21세기답다"는 주장이다.
"4800만 국민의 21세기를 가로막은" 강기갑 의원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4800만 국민의 21세기"를 확실하게 밀어붙인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물리치고 재선되었고,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재미 교포와 미국 유학생도 먹는 미국 소고기가 왜 문제냐"
"미국에서 광우병이 처음 발견된 2003년 이후 미국을 다녀온 국민이 500만 명에 달한다. 한 사람이 몇 번씩 여행한 경우를 뺀다 해도 몇 백만 명이다. 이런 엄청난 숫자가 미국에 가서 아무런 제지 없이 스테이크며 햄버거를 먹었다. 미국엔 또한 11만 명의 우리 유학생과 215만 명의 교포가 살고 있다. 미국 쇠고기가 그렇게 위험하다면 반대 진영은 왜 이들에게 경고하지 않았을까. 같은 미국 쇠고기라도 한국에선 위험하고 미국에서 먹으면 괜찮다는 말일까."
박정훈 <조선일보> 경제부장의 5월 2일자 글이다. 이날은 촛불 집회가 처음 시작된 날이다. 박정훈 부장의 이 논리는 각종 토론회에 나오는 정부 관료와 관변 학자, 어용 시민단체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강부자'의 입으로 전락한 조선일보
김영삼 정권 이후 '민주정부' 15년 동안 "할 말은 하는 신문"이었던 <조선일보>가 주장해온 정책들을 이명박 정부는 지난 100일 동안 열심히 실천해왔다. 그 결과 나라꼴은 <조선일보>까지 내각 총사퇴를 입에 떠올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이제 와서 '강부자' 인선을 문제 삼지만, 스스로야 말로 '강부자' 신문이 아닌지 겸허히 돌아봐야 할 것이다. "CEO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고소영' '강부자'면 어때, 일만 잘하면 되지"라는 분위기를 우리 사회에 퍼트린 세력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 동안 '조·중·동'의 입에만 귀 기울여온 대통령도 문제지만, <조선일보> 스스로 자신의 눈에 낀 '들보'부터 어떻게 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귀 고장을 따지기 전에 조선일보 스스로가 '강부자'의 입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귀가 고장 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아직도 "박진영의 길"을 꿈꾸나
나는 박진영보다 신해철을 좋아한다. 그의 음악에는 박진영의 음악에는 전무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 있다. 신해철이 박진영보다 영어는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와 시대를 이해하고 국민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에서는 신해철이 훨씬 앞선다.
<조선일보>는 이명박 정권의 출범에 환호하며 "박진영의 길"을 꿈꿨겠지만, 국민들은 촛불 집회를 통해 "신해철의 길"을 가고 있다. 이제 <조선일보>도 우리가 언제 '박진영'을 지지했냐며 슬며시 '신해철'로 방향을 틀고 있다.
"어떤 합의를 하고 와도 우리는 그가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유화 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두고서 김대중 고문이 2007년 9월 21일자에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조선일보>가 '강부자'의 입으로라도 살아남기 바란다면,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과 정신 나간 협상을 하고 온 이명박 정부에게도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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