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이코노미스트>(12월15일자)는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한국 대중의 태도를 'desultory'하다고 표현했다. '산만한', '지리멸렬한', '만연한' 등으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차라리 '감동이 없는', '흥이 나지 않는'이라고 쉽게 우리가 잘 쓰는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농담삼아 소개한다면 투표날 "13번 찍을까"라는 말을 실제로 들었다.
여권 후보에게는 그동안의 정치실적에 실망하여 관심이 안 가고, 야당인 한나라당에 의당 기울어질 일인데 BBK인가 무언가하는 이상한 이름의 의혹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태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무기력'보다는 '때묻은 능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하고 관측을 해보기도 했다. 마침 태국에서도 지금 총선거전이 한창이고 쿠테타로 축출된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정당이 우세한데, 탁신 지지자들은 "탁신이 부패했다는 공격은 근거가 없거나 (그렇다고 해도) 태국에서 기업을 함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태도라는 것이다.(미국 <타임> 12월24일자). 우리나라에서의 이명박 씨 변호론자들도 비슷한 논법을 구사했다.
여하간 이명박 후보는 압도적인 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의당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다. '신화'라는 용어가 동원될 정도로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공담이었으며,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씨와의 경선에 승리함으로써 사실상 이미 당선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는 미리 확보해둔 데다가 정몽준 의원의 응원과 김종필 전 총리의 뒷받침이 잇따르니 그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보수 본류의 거의 모든 지지를 얻은 셈이었다. 그리고 당락에 관계없이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약속하여 의혹을 가진 국민의 마음을 풀어주었으니 그로서는 선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성의를 다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명박 당선자는 전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개혁적인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회창 후보가 '무늬만 보수', '정동영 후보와 같은 좌파' 운운하고 공격하기까지 했는데 그 공격은 자기의 출마를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여하간 그런 개혁성은 분명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연성을 '실용주의적 보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장집 교수는 RIP(Revelation 폭로, Investigation 조사, Prosecution 기소)라는 용어를 써서 대선 정국을 특징지웠는데 쉽게는 '검찰정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최악의 대선' 운운하고 폄하하는 말들을 많이 하기도 했는데 한편 뒤집어 보면 달리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진척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도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르윈스키 사건처럼 그런 문제들이 그냥 눈 감고 지나가지 않고 철저히 파헤쳐지고 정화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얼마나 수준이 높아져가고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가령 박정희-윤보선 씨가 대결하던 때 박 씨의 공산당 전력이 문제가 되다가 그냥 슬그머니 넘어간 일과 견주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하겠다. 그만큼 우리 민도도 높아졌고 정치수준도 올라갔다고 보아야 할 줄 안다.
또 한가지. 우리는 예를 들어 미국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권을 주고받고 하는 것을 참 부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스포츠에서의 페어플레이를 바라보는 선망의 눈길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그런 수준이 된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정권교체의 축적이 있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의 노무현-이명박 권력승계를 모두가 아무런 불안감도 없이 태평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사실 큰 역사적 변화라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그만큼 진전하였다.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기대, 부탁도 크고 많다. 우선 행정부 책임자에게는 정책수립도 중요하지만 그 정책의 집행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해두고 싶다. 우리는 그동안 정책만 화려하게 내세워 선전했지, 그 실적은 소홀히 한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 집행에 대한 평가를 철저히 해오지도 않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당선자는 그 집행력(추진력)에 있어서는 보증수표가 아닌가.
정책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예산을 놓고 한번 따져 보면 바로 실감이 날 일이다. 선거 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대략 10%쯤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임해보면 그 폭은 훨씬 더 좁아지는 것이다.
몇 가지 이야기해 둔다면 대운하 계획이나 금산분리 폐지(완화) 등을 선거 때 공약했으니 국민의 위임을 받은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다시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 바로 표가 나게 국민에게 보여줄 것으로 대운하는 호재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가역성을 잊지 말 일이다.
남북관계는 별로 신경이 안 쓰여진다. 6자회담의 틀이 잡혀졌고, 북미관계가 진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의 북쪽에의 투자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이란 ABC라고 이름 붙여진 태도로 나가다가 일을 크게 그르치고 지금 다시 클린턴 때의 정책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다만 북한의 개방(인권 포함)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가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항상 중요하기 마련인 노사관계에 있어서 이 당선자에 대하여 선거 때 반노조적이라는 비판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게는 보지 않는다. 우선 어쨌든 한국노총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은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 당선자의 경력이기에 노사정 대타협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도 보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전사인 닉슨이 오히려 중공(그때는 그렇게 불렀다)과의 수교를 할 수 있었다는 역사에 있어서의 유명한 예화(例話)에서 알 수 있는 이치대로다. 되풀이 말하면 이 당선자는 기업과의 신뢰가 있기에 노사정 대타협을 밀어 붙이기가 쉽다는 이야기이다.
기업의 CEO와 국가의 CEO는 매우 다르다. 기업에서는 낙오자를 해고하고 나가도 되지만, 국가에서는 낙오자일지라도 모두 짜임새 있는 사회안정망으로 보듬어 안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른바 이명박 특검과 삼성특검의 두 가지가 병행하게 되어 정국은 뒤숭숭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 특검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하고, 이 당선자는 떳떳이 특검을 받겠다고 하고…또한 여권에서는 그 특검을 국회의원 총선과 관련해서의 최상의 후위(後衛)전략으로 생각하기도 하고…고도의 정치적 지혜가 필요한 일로 본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
신문에 보니 대선과 총선이 매우 근접하여 있는 이번 정국은 20년 주기를 맞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 치러지는 총선에서는 다당제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통합민주신당, 이회창당, 문국현당, 민주노동당, 민주당…물론 한나라당이 과반이 넘는 다수를 차지할 전망이지만 다당제가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일일이 이야기할 겨를은 없고 문국현당만 언급한다면, 지식인 사회에서 신선미를 갖고 있다고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기존의 보수, 개혁, 진보세력 말고 새로운 정치노선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성격 규정은 어렵겠지만 새로운 개혁, 새로운 진보를 내세우는 그런 정치실험 말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유탄을 맞았다고 할 민노당 등 진보세력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돋아난 아무튼 새로운 정치의 싹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품인지 아닐지는 두고 볼 일이다.
끝으로 우리 정치에 있어서의 용어사용에 관해 한마디 해두고 싶다. 일부에서는 여권을 꼭 '좌파'라고 표현한다. 효과를 계산한 의도적인 게 분명하다. 만약에 우리가 유럽에 살고 있다면 별로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들은 좌파, 우파란 말을 흔하게 쓴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과 피나는 투쟁을 했고 지금도 대립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좌파' 운운하는 것도 주술적으로 '친공'이라는 뜻을 함축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용어는 억압적인 언어가 되고 때로는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참고로 서두에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한국 관계 기사를 보면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은 '리버럴(약간 덜 친기업적이고, 약간 덜 친미적인)' 'liberal in Korean sense(that is, slightly less pro-business and pro-American)' 이라고 표현하면서 정동영 후보도 '리버럴'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혁적 또는 진보적이라는 뜻이고 곧이 정치사상사적 맥락에서 말하면 유럽식인 사회민주주의적이라 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진보파나 그런 성향의 사람들을 '리버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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