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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선교'의 빗나간 진화, 그 끝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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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형 선교'의 빗나간 진화, 그 끝은 어디?

[정희준의 어퍼컷⑫] 아프간 피랍사태 마무리가 난감한 까닭

우리나라엔 불가사의한 괴력을 자랑하는 분야가 몇 있다. 물론 스포츠도 그 중 하나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어쩌면 능가하는 분야가 바로 기독교다.

1300만 교인에 1만6000명 선교사를 보유한 세계 2위의 선교국가이고, 80만에 육박하는 신도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단일교회가 있다. 늦은 밤 도심 고가도로를 달리다 보면 사방에서 빛을 발하는 수많은 빨간 십자가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선교의 분화와 문화선교의 등장

한국 교회가 외적 성장에 치중하는 가운데 선교는 교세 확장의 핵심이 됐고 그 방식도 다양해졌다. 해외선교, 오지선교, 빈민선교, 도시선교, 북한선교가 등장했고 90년대 이후에는 지역성보다는 콘텐츠를 중시하는 선교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젊은이들 중심의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이 주도하는 음악선교, 그리고 최근에는 스포츠선교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장미란 선수가 자신의 종전 용상 기록을 뛰어넘는 172.5kg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한 뒤 기도하고 있다. ⓒ뉴시스

사실 가수가 TV에 나와 열창을 하고는 '무사히 노래 마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무대에 무릎 꿇고 감사기도 할 리 없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한 판 메치고 기도하고(이원희, 장성호), 금메달 따고 기도하고(장미란), 골넣고 기도하고(박주영, 이영표, 최태욱), 경기 종료 후 대표팀 전원이 둘러 앉아 기도하니(남자배구) 스포츠스타는 선교의 효과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세계스포츠선교회는 매년 이들 선수들 중 몇몇을 선정해 시상하는데 올해는 특별상에 박태환, 이원희, 장성호, 모범상에 장미란이 선정돼 상을 받았다 한다.

규모 있는 스포츠선교 기관만 해도 할렐루야스포츠재단, 세계스포츠선교회 등이 있고 교단에 따라 스포츠선교단체를 두기도 한다. 스포츠는 직접적 선교가 힘든 나라에서도 효과적인데 특히 축구와 태권도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성경을 활용해 선교를 하면 영구추방감인데 베트남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태권도에서 나왔을 정도로 태권도가 이미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인기가 높아 태권도를 통한 선교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탁구의 양영자는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몽골에 선교사로 가 탁구와 기독교를 알리기도 했다.

'한국형' 선교의 진화…'수출역군'에서 '선교역군'으로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 속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이 불거져 나왔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이종(異種)의 종교를 가진 집안끼리의 혼사에서 유난히 교회 다니는 집안이 문제가 된다. 불교나 천주교를 믿는 부모들은 자식들의 결혼을 위해 양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독교 쪽은 며느리건 사위건 결혼하면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혼사의 전제조건으로 거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백기 투항'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다.

또 지나친 확장성 내지는 과도한 '번식성향'이 있다. 우리에게 기독교를 가져다 준 미국의 교회는 철저하게 교회가 자리한 지역(community)에 기반한다. 이웃끼리의 신앙공동체다. 일요일 예배를 위해 수원에서 서울까지 차를 달리는 경우도 사실상 없고 교회가 프랜차이즈 분점 내듯 이곳저곳에 지교회를 만드는 경우도 없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근거한 지역사회를 넘어서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구한다.

그리고 지나친 해외지향성이다. 교인 수, 건물의 크기, 최첨단 수준, 지교회의 수로 '하나님의 축복'을 겨루더니 이젠 해외 파송 선교사의 수로, 그리고 몇명이 위험지역으로 갔느냐로 교세를 과시한다. 어느 정도 규모의 '선교 강군'을 보유했느냐로 교회의 '영성'을 측정하고 서로 겨루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선교사 '수출경쟁'이다. 과거 '수출역군'의 시대가 떠나자 '선교역군'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문화를 무시한 선교…엘리트적 한국교회의 제국주의적 확장

이번에 피랍됐다 돌아온 선교단 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하다. 그들의 생환을 진심으로 환영하지만 이번 사건을 어떻게 정리하고 마무리해야 할지는 난감할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논쟁과 저주에 가까운 비난이 등장하게 됐을까.

무엇보다 조급함 없이 지역의 정서를 신중하게 고려하는 서구 국가들 대상의 선교와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의 오지선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기독교의 공격적이고도 전투적인 선교방식, 그리고 그들의 (또는 우리들의: 사실 필자도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다) 배타적, 우월적, 엘리트주의적 선교방식이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인)의 역사와 문화는 무시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부 한국 교회는 해외선교에 있어서 문화가 이질적이고 체제하기에 위험할수록 '유격대'식의 선교를 택한다. 그 산물 중 하나가 바로 이번 피랍자들의 출발 목적인 단기선교다. 장기선교사 파송이 어려운 지역에 이들을 보내 개척을 시도하는 것이다.

선교는 '제국건설'을 위한 전쟁?

한국교회의 지나친 세계주의와 이로 인한 제국주의적 인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를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식으로 열광했던 월드컵이나 WBC 야구처럼 마냥 뻗어나가 세계를 구하겠다는 이들의 '사명감'은 여러 경로로 표출된다.

작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한 기독교 매체의 방송 내용은 이를 엿보게 한다. 출연자들은 대회에 출전한 '믿는 선수'들을 통해 (유럽의) 죽어가는 영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길, 지금 침체되어가는 유럽이 다시 기독교로 부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또 현지에 파견된 선교단의 활동을 통해 '유럽이 부흥하는 역사(役事)를 꿈꾼다'고 말했다.

마치 '세계정복'을 목표로 삼은 듯한 기독교의 선교는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선교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듯하다. 스포츠를 보도하는 언론의 표현이 군사용어를 방불케 한다 하여 비판이 있어왔는데 기독교의 선교도 이에 못지 않다.

기독교 선교에 힘쓰는 이들의 인터뷰나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표현들 중엔 '최전방 지역,' '최전방 종족을' '타겟으로,' '정탐,' '선교 무기' 같은 표현도 있다. 교회를 다니며 익히 들어왔던 '개척'이라는 표현도 다소 공세적이라 느끼긴 했지만 '종족'이나 '무기' 같은 단어에선 기독교 선교의 배타적 우월감 그리고 적극성을 넘어선 공격적 태도가 뭍어난다.

금번 피랍자들과 같은 단기선교팀을 MIT 즉 'Mission Impact Team'이라 부르는데 번역을 하면 '선교충격팀' 쯤 되겠다. misson이 '군대에서의 특명'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잊어버리더라도 기독교는 선교에 특수부대 명칭을 도입할 정도로 군사문화에 젖어 있다. 사실 단기선교는 유격전의 종교적 변형이 아닌가 싶고 또 '파송'은 '파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보단 '자연스러웠던' 선교
▲ 1911년 평양 선천 등지로 원정 경기에 나선 황성 YMCA야구단.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1905년 한국 YMCA의 초대 총무를 맡았던 미국인 질레트 선교사 ⓒ연합뉴스

한 세기 전 우리는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근대화에 눈을 뜨면서 지식인들은 서구의 사상과 문물 그리고 교육을 숭상했다. 그리고 그 기반인 기독교에 스스로 심취했다.

당시 열이면 아홉에 해당하는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빠져들었고 특히 윤치호 같은 이는 전통문화와 특히 유교를 백해무익의 '절대악', '최악의 범죄'로 보았다. 기독교와 교육이 조선인들을 개선시킬 것이라 보았고 가장 시급한 것을 체력이라 보았기에 스포츠를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YMCA 같은 기관이 퍼뜨린 것이 야구, 농구, 권투, 육상, 배구 같은 종목들이다.

이는 유럽의 지배 하에 있었던 1900년 전후의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의 지식인들 역시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근대적 자유인이 되기 위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왕에게 충성한 것처럼) 식민지배 국가의 왕에게 충성하고 지식을 쌓았으며 교회, 클럽 등을 통한 사교에 열심이었는데 특히 이들을 매료시킨 것은 역시 스포츠였다.

군함과 총칼을 앞세웠던 초기 제국주의 침탈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서구 열강은 미개한 나라에 진입하기 위해 선교사를 앞세웠다. 선교사들은 식량과 약품 그리고 토착민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시계, 나침반 등을 가지고 들어가 교류를 틔고 다음엔 학교를 세우고 스포츠를 전파했다.

사실 스포츠는 사회의 지배가치를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스포츠를 통해 '놀면서' 시간의 엄수, 권위에 대한 복종, 규칙의 준수를 습득케 하는 것은 교실에서 칠판을 사용해 가르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포함한 비서구 국가에 기독교(또는 카톨릭)는 당시 서구의 문물을 토착민 스스로 빨아들이려는 상황 속에 흘러들어온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상당 수준의 완충기능을 했던 지식인, 학교 스포츠 등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선교에도 차별이?

국내 선교나 '문명국' 선교에는 참으로 다양한 문화를 활용한 문화선교를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정서를 고려해가며 선교하는 반면 중동지역 오지에 들어가면서는 어쩜 그렇게 공격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무시하는 선교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문화적으로 그 어떤 접점을 찾기 힘들어서일 수 있지만 '최전방'을 '정탐'하는 방식으로, 그 '종족'에 '충격'을 주기 위해 선교에 나서는 것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가 미국인과 외국인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 그리고 미국교포와 조선족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기독교 선교에도 스며들지는 않았나.

공세적이고도 전투적인 선교방식에서 나아가 이들에 대한 배타적, 우월적, 엘리트주의적 태도는 제국주의적 종교관을 키우는 게 아닌지 염려스럽다. 군사정권이 우리에게 안겨 준 압축근대의 변형인 '압축선교'가 아닌가도 싶다.

지나친 염려일지 모르나 이번에 억울하게 죽임 당한 두 신도에 대한 추모를 넘어 '순교'를 강조하고 왜곡된 미화를 시도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만 있는 듯 하다. 또 이번 피랍자들에게 출국 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서를 작성케 해 아홉명이 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카미카제를 독려한 일본 군국주의나 자살폭탄 부추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행태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싶다.

다양성이 다름으로, 다름이 차별로, 차별이 우열로, 우열이 옳고 그름으로, 옳고 그름이 선과 악으로 진화한다. 악으로 규정되면 정복과 제거의 대상이 된다. 중동선교에 나선 우리 기독교의 인식과 태도는 이러한 진화과정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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