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겐 자유가 있었는데…"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진지한 읽을거리를 담은 매체가 간혹 있었지만, 대개 '논술 대비'를 표방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창간된 <고래가 그랬어>는 달랐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 급여가 많은 직장을 얻기만을 바라는 부모라면, 썩 읽히고 싶어 하지 않을 법한 내용이 꽤 실렸다. 대신 전태일의 삶을 이야기하고,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의 위험을 설명했다.
"요즘은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들이 많다던데…"라며, 색깔이 조금 다른 논술 잡지쯤으로 여기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잡지를 펼쳐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고래가 그랬어>는 대부분 만화로 채워져 있다. 딱딱한 표정으로 노동자, 민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운동권 선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즐거워야 한다는 게 <고래가 그랬어>를 만드는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놀이'에 관한 기사와 자료가 늘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고래가 그랬어>에 실린 '놀이'는 온라인 게임과도 다르고,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과도 다르다.
김규항 발행인은 "게임이나 오락은 넘쳐나지만, '놀이'는 없다"고 말한다. 김 발행인이 강조하는 '놀이'의 뜻을 알려면, <고래가 그랬어> 50호를 펼치면 된다. 김 발행인은 "고래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글에서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가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적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라고 묻는다. 답은 '아이들'이다.
'느린 시간' 없이 성숙한 어른 될 수 있나
김 발행인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어린이들에겐 자유가 있었습니다. 마음껏 뛰어 놀고 또 동무들과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그는 "어른들은 그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느린 시간이야말로 정서와 인간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기억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글을 접한 독자라면, 부와 권위를 중시하는 어른들의 기준에 비춰볼 때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느린 시간'을 채우는 게 아이들의 '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개의 어른들이라면 알고 있듯, 이런 '느린 시간'이야말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기 위한 자양분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무턱대고 외는 일이나 중독적인 재미를 겨냥한 온라인 게임을 통해 내면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어른은 거의 없다.
김 발행인은 <고래가 그랬어> 50호를 내면서, '놀이'의 가치를 더 강조하기로 했다.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래가 그랬어>를 내면서 쌓인 자신감 때문이다. 어려운 시장 여건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신감과는 다르다. 아이들의 '느린 시간'에 다가가려 한 <고래가 그랬어>에 대해 독자들이 갖고 있는 애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최근 진행한 소액주주 모집이 계기였다.
월 100만 원 비정규직, <고래…> 주주 되다…"이런 실용주의 시대에"
200만 원을 내는 소액주주를 49명 모집했는데, 열흘 만에 인원이 채워졌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첫 번째 주주로 참여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김 발행인은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는 월 소득이 100만 원을 조금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었다. 그는 두달치 월급을 모아 <고래가 그랬어> 주주가 됐다.
아이들의 '느린 시간'이 입시를 겨냥한 단편적 지식 암기나 혼자 몰두하는 온라인 게임만으로 채워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두 달 동안 버틸 수 있는 밥값을 받아 책을 만드는 이들의 심경은 무겁게 벅찼다. 김 발행인은 "이런 실용주의 시대에…"라는 말로 마음의 실타래를 풀었다. 눈앞의 이익만을 좆는 것을 오히려 찬양하는 세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난한 시민들의 몸짓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좋은 책'이 아니라 '놀이'가 필요하다
49명의 소액주주들이 새로 참가한 <고래가 그랬어>는 아이들의 '느린 시간'에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김 발행인이 <고래가 그랬어> 창간 4주년을 앞둔 무렵, "오늘 한국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책'이 아니라 '놀게 해주는 것' 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새로 힘을 얻은 <고래가 그랬어>가 '놀이'를 강조한 것도 그래서다.
김 발행인은 당시 <고래가 그랬어>가 중심이 돼 '아이들을 놀게 돕는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이런 운동이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보다 더 중요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 바로 가기 : '고래가 꿈꾸는 세상-<고래가 그랬어>를 생각하는 사람들' 온라인 커뮤니티)
극단적인 경쟁에 내몰려, 스스로 행복을 거부하는 삶으로 향하고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불안에서 건져내는 일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만이 아니다"
그는 당시 "인생의 한 시기가 다른 소중한 시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어린 시절을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만 여기는 것은 잘못이며, "중요한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시기가 다 소중하다"라는 지적이다.
이어 그는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공할 어린이 인권 탄압과 그로 인한 우리 사회의 공멸"에 맞서는 운동을 제안했다. "경쟁만 배우면 행복할 줄 모릅니다"라는 이름의 전사회적 어린이 인권 캠페인이다. (☞ 캠페인 제안서 전문 보기)
새로 힘을 얻은 <고래가 그랬어>는 아이들의 '느린 시간'이 '경쟁'에 대한 불안만으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의 사랑방이 되려 한다. 이 사랑방의 미래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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