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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누드 찍은 적 없다"…다른 의혹도 '전면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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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누드 찍은 적 없다"…다른 의혹도 '전면 부인'

<시사IN>과 22시간 인터뷰…"가족 괴롭히는 것 참기 힘들어"

신정아 씨가 시사주간지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누드 사진 촬영,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관계 등 각종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신 씨는 "나는 누드 사진이라고는 찍은 적이 없다"며 "합성이 분명한데,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진의 유출에 누가 개입되었는지 짚이는 바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신 씨는 변 전 실장과의 이메일에 대해서도 "전시에 관한 이야기, 전시 보고 간 이야기, 작가에 대한 이야기, 안부를 묻는 인사, 이런 내용들"이었다며 "진짜 연인 사이였다면 이메일 주고 받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신 씨는 예일대 학력위조 의혹에 대해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4학기) 코스웍 하고, 2003년 봄에 종합시험 보고, 2004년 가을에 (논문) 디펜스를 하고, 2005년 5월에 졸업을 했다"며 "물론 정상적인 정규 과정으로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분명히 마쳤다"고 주장했다.

신 씨는 한국에서 개인회생을 신청한 신용불량자라고 확인된 것에 대해서도 "이번에 뉴욕에 와서, 한국 신문에 기사난 것 보고 알았다"고 밝혔다.

신 씨는 "(그동안) 내가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 서울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을 위조한 거짓말장이로 몰렸기 때문"이라며 "내가 욕을 먹고, 내 뒤에 누가 있다고 어떤 소리를 듣는 건 다 참겠는데, 우리 가족들한테만큼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부탁하려고 이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시사IN>은 이번 인터뷰룰 지난 8월 11~12일 사전 인터뷰를 진핸한 뒤 지난 9월 2일 22시간에 걸쳐 진행했다고 밝혔다. 또 <시사IN>은 이후 누드 사진이 게재되는 등 파문이 커질 때마다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통해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번 인터뷰는 15일 배포된 <시사IN> 창간호에 실렸다. <시사IN>은 전직 <시사저널> 기자들이 창간한 시사주간지다.

다음은 <시사IN>이 인터뷰 주요 부분을 정리하여 15일 저녁 다른 언론에 배포한 내용이다. <시사IN> 창간호에 실린 신정아 씨 관련 기사는 <시사IN>기자단 블로그(☞바로가기)에서 볼 수 있다. 신정아 씨 인터뷰 전문은 곧 개통될 <시사IN> 홈페이지(☞바로가기)에 실릴 예정이다.

"<문화일보>에 실린 누드 사진, 합성이 분명하다"

- 누드 사진이 실렸다. 어떻게 된건가.

"나는 누드 사진이라고는 찍은 적이 없다. 2006년 봄 갤러리인에서 사진가 황규태 씨의 사진전이 열렸을 때, 그 전시 도록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갤러리에 갔더니 합성 사진이 여럿 있는데, 유명 연예인의 얼굴에 삐에로의 몸을 합성한 것도 있고, 내 얼굴에 가슴이 엄청나게 큰 백인 여자의 몸을 합성에 놓은 작품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가 관람객의 흥미를 자극하고 그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라고는 하나, 이건 아니다 싶어 명예훼손 소송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떼라고 했다. 그 일에 대해 아는 기자와 농담도 주고 받았다.

합성이 분명한데,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번 사진의 유출에 누가 개입되었는지 짚이는 바가 있다. (*신씨는 실명을 말했으나 생략)."

(편집자 주 : 사진가 황규태 씨는 최근 <문화일보>가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이라고 보도한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보석을 선물로 받았다는데.

"그림을 선물로 드린 적이 있다. 그림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돈 대신 목걸이를 준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진짜 연인이면, 이메일 주고받았겠나"

- 이메일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까?

"예를 들면 전시에 관한 이야기, 전시 보고 간 이야기, 작가에 대한 이야기, 안부를 묻는 인사, 이런 내용들이었어요. 진짜 연인 사이였다면 이메일 주고 받지도 않았을 거에요. 더 조심하겠죠."

- 변실장과 연인 사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고 한다. 서로 그림을 려주었다는데.

"대학 졸업 후 단 한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변실장님이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봐준 적은 있다. 그것도 나를 그린 것은 아니다."

- 검찰의 가택 수색에서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요.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어요. 그 분의 증명 사진은 한 장 있을 거에요. 명함에 사진 넣는 게 유행할 때 명함 디자인 해보라고 해서 갖고 있었죠."

"내가 언제 서울대 다녔다고 했나"

- 신정아씨의 학력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입학 혹은 중퇴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서울대에는 합격이나 입학을 한 것입니까?

"저는 서울대에 다녔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서울대 입학 시험도 본 적이 없고요. 서울대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셔서, 그 대신 유학을 간 거죠."

- 뉴욕에 온 지 2개월이 가까이 되어갑니다. 한국에서 파문을 수습하지 않고 이곳에는 왜 와 있습니까?

"제 입장에서는 학력 문제가 뭐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팩스도 제가 조작했다고 하고, 제가 말하는 모든 걸 거짓말이라고 하잖아요. 도망을 온 게 아니라 거짓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확인 작업을 하러 뉴욕에 온 거에요."

- 그동안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며 지냈습니까?

"처음 2주간은 숙소 잡아놓고 그 안에서 정신없이 울기만 했고, 그 다음부터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를 만나 정황 파악을 한달 정도 하고 난 다음, 변호사팀과 계약을 해서 제가 실제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거를 찾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 예일대 박사 논문이 표절된 걸로 판명났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4학기) 코스 웍 하고, 2003년 봄에 종합시험 보고, 2004년 가을에 (논문) 디펜스를 하고, 2005년 5월에 졸업을 했다. 물론 정상적인 정규 과정으로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분명히 마쳤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제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서울과 뉴욕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제 공부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 도움을 받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난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못되었다는 걸 지난 6월6일에 처음 알았다. 이 부분도 변호사들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나중에 상세하게 밝혀줄 것이다."

- 박사과정 하면서 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가?

"그런 거는 나중에 변호사 통해서 자세히 밝히겠다."

- 그 가정 교사가 논문을 썼다고 할 수 있나.

"처음부터 그 여자가 쓴 건 아니다. 내가 큰 테두리는 잡아줬고, 중간 중간에 내용 안맞는 것 때문에 마찰은 많았지만 (그녀가) 100% 다 쓴 건 아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버려둬서 그렇게 되었다."

- 그 전에는 문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학교 다니고 미술관 일 열심히 했어요. 지난 6월6일에 논문 표절 제보가 학교에 들어왔는데, 저는 제 논문이 표절된 것인 줄도 몰랐어요. 저는 그날 처음 알았어요.

동국대 미술학과의 오원배 교수가 학교에 제보를 했대요. 스님이 주셔서 제보를 했대요. 표절한 사실을 알았으면 졸업 논문을 남들에게 돌렸겠어요? 속였으면 숨겨야 하잖아요. 그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제가 남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으로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단 사표를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6월25일자로 사표를 내고 뉴욕에 왔었죠. 논문 표절이면 학위가 취소되잖아요. 그런 경우에는 본인에게 통보를 해주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 하니까."

"고열에 시달린 어머니, 앰뷸런스도 못 불렀다"

- 그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이 같은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요?

"지금도 인터뷰 하자고 하루에 이메일이 수십통 오지만 열어보지도 않아요. 제가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 서울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을 위조한 거짓말장이로 몰렸잖아요.

그래서 뉴욕에 나왔고.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러 뉴욕에 왔고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또 거짓말 한다고 할테니 인터뷰 하지 않은 거죠. 변호사들이 확인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게 확인되면, 제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제가 잘못 하지 않고 잘못 보도된 부분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밝힐 거에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저희 가족이 너무 힘들어서요. 특히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데, 한번은 고열이 났는데 앰뷸런스도 못 불렀어요. 기자들 떼내려고 쇼한다고 할까 봐.

오빠들과 조카들까지 괴롭힘을 당했으니까요. 심지어 조카는 고모가 가짜 박사라고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왔대요.

제가 욕을 먹고, 제 뒤에 누가 있다고 어떤 소리를 듣는 건 다 참겠는데, 우리 가족들한테만큼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부탁하려고 이 인터뷰에 응했어요.

9월말이나 10월초쯤이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은데 마무리되면 바로 서울에 들어갈 거에요. 검찰에 가서 조사 받을 거에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최소한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꼭 확인시켜드리고 싶어요.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겠지요. 제가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어요, 이미 끝난 사람인데요."

- 만일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과가 안나오면 어떻게 할거에요?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결과를 들고 들어갈 거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해서 안나오면 할 수 없는 거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러 왔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변호사들을 통해서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들어갈 거에요."

"예일대 등록금 관련 사항, 나중에 밝히겠다"

- 한국에서도, 예일대에서도 졸업생이 아니라고 하는데.

"예일대 박사과정에 분명히 입학을 했고, 등록금을 냈고, 수업도 인터넷 통해 받으면서 리포트로 대체했다. 티이칭(Teaching)과 큐레이터십은 면제 받고,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된다고 인정받았고, 현직 큐레이터이니까."

- 등록금이 얼마였는지, 기억나나?

"한 학기에 1만2000~1만3000 달러 했던 거 같다."

- 본인이 송금했나?

"돈은 내가 직접 내지 않았고, 이것도 나중에 얘기하면 좋겠다."

- 등록금이 예일대 은행 계좌로 들어갔나?

"이 부분도 나중에 밝히겠다."

- 그럼 지금 인터뷰에서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은?

"예일대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학교 다니고 졸업했다는 것. 졸업 가운도 가지고 있다."

- 졸업 가운? 졸업식에 갔었나?

"졸업식에 참석은 못했지만 가운은 가지고 있다. 졸업식에 참석하러 뉴욕에 가기는 갔다. 그런데 가운을 한 달 전쯤에 맞춰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은 거다. 빌리는 것도 3주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해서 졸업식에는 참석 못했다. 나중에 주문해서 졸업 가운을 받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서울대 미술관장 제안, 국립대라서 접었다"

- 서울대에서요? 전임 자리를?

"예.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에서 각각 연락이 왔는데, 중앙대에서는 교무처에서 교수 채용이 있다고 전화만 두번인가 왔었고 서울대는 당시 정운찬 총장께서 연락을 하셔서 뵙게 되었지요.

그때 삼성에서 펀딩 받아서 서울대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었어요. 관장 추천을 받던 중이었는데 제가 그 한 사람이었나 봐요. 교수를 겸하는 자리죠. 미국 유명 대학들처럼 서울대미술관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어요.

제가 관람객 유치나 기획력에서 언론 통해 많이 인정 받고 있던 상황이어서 추천을 받은 거 같아요. 그와 관련해 그 분을 몇번 뵈었어요. 어떻게 보면 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죠.

그런데 성곡을 갑자기 그만 두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과연 더할 나위이 좋은 없는 자리가, 그 상황에서 저에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그런 것도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서울대는 국립이잖아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는 것 보니까 나올 때 외출증도 써야 하고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더라구요.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게는 일을 못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학교에 들어가는 게 저에게는 그렇게 절실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학교에 들어가려고 학위 받은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서울대는 접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정운찬 총장님께 정형민 교수를 추천해 드렸어요.

물론 제가 추천한 것만으로 된 것은 아니겠지만 정형민 선생님이 지금 미술관장으로 계시지요. 여러 분의 추천을 받았겠죠. 서울대 미술관 개관 얼마 후 특강을 요청해 해주었어요.

"캔사스주립대 및 예일대 졸업증명서, 동국대 인사과 임모 계장에게 제출했다"

그 후 동국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동국대는 그 다음 해가 개교 100주년이었는데, 100주년을 앞두고 여러 사람을 특별 채용하던 중이었죠. 동국대는 문화예술 쪽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뜻이 있었고, 미술경영학과 같은 데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했었거든요. 박물관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뜻도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8월초에 동국대에서 연락이 와서 지원했죠. 동국대에서는 저를 학자로 뽑으려 한 게 아니라 실무 능력을 평가해서, 필드와 학교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의뢰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쪽이라면 자신이 있었어요. 성곡미술관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요. 다른 대학에 비해 동국대에서 상대적으로 제가 할 일이 많을 거라 생각도 했구요.

그래서 8월초에 저와 관련된 캔사스주립대, 예일대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다 제출했어요. 서류 미비라고들 하는데, 일반적으로 성적 증명서는 안 떼가지고 있잖아요. 성적 증명서는 공공기관에 안 들어가면 낼 일이 없잖아요. 가져오라고 해서, 예일대와 캔사스대에 요청을 해서 그것을 받아 제출했어요. 학교 졸업증명서 복사본을 인사과에 다 제출했어요.

인사과에 임아무개 계장이라고 있었어요. 그분께 제출했고, 8월 중순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지금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홍기삼 총장님을 면접 때 처음 뵈었죠.

8월30일 인사과 임계장이 이사회에서 통과되었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당시 불교미술사학과에 교수가 한 분 돌아가셔서 자리가 비었었어요. 저와 관련된 과가 신설된 예정이었고. MBA 과정의 미술경영학과를 추진중이었거든요. 학교에서는 다른 과로 갔다가 과가 신설되면 옮기는 일을 많이 해요.

인사과에서 불교미술사학과로 들어갔으니, 학과장이면서 박물관장인 정우택 교수께 인사하라고 하더라구요. 또 서류 원본을 챙겨달라고 하더군요.

8월30일에 그 전화 받고, 31일에 학교에 갔어요. 정우택 교수 만났더니, 불교미술사학과에는 다른 선생을 뽑아야 하니, 제가 강의를 할 수 있는 다른 학과로 빨리 옮겨가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인사하러 갔다가 엄청 혼이 난 거에요. 왜 남의 과에 왔나 이거에요. 그래서 저는 100주년 때문에 들어왔기 때문에, 과가 생기면 최대한 빨리 옮기겠다고 했지요. 당시 동국대에서 제가 아는 분이 미술학과 오원배 선생이었는데, 오선생은 저를 만났을 때 '미술학과에서 7년 강의한 사람을 교수로 쓰고 싶었고, 이론하는 사람을 쓰고 싶었다'고 해요. 오선생께 미술학과에 오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어차피 전공이 이쪽이니, 나중에 미술학과로 보내질거래요.

순수하게 학교 발전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지원해 들어갔는데, 가까운 분들부터 저를 거북스러워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내가 여기에서 일을 해서 뭐하냐, 내 본업은 미술관 전시기획인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또 인사과에 임계장의 상사인 조아무개라는 분이 계세요. 그 분이 학술진흥재단에 박사신고를 했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5월에 졸업해서 그런 거 잘 모른다고 했더니, 성적증명서가 도착했느냐고 물어요. 받았다고 했더니, 성적 증명서 원본 하고 학위증 원본 다 갖고 오래요. 교육부에 신고해야 한다고. 호봉 이런 거 때문에요.

8월31일 정우택, 오원배 선생한테 인사를 가면서, 그 원본 자료를 다 들고 인사과에 갖다 줬어요. 나중에 서류 절차 마무리 하고 금방 돌려준다고 해서, 그걸 복사도 안해놓고 드리고 온 거에요. 성적 증명서는 그때 처음 받았으니까 복사할 새도 없었어요. 받자마자 우표 있는 대로 그대로 갖다줬으니까."

-캔사스대 학부 대학원 MBA, 예일대 학위증을 모두 제출했는데 동국대에서는 어디 있다고 해요?

"분실했대요. 저한테는 분실했다고 얘기했어요. 2007년 2월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인데 황종연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서울 가서 만났더니 2월 이사회에서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신정아가 가짜 박사라고 얘기해서, 학교가 한번 발칵 뒤집혔대요.

그래서 학교에서 저를 채용할 때 공식적으로 확인 절차를 다 밟았는지에 대해 확인해 봤더니 다 밟았더래요. 당시 교무처장이셨던 이상일 본부장님이 오셔서, 검증 작업 한 부분에 대해서 다 얘기하고, 확인 서류를 보냈던 사람은 안형택 교수라는 분인 것 같아요. 그 분들이 가서 저에 대한 검증 작업을 설명해서 이사회에서 마무리되었다고 하더군요.

황 선생님이 저에게 혹시 논문이나 학위증이 있냐고 해서 '학위증 원본을 인사과에서 내라고 해서 냈는데 안돌려줬다'고 했더니 '왜 안돌려줬냐'고 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했죠. 그리고는 바로 임계장에게 전화했더니 찾아보겠다고 그러더라구요.

황종연 선생님이 논문 하고 학교 졸업한 증명서 복사본이라도 볼 수 있느냐고 해서, 보여드렸죠. 그랬더니 '아무 문제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4월에 오원배 선생이 아침 출근길에 전화해서 자기 작업실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학교 생활 하는 데 겉돌지 말고, 왜 교양교육원에 있느냐. 미술학과에서 수업 마련할테니 해보라'고 하더군요. 제가 '사실은 지금 교양교육원 수업만으로도 벅차고 못하겠다, 미술관 일을 하니 벅찬 상황이다'고 거절했지요.

교수협의회에서 사람 만나면 신정아씨가 예일대 졸업자 명단에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얘기해줘야 하냐고 해서 나에게 얘기하라고 하고, 논문 제목과 지도교수 이름을 다 적어줬지요.

5월29일 장윤 스님이 학교 이사회에서 해임을 당했는데, 해임 당하신 건 제 문제 때문이 아니었대요. 제 문제는 명예 훼손으로 조금 포함되어 있었고, 당시 학교 고발 문제 같은 게 있었나 봐요. 6월6일 오원배 선생이 저의 논문 표절 문제를 학교에 제보한 거에요. 그때 오원배 선생이 제보한 서류를 보니, 오선생과 서울대 교수 3명이 예일대에 확인을 요청한 서류더군요. 언론에 도는 서류가 바로 이거에요. 저는 어쨌든 선생 입장에서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이거든요. 6월20일 성적 다 내고 25일 뉴욕에 나오면서 사표 제출한 거예요. 그게 다예요. 동국대는….

5월29일 장윤 스님 해임되기 전에, 2월 이사회에서 문제 제기 된 다음, 황선생님이 저에게 학교에 가서 원본을 찾으라고, 그러고 있는 참에, 교양교육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교무처에서 사본을 달라고 한다고. 제가 화를 벌컥 냈어요. 원본 가져가서 돌려주지도 않으면서 또 사본내라고 그러냐고요. 교무처 김아무개 과장이 달란다는 거에요. 그 분을 찾아갔어요.

'내 서류 달라는 게 이번이 네 번째다. 남의 서류 가져가서 다 잃어버렸느냐, 졸업장, 성적증명서 다 찾아내라'고 하면서 이 사람과 한판 싸웠어요. 여기서 달라, 저기서 달라고 하고, 가져가서 안가져 온대요. 다 찾아오라고 했더니,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것이고, 서류는 최대한 찾아보겠다고 한 것이 4월이에요."

- 서류를 네 번이나 냈어요?

"예. 동국대에는 들어갈 때 완벽하게 들어갔어요. 절차 안 거쳐서 채용했다고 하는데, 엄격하고 완벽하게 서류 다 제출하고 정상적 절차 통해서 다른 교수와 똑같이 들어갔지, 특혜받은 거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남자였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

- 성적 스캔들 문제가 불거졌는데요.

"한국에서는 독신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워요. 언론에서 배후가 권력 쪽에 있다고 하는데 10년 동안 일을 열심히 하면 이 분야에서 당연히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 배후에 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제가 싱글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서 그렇거든요. 제가 남자였으면 이러지 않을 거라구요."

- 그러면 펀딩, 즉 기업으로부터 협찬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 전>을 할 때 처음 받았는데, 그것을 받으려면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해요. 기업의 담당 실무자들에게 미술관 초대권을 줘서 가족과 함께 오게 하고, 회사 복도에 걸려 있는 작품도 바꾸어주고, 달력 자문도 해주고, 달력에 들어갈 작가 작품도 싸게 섭외해주고, 텔레비전 광고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고… 한번 접촉을 하면, 끊지 않고 지속해서 관계를 유지하죠. 가끔 회사에 가서 특강도 해주죠. 개인적으로 특강료를 받는 게 아니라 전시할 때마다 협찬을 많이 받았죠.

전시 기획을 하다 보면 돈 문제에 많이 부딪혀요. 기업 미술관이 회사 예산 받아 쓰니까, 돈이 없잖아요. 잘 하고 싶은데 자꾸 회사 돈 축내면서 할 수는 없고, 다른 회사에 펀딩하면 그 회사 이미지도 좋아지고, 그 사람들도 와서 자기네가 후원한 전시니까 재미있게 보잖아요.

사람들은 제가 오너들한테 아부 잘 해서 전임자들 쫓아내고, 마당발이라서 이렇게 펀딩하고, 또 펀딩을 하는 데도 배경이 있지 않냐고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렇게 하는 데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요. 연이은 미팅 때문에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참아야 했던 적이 많아요. 주말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구요.

미술관은 월요일이 쉬는 날인데, 2005년부터 동국대에 가면서 주로 월요일에 강의 몰아서 했죠. 그 전에도 강의는 했었어요. 이대, 홍익대, 중앙대, 국민대, 상명대에서요."

- 어째서 BMW 자동차가 스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어머니 이름도 아니고?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의 스님이었대요. 그 스님이 BMW를 한 대 사셨나 봐요. 스님 입장에서 타기가 힘들고, 돈 갚을 능력도 안되니까, 독실한 신자인 제 어머니가 시주하는 셈 치고 그 차의 돈을 대신 내주시고, 또 다른 차를 사드렸대요. 그 차를 올케한테 주려고 집에 갖다놓으셨는데 제가 내려갔다가 제 차(소나타)를 두고 그냥 타고 온거에요."

- 그 차가 어머니에게서 나온 게 확실하다는 거죠? 누가 사준 게 아니고.

"그 차를 탄 지 5년이나 되었어요. 언론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사치를 하면, 차 바꿀 때 되었거든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저희 어머니를 통해서 나왔지, 나올 데가 따로 없어요. 제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게 뭐냐 하면, 돈은 당신이 대주는데, 왜 딴 놈이 생색나게 하냐 그러시는 거에요. 제 어머니는 좀 유머러스 하거든요."

- 한국에서는 개인회생을 신청한 신용불량자라고 확인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번에 뉴욕에 와서, 한국 신문에 기사난 것 보고 알았어요."

- 그전에는 본인이 그렇다는 거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요."

"비엔날레 감독은 교수만 하는 게 아니다"

- 학교에서 문제가 생겨 사표를 냈다고 하면 광주비엔날레에서 총감독으로 내정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은 들어요. 이런 문제로 학교에 사표는 냈지만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하고 대학 교수 하고는 상관없는 거거든요.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은 대학교수만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전시 기획자가 하는 거지.

동국대 홍 총장님은 학교 발전 위해 저를 뽑았는데, 발전은커녕 너무 힘들게 해드린 상황이어서 그분께 너무 죄송해요. 광주비엔날레도 처음 시도하는 공동 감독으로 저를 일부러 임명해 주셨는데 시작도 못해 보고 이런 아픔만 드려서 정말 죄송하죠. 이종상 선생님께도 그렇고, 광주비엔날레 실무진에게도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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