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주변에서 나오는 말을 모아 보면, 특검은 삼성 계열사의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의혹에 대해서는 거의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이학수 삼성 부회장 등이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 일부를 시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들은 비자금 및 분식회계 관련 의혹만큼은 강하게 부인했다.
이런 의혹이 밝혀지는 순간, 이건희 삼성 회장의 구속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검 역시 삼성이 차명으로 관리한 수조 원 가량의 자금이 이병철 선대 회장의 유산이라는 쪽으로 입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이 삼성 측 논리를 고분고분 따르는 모양새다.
"나는 삼성의 비자금 모집책이었다"
그런데 삼성 계열사가 정말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수사기관을 통해 밝혀진 내용은 없지만, 의혹과 정황 증거 및 관련자의 증언은 무성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삼성 SDI(당시 삼성전관)에서 해외비자금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강부찬 씨다. 지난해 11월, <시사IN>은 강 씨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당시 강 씨가 밝힌 내용은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김 변호사는 <시사IN> 인터뷰에서 강 씨에 대해 "미국에서 비자금을 만들던 친구가 비자금 서류를 들고 나가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았다.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방법을 냈지만, 해결이 안 됐다. 미국에서 사립탐정을 고용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실효가 적었다. 김인주 사장이 나한테 킬러를 고용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강 씨를 여러 번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 씨는 한때 대구에서 작은 사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강 씨는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으며,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과 연락이 끊긴 상태다.
김용철 "삼성SDI가 장비 구매 계약하면서 거래액을 크게 부풀렸다"
지난해 11월, 김용철 변호사는 강부찬 씨가 서명한 장비구매관련 합의서(메모랜덤)를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그는 "구조본이 지시하면 계열사들은 그에 따라 비자금을 갹출했다"며 "삼성물산의 해외법인과 삼성전관(현 삼성 SDI)이 장비 구매계약을 하면서 거래액을 실제보다 15~19% 가량 부풀리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변호사는 "삼성은 비자금을 '샘플비'라고 부른다"라는 증언도 내놓았다.
하지만 특검은 이에 대해 수사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지난 7일 특검 기자실을 찾아 "예를 들어 삼성 SDI 구매담당자가 작성한 메모랜덤 있지 않나. 그 부분은 해외와 관련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해외 수사 공조될 수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김 변호사의 이런 주장에 대해 삼성 측은 "당시 서류에 서명한 것으로 돼 있는 전·현직 임원들에게 물어봐도 '비자금 조성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며 반박했다. 이어 삼성 측은 " 장비 도입 관련 해외 거래에서 삼성물산에 수수료와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제경비(샘플 제작비, 장비 설치가 완료될 때까지 소요되는 금융비용 등)를 포함시켜 지급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샘플비의 정체는?
그래서 <프레시안>은 김 변호사가 공개한 메모랜덤의 관련 서류 여러 건을 입수해 검토했다. 실제로 "샘플비"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띄었다.
삼성전관(현 삼성SDI) 서 모 부장이 삼성물산 영국 법인에 1994년 5월 2일 보낸 "REGARDIING BIZ. ROUTE FOR EUROPE'S MACHINARIES"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자. "前例(전례)"를 따른다고 돼 있는 샘플비가 이윤의 95%, 거래금액의 15.8% 가량을 차지한다. "이렇게 샘플비로 지급된 금액이 되돌아와 비자금으로 쓰였다"는 게 강부찬 씨의 주장이다. 김 변호사 역시 삼성 구조본 근무 경험을 통해 강 씨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
현지에서 쓰는 경비라던 샘플비, "반송"하는 이유는?
그리고 다음날인 1994년 5월 3일, 삼성전관 서 부장이 받은 회신 문서를 보자. "1. 기본안 및 예시대로 집행하는 데 문제 없음. 2. 예시에 나와있는 대로 물산COMM을 "1"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에는 "100(원가), 20(PROF)"이라는 내용이 있고, "100 (원가), 19 (샘플비 반송), 1(은행수수료 포함 총수수료)"라는 내용이 옆에 기재돼 있다.
"샘플비 반송"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삼성 측 주장대로, 샘플비가 샘플제작비 등이 포함된 제 경비라면 굳이 "반송"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현지에서 쓰고 남은 금액을 반송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애매하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삼성 측 주장대로라면 샘플비는 일종의 비용이다. 그런데 샘플비가 원가가 아닌 이익(PROF)에 포함돼 있는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 회계사에게 문의한 결과, " 흔히 '샘플비'라 부르는 것, 즉 샘플제작비 등 비용은 통상적으로 원가에 포함한다. 이익 대부분을 다시 비용으로 반송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라는 대답을 얻었다. 일반적인 거래 및 회계 관행에 비춰보면,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검찰, 특검 수사 이어받아 비자금 의혹 규명해야"
하지만 "삼성 특검의 수사를 통해 이런 궁금증이 해소될 가능성은 없다"라는 게 특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의견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특검이 모든 의혹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보다, 차라리 검찰에 수사를 넘겨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설령 특검이 삼성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린다 해도, 같은 의혹으로 삼성을 고발하는 이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언론 보도와 증언을 통해 소개된 비자금 조성 정황이 매우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며, 수사 결과의 허점을 지적하는 이들이 계속 등장하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검찰에게 수사 기회가 돌아간다.
그리고 이는 검찰에게 훌륭한 기회다. 지난해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양심적인 검사들까지 그렇지 않은 일부 검사들과 함께 이른바 "떡값 검사"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특검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의혹을 제대로 파헤치는 검사가 나오는 순간, 이들에게 씌워진 "떡값 검사"의 오명은 씻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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