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인수위가 하는 일들이 마땅찮다,고 하면 어디 으슥한 곳에 끌려가서 실컷 두들겨 맞게 될까? 에이, 1980년대도 아니고 군화신은 자들이 정권을 잡은 시대도 아닌데 설마 그럴려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왤까. 이것도 일종의 '내안의 파시즘'일까. 주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기러기다. 기러기 아빠 6년차다. 어쩌다 보니까 시간이 휙 가버렸다. 따로 살고 계시는 아버님은 86세가 되셔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실 때가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해대신다. "애가 언제 온다구?"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첫인사 레퍼토리도 항상 그 수준이다. "아니 식구들은 아예 안오는 거야?" "하이고 벌써 몇 년째냐?" 그 정도면 양반이다. 이러는 사람들도 있다. "애인 생겼겠구만, 그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묘한 웃음으로 일그러져 있기 십상이다. 애인이 생기든 말든, 무슨 상관들이셔. 내가 기러기 생활하는데 보태준 거 있남. 그렇게 보태준 거 하나 없는 데가 바로 인수위다. 인수위는 요즘 뻑하면 나 같은 기러기를 걸고 넘어진다. 영어 몰입식 교육을 한다,안한다 얘기하면서 이땅에서 기러기를 없애겠다나. 펭귄마저 없애겠다고 한다. 독수리도 없어진단다. 영어로 영어교육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교과를 영어로 가르치게 되면 애들을 물밖 나라에서 학교를 보내지 않게 될까. 기러기들은 가끔 모인다. 기러기는 기러기가 알아 준다고 나도 종종 다른 기러기들과 소주집에서 곱창을 먹으며 이런저런 신세 한탄을 한다. 넌, 이번엔 얼마 보냈니?, 환율이 왜 이렇게 오르는 거야!, 아니 OECD 가입국이 왜 환율을 방어하고 난리야?!(수출업체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부담없이 노래방 같은 데 같이 놀러다닐 애인없을까?(핫 마누라가 이 얘기들으면 안될텐데) 등등 기러기들의 이야기는 끊이지를 않는다. 한명은 아이 둘과 부인을 런던으로 보냈고, 한명은 역시 두 아이와 와이프를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앞의 인간은 기러기 5년차. 나보다 1년 후배인 셈이다. 또 한명은 이제 끽해야 2년차다. 요즘에 모이면 예전과 달리 조금 건전한 이야기들도 하는데, 최근에 셋이서 합의한 것이 기러기 블로그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정했다. '세남자와 시장 바구니'. 이 블로그에는 아이를 런던 학교에 보낼 때, 혹은 샌프란시스코로 보낼 때, 아니면 나처럼 뉴욕으로 보낼 때의 노하우와 매뉴얼을 소개할 생각이다. 기러기 블로그답게 노는 얘기들도 많이 실을 예정인데 예컨대 '폭탄주 베스트 50'을 통해 사진과 함께 폭탄주 제조법을 상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이런 사람들인데, 우리가 영어교육 때문에 애들을 다른 나라에 보냈겠는가. 영어만 해결해 준다면 우리가 애들을 다시 다 불러들일 것 같은가. 뭔가 다른 이유,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땅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혹은 대학원까지) 나오면서 우리가 겪었던 것을 아이들한테 경험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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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세계 |
한재림 감독이 만든 <우아한 세계>는 어느덧 기러기들의 바이블처럼 인식되고 있다. 빤쓰바람에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애들이 보내준 홈비디오를 보는 을씨년한 풍경은 현실을 그대로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기러기들은 영화를 보면서 자주 운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눈물이 난다. 심지어 <프리덤 라이터스>같은 그냥 학교영화를 봐도 운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토니 콜레트가 아이를 학교에 들여 보내면서 교문에서 한동안 떠나지 못하는 장면만으로도 펑펑 운다. 애들 얘기이기 때문이다. 애들이 보고싶다. 최소한 애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싶다.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보고싶다. 인수위가 영어교육에 쓸 4조원을 영화만드는데 보태주면 안될까? 아무래도 으슥한 데서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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