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할 말이 너무 많다"고 했다. 목소리도 높아졌다. 한 손에 9월 3일자 <조선일보>가 들려있었다.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 재단 이사장이 쓴 칼럼을 내밀었다. "발전도 균형도 놓친 '균형 발전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는 메모와 밑줄이 빼곡했다.
"<조선일보> 박세일 칼럼에 분노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의 모습이다.
"할 말이 너무 많다"던 성 위원장은 박세일 이사장의 칼럼으로 말문을 열었다. 박 이사장은 칼럼에서 "수도권에 대한 규제를 확 풀어야 지방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5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헛된 생각이 바로 '균형 발전'이라는 구호이다. 듣기는 그럴 듯하나 사실은 허구이고 허상이다"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후부터 지금까지의 5년간,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이끌어 온 성 위원장이 격분한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그는 박 이사장의 칼럼을 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격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부동산 폭등, 환경 파괴 등에 대한 우려를 담은 질문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강력한 투기 심리에 대해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혁신과 창조가 아닌 투기를 통해 소득을 얻으려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데,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점은 잘못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풀릴 것이라 본다"며 담담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요컨대 다른 비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수도권 규제 완화" 주장만큼은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수도권 규제가 너무 엄격해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이 너무 심해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수도권으로의 집중을 부추기는 이들과 대대적인 논쟁을 벌이고 싶다고도 했다. 다음은 성 위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지방에 살면 창피하다'는 병든 마음"
프레시안 :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이런 상황은 보통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은 지역균형개발을 주장했다. 그런데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 재단 이사장은 최근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이를 비판했다.
성경륭 :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래, 600여 년 동안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정치가 이뤄져 왔다. 이 과정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렸다.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병든 이들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차에 지방 번호판 달고 다니면 창피하다고 한다. 왜 지방에 살면 창피한가. 왜 춘천에서 서울로 갈 때, 서울로 올라간다고 말하는가. 우선 이런 병든 마음부터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지적할 대목은 서울의 과밀화가 낳은 부작용이다. 한국은 일종의 '기차 모델'이다. 서울에 모든 자원이 집중돼 있고, 서울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박세일 이사장은 이런 모델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기차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생산 요소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수도권 과밀화가 낳은 비용은 왜 빠뜨리나"
좁은 공간에 인구가 집중돼 있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너무 높다. 또 교통체증도 심각하다. 그리고 각종 범죄, 질병 발생률도 낮추기 힘들다.
이렇게 비싼 부동산 임대료를 내고, 길에서 이처럼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환경오염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병에 걸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쟁력이 생길 수 있겠나. "수도권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 "중국과 경쟁하려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 자체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는 상황에서 모든 비용이 저렴한 중국과의 경쟁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자동차 매연, 공사장의 먼지 등에서 비롯된 환경오염이 아토피를 확산시켰다. 아토피 때문에 치르는 의료비는 '비용'이 아닌가. 교통 체증 때문에 발생하는 시간 낭비와 유류 소비는 '비용'이 아닌가.
수도권 규제를 완화하면 이런 '비용'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거의 없다. 요컨대 '고비용, 저효율' 상황인 셈이다. '경쟁력 강화'를 이야기하면서 '고비용, 저효율' 상황으로 이어질 정책을 주장하는 게 우습다.
"수도권 키워봐야 돈은 해외로 빠져나간다"
프레시안 : 인구와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사회적 비용이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반대로 지역 균형 개발, 인구 분산 등을 추진하면, 비용이 줄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성경륭 : 한국은행이 올해 3월 '권역별 투자시 전후방 연관효과'에 관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은 다른 지역과 동떨어진 성장을 하고 있다.
즉 다른 지역에 중간재를 판매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전방연관성과 다른 지역에서 중간재를 구입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후방연관성이 모두 낮다.
수도권은 국내의 다른 지역과의 전·후방연관성이 낮은 대신, 해외와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라권과 경상권은 후방연관성은 조금 낮고, 전방연관성은 높다. 또 경북권, 충청권, 강원권은 전·후방연관성이 모두 높다. 다른 지역과의 후방연관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전라권과 경상권도 수도권보다는 높다.
요컨대 수도권의 성장이 다른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소위 '스필 오버'(Spill Over)론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다. 복잡한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고, 상식적으로만 따져봐도 알 수 있다. 수도권에 밀집한 산업은 대부분 서비스업이다. 이런 산업과 지방에 있는 제조업 사이에는 큰 관계가 없다.
또 지방의 산업을 살리지 못 하면, 일자리를 얻지 못 한 이들이 계속 수도권으로 밀려들어, 과밀화에 따른 비용만 늘어난다. 결국 지방 산업을 살리는 게 해법이다. 인재, 산업, 기술이 지방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
"균형 개발이 '토건 국가'화 촉진했다"는 비판은?
프레시안 :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지난 5년간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의 건설을 추진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의 산업과 기술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비판도 만만치 않다. 꼭 박세일 이사장의 <조선일보> 칼럼과 같은 비판만이 아니다. 반대 방향에서 나오는 비판도 거세다.
곳곳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토건국가화를 촉진한다는 비판이다. 또 지역 개발에 대한 기대를 자극해서 부동산 가격을 올렸다는 지적도 있다.
성경륭 : 개인적으로 생태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환경을 파괴했다는 비판이 나오면 대답하기 힘들다. 생태적 가치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방향이다. 또 '토건국가'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의식도 공감한다. 하지만 경제 성장에 대한 요구 역시 완전히 외면하기는 어렵다. 고민이 많지만, 이런 수준의 답변밖에 못 하겠다.
부동산 가격을 올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물론 몇몇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크게 뛰었다. 그렇게까지 오르리라고는 미리 예상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즉 우리 사회의 강력한 투기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지 못 했다. 창조적 파괴, 기업가 정신, 혁신을 추구하는 정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투기를 통해 한몫잡으려는 풍조가 만연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부동산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더 커졌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다. 개편된 부동산 관련 세제가 조금씩 효과를 내고 있다. 결국에는 투기를 통한 이득은 모두 공공자금으로 환수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정상적인 부동산 가격 문제는 풀린다.
또 일부 언론은 혁신도시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지불된 보상액이 서울로 몰리면서 강남 집값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증적으로 조사한 결과,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에 부동산을 구입한 이들의 등기부 등본을 모두 조사한 결과다. 지역균형개발과 서울 강남 집값 상승은 관계가 없다.
"농업과 제조업, 서비스업 융합하여 농촌의 활로를 열자"
프레시안 : 지역균형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역특화발전지구를 설정했다. 지역 특성에 걸맞은 산업을 선정하여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등 최근 유행에 휩쓸려 천편일률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비슷비슷한 산업을 육성하다보면, 성공 가능성 역시 낮아지지 않겠느냐는 지적이기도 하다.
성경륭 : 그렇지 않다. 도시 이름 옆에 IT, 바이오 등이 표시된 지도만 보고 그렇게 비판하는 모양인데,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인상 비평일 뿐이다. IT라는 이름으로 묶인 산업과 기술이 얼마나 다양한가. 생명공학 역시 마찬가지다. 지역 특성에 가장 적합한 산업을 발굴하여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지역균형개발이 아니라, 지방 도시 개발일 뿐이다"라고 비판한다.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한다면서, 도시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농촌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은 드물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목소리는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FTA에 대한 불안감과 맞물리면서 증폭되고 있다.
성경륭 : 지역 균형 개발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비판이라고 본다. 선진국에 가까워질수록 전체 인구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준다. 한국 역시 농업 인구는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한국은 다른 강대국에 비해 농업의 조건도 썩 좋지 않다. 선진국의 경우 인구 당 경작 면적이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그렇다고 해서 농업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농업에도 길이 있다고 본다. 1, 2, 3차 산업이 융·봉합하는 것이다. 1차 산업의 생산물을 2차 산업을 통해 가공하고, 3차 산업을 통해 유통하는 것이다. 거기에 역시 3차 산업인 서비스· 관광 등이 곁들여지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사례도 이미 많다. 전북 순창의 장류 산업단지를 보자. 된장, 고추장 등의 원료가 콩, 고추 등을 그곳에서 생산한다. 그리고 현지의 공장에서 상품을 만들어 국내에 유통하고, 해외로 수출한다. 그뿐 아니다. 각종 체험 관광 기회도 제공한다. 1, 2, 3차 산업이 융·봉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도권 집중과 지역 균형 개발' 놓고 제대로 논쟁하자"
프레시안 : 농업 문제, 환경 문제 등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이런 대답에 만족할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대선 앞둔 지금, 목소리가 더 큰 세력은 환경, 농업 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쪽이라기보다, 수도권 규제 완화에 더 관심을 갖는 쪽인 듯하다. 그리고 앞서의 답변들은 이들의 주장과도 대립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대립이 활발한 논쟁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성경륭 : 지역 균형 개발 문제를 놓고, 올해 대선에서 정말 치열한 논쟁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논쟁 속에서 올바른 입장과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칼럼과 같은 황당한 주장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수도권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 언론의 선동만 있을 뿐, 합리적인 주장과 토론은 없다.
심지어 팔당 수원지 일대의 개발 규제마저 없애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온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살고 있는 수도권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곳이다. 그곳에 공장이 들어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칫 수도권 주민들이 오염된 물을 먹게될 수도 있다. 이런 어이 없는 주장을 아무런 비판 없이 전하는 언론이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앞서 언급한 박세일 이사장과 같은 수도권 규제 완화론자들은 흔히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곤 한다. 그런데 선진국들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우리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2차 대전 직후, 한동안 '파리와 사막'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인구와 자원이 집중된 수도 파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사막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결국 지난 50년 동안 역대 프랑스 정권은 강력한 수도권 규제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런 역사적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작은 변화만을 들어 수도권 규제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 역시 런던권에 집중된 산업 및 인구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 정책을 추진했다. 3차례에 걸쳐 공공기관을 대거 지방으로 이전했다. 또 산업개발 허가제, 사무실 개발 허가제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런 과거 속에서 축적된 성과를 무시한 채, 최근의 추세만을 주목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 선진국의 경우, 수도권 집중이 낳은 폐해에 대해 사회적으로 강력한 공감대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 국가에서는 정치권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쳤다. 한국의 대선 후보들 역시 올해 대선에서 이런 토론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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