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따로 논다. 적어도 극장가를 보면 그렇다. 대형 극장들에서는 몸짱 청춘스타들의 반 알몸 광고를 내세운 <숙명>에서부터 온 세상 춤바람을 권하는 <스탭업2>같은 영화나 발음도 이상한 <10,000 BC>라는 영화(기원전 1만년이거나 비씨 만년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만 비씨라고 부른다)들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흔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 영화말고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올라있는 작품으로는 <밴티지 포인트>니 <어메이징 그레이스>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니 등등 여럿이 있지만 솔직히 하강세를 보이고 있는 <추격자>를 제외하고는 도토리 키재기, 다들 고만고만한 작품이다. <추격자>는 개봉 6주가 넘었으니 이제 서서히 관심이 약해질 때도 됐다. 그래도 그동안 <추격자>라도 있었으니 그런 대로 극장가가 버텨왔다는 생각이 든다. 극장에 가기 전에 프로그램들을 찾아 보면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볼 영화가 없다. 사람들이 물어 본다. "<숙명> 어때요?" 예전 같으면 우물우물 얼버무렸을텐데 요즘은 뻔뻔해지기도 해서인지 "안봐서 모르겠어요"라고 말해 버린다. 아니면 "젊은 친구들한테 물어보시지"라고 말하거나. 김해곤 감독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난 아직도 김해곤 감독 같은 얘기꾼, 재담꾼, 재주꾼이 왜 육질 즙만이 질펀한 '애들 조폭영화'를 찍었는지 모르겠다. 장현수 감독의 <라이방>이나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같은 영화에 나온 김해곤을 보고 그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같은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숙명>류의 영화를 찍을지는 몰랐다. 김해곤 감독에 대한 '약간의' 실망을 보상받으려면 멀티플렉스 내의 독립영화전용관이나 아예 '시네큐브'같은 곳을 가면 된다. 거기엔 보물이 그득하다. 줄리앙 슈나벨의 <잠수종과 나비>가 있고 크리스티앙 문쥬의 <4개월 3주..그리고 2일>이 있으며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있는 가 하면 홍상수의 <밤과 낮>이 있고 (홍상수는 여덟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속 남자 캐릭터를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 일관성에 경의를 표하게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홍상수는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운데 왜 그리도 자기 안의 세계에만 갇혀 있을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게 어딘가?) 스티브 부세미의 <인터뷰>가 있다. 이 영화들과 하나하나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은 요즘 같은 세상살이에서 진정으로 꽤나 행복한 일에 속한다. 그러니 세상사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저쪽 <10,000 BC>의 세상과 이쪽 <밴드 비지트>의 세상은 왜 이렇게 다른가. 저쪽 <숙명>이 생각하는 세상과 이쪽 <라자레스쿠 씨의 죽음>으로 겪는 세상은 왜 이리도 다른가. 세상사는 정말 따로 벌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도 선택하기 나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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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비지트 |
그나마 이런 처지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르치는 부산 지역 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세상을 가고 싶어도 가지를 못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얘기를 하려고 하면 그 영화 부산에서 안해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잠수종과 나비> 얘기를 하려고 하면, 이틀 정도하고 내려버렸어요,라는 소리가 돌아 온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환경의 아이들에게 불법다운로드 받아서는 절대 영화를 보지 말라는 얘기도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에, 그런 영화들은 DVD로조차 나오지 않으니까. 400만 인구의 부산이 이럴진대 다른 도시의 영화 키드들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따로 놀고 있다. 앞으로는 같이 놀게 해야 할텐데. 최소한 영화만이라도 같이 놀 수 있게 해야 할텐데. 세상 돌아가는 거나 영화판 돌아가는 거나, 이래저래 걱정이 구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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