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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물신주의 국민정서, 재벌 범죄 공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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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물신주의 국민정서, 재벌 범죄 공범"

사제단ㆍ김용철 "삼성일가 범죄와 끝까지 싸우겠다"

"어, 빈자리가 있네."

시곗바늘이 23일 오후 3시를 가리키기 직전, 서울 제기동 성당 지하 강당에 도착한 한 기자는 깜짝 놀랐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이 주최한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바짝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왜 항상 이렇게 비좁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하느냐"라는 불만이 쏟아지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사제단 기자회견장이 비좁지 않았다.

침통한 표정의 사제단 신부들

시곗바늘이 3시를 지나자, 사제단 소속 전종훈 신부가 '삼성특검과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에 대한 사제단의 입장'이라는 발표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성서 구절이 맨 앞에 나왔다. 이 대목을 읽어가는 전 신부의 표정 역시 진통으로 떨리는 듯했다.

발표문 내용은 새로울 게 없었다. 삼성 비리 의혹을 수사했던 조준웅 특별검사가 삼성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주요 의혹에 대해 대부분 무혐의 처리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삼성은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 거듭날 기회를 잃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전 신부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김인국 신부 역시 "참여연대, 경제개혁연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앞서 발표한 성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말했다.
- 삼성 특검 결과 및 쇄신안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성명 모음

특검 수사 평가서1 (삼성 이건희 불법규명 국민행동)
특검 수사 평가서2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소속 법학 교수들)

삼성 쇄신안 평가1(경제개혁연대)
삼성 쇄신안 평가2(참여연대)
삼성 쇄신안 평가3(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소속 법학 교수들)
삼성 쇄신안 평가4(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 모임)

"언론의 왜곡과 지식인의 침묵이 증언자를 절망케 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을 연거푸 발표한다고 해서, 절망감의 무게까지 덜어지지는 않는 듯했다. 전 신부는 발표문을 읽는 사이사이마다, 한 번씩 숨을 고르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에서다.

"일부 언론의 왜곡과 많은 지식인의 침묵과 냉소는 용기 있는 증언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경제민주주의가 지연되고 있는 배후에는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또 경제라는 이름의 물신을 위해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오늘의 국민정서 또한 재벌의 범죄를 방관하거나 관대하게 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범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 기자회견에 앞서 참가자들이 짧은 기도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삼성은 약속을 지킨 적이 별로 없다"

이날 회견에는 김용철 변호사도 참가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대국민 약속을 지킨 적은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하루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이 발표한 쇄신안을 가리킨 말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일보와 계열분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사제단, 그리고 양식 있는 시민들과 함께 계속 싸워가겠다"라고 말했다. 특검의 면죄부에도 불구하고, 삼성 비리 의혹의 불씨는 여전하다는 뜻이다. 절망의 무게에 짓눌린 채, 숨죽여 지내지만은 않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사제단, 사흘간 단식기도 예정

실제로 사제단은 앞으로도 삼성 비리 의혹을 계속 문제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제단은 상당수 언론이 이런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으리라는 점, 따라서 지금까지보다 더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신부들에게는 "스스로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 곧 '싸움을 위한 준비'다.
▲ 보수 단체 회원들이 김용철 변호사의 사진이 담긴 피켓에 불을 지르며 시위를 벌였다.ⓒ프레시안

그래서 신부들은 오는 24일부터 사흘간 진행될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제기동 성당 앞에서는 삼성특검반대범국민연대 등 보수 단체 회원 40여 명이 김용철 변호사의 사진이 담긴 피켓에 불을 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성당 주변에 배치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성난 목소리로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줄어든 기자들 사이를 헤치고 강당을 빠져나온 김인국 신부는 성당 계단 위에서 한참 동안 그들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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