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후보가 공약 사항인 '경부운하'를 고집하는 것을 보며,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이들은 흔하다. 애당초 이명박 후보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인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곳인 현대건설 자체가 박정희 정권과 함께 성장한 기업이었다. 그리고 현대건설을 비롯한 재벌기업의 문화와 조직체계가 만들어진 것도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테타 이후 군대의 조직체계와 업무방식, 문화 등이 사회 곳곳에 번졌다. 많은 기업들 역시 군대를 모델로 삼아 조직을 운영해 왔다.
이렇게 보면, 지난 한나라당 경선은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과 '역사적 아들'의 대립이었다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처럼 28년 전에 죽은 박정희의 그림자가 아직 여전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군대식 효율성에 기반한 박정희 패러다임을 넘어서지 못 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의 통치 기간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목소리만 높을 뿐, 비판적인 성찰은 소홀했던 것도 한 원인이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은 종종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세력의 정서적 반발로 취급됐다. 그래서 이런 시도는 민주화 세력의 테두리를 넘어 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했다. 물론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시대의 명과 암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진보적 담론을 구성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진보 성향의 사회학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도 이런 책임감에 공감하는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복합성과 구체성을 담아낸 박정희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그가 최근 책을 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라는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박정희 시대를 몸으로 살았던 세대"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조 교수는 이런 세대적 경험이 자신에게 각인된 흔적을 '역사적 박정희'로 규정했다.
이어 그는 "요즘에는 그것(역사적 박정희)과 구별되는 '현재적 박정희'(저자 :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에서 느껴지는 무엇)와 대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역사적 박정희'와 '현재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 그것이 조 교수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197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그래서 '역사적 박정희'를 몸에 새기고 있는 사회학자는 '현재적 박정희'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리고 역사와 현실의 간극을 넘어서려는 시도 속에서 바라본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박정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뒤인 지난달 말, 서울의 한 찻집에서 조 교수를 만났다.
"박정희 시대의 다양한 면모 인정하는 게 꼭 보수는 아니다"
<프레시안> :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를 서평으로 다룬 <동아일보>는 "조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 일색의 진보 담론을 극복하자고 했다"고 보도했다. "진보 학자가 보수적 분석을 수용했다"는 분위기다. <조선일보> 역시 비슷한 시각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복합성과 구체성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현실에서는 박정희를 옹호하는 보수적 태도로 읽히는 듯하다.
조희연 : '박정희 시대'라는 주제가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박정희 시대의 다양한 얼굴을 담아내려던 시도가 단행본 분량의 한계 때문에 제약받았다. 이런 분량 제한 때문에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보수 언론이 이 책을 다소 편향적으로 해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본다. 물론 입장에 맞춰 책을 해석하는 보수 언론의 속성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가 추진한 정책에 대해 대중이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열광한 경우에 대해서도 다뤘는데, 보수 언론은 이런 면에만 주목했다.
하지만 대중의 이런 열광과 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대중은 경제 성장을 가리키는 지표가 상승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열광하지만, 곧 그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한계를 깨닫는 순간, 체제의 균열이 시작된다. 박정희가 '성공'적으로 추진한 개발이 현실화되는 순간이 균열의 출발점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애당초 박정희 체제는 내부 모순으로 인한 지속적인 '위기의 체제'였다.
하지만 보수 언론은 이런 대목에 주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기존의 주류적 해석과는 다른 '신진보적' 해석을 많이 집어 넣었다. 보수 진영에서 강조하는 박정희의 경제 개발 성공을 박정희 체제에 대한 진보적 단순분석이 아니라 진보적 복합분석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물론 이런 시도에 담긴 내용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솔깃해하는 젊은이들과 대화하려면"
<프레시안> : 이 책에서 "보수 내부에서 극우 반공주의적이고, 반북주의적인 박정희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초기에 기성 정치권의 부패에 분노하는 우국충정의 박정희, 1970년대 말에 미사일 개발을 강행하고자 했던 박정희, 국사 교육과 스포츠 용어의 한글화를 시도했던 박정희, 엽색 행각을 일삼는 박정희, 그린벨트를 선포한 박정희 등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도 했다.
이처럼 복합적인 박정희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지금 박정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박정희로 표상되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경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조희연 :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뉴라이트의 도전'이었다.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이 내놓은 주장에 대해 20대 젊은이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박정희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기존의 담론이 설 자리가 좁아졌다.
전통적인 보수 세력은 개발주의·반공주의·국가주의의 이미지만 가진 모습으로 박정희를 부활시키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대중의 향수에 기댄 이런 시도 속에서 자신들의 낡은 개발주의·반공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과거 민주화 세력에 뿌리를 둔 세력은 '폭압적 독재'에만 주로 초점을 맞춘다.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것이어서 강한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감대는 민주화 세력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서는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 우선 박정희에게서 과거 민주화 세력이 초점을 맞춘 것과 다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뉴라이트 세력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과 교감할 수 없다.
그리고 박정희에 맞섰던 반독재 민주화 세력 가운데 일부는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박정희를 폭압의 주체로만 설정한 뒤, 스스로에 대해서는 저항의 주체로만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집권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질 수 없다.
박정희의 다양한 면모, 민주화 세력의 다양한 면모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 공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척도로 서로를 평가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취할 때, 기존 운동권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과 교감할 수 있다. 뉴라이트 세력의 주장에 솔깃해하는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박정희 담론의 진보적 재구성
<프레시안> : 진보적 관점에서 박정희의 다양한 면모를 포괄하는 새로운 박정희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진보'와 '박정희'가 만날 수 있는 대목을 꼽으라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들 수 있다. 물론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진보 진영과 박정희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담론의 진보적 재구성'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영향으로 제조업이 위축되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진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렇다.
실제로 진보적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는 경제와 산업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조희연 : '국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리고 박정희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까지 부정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단 국가의 역할을 행사하는 주체는 달라져야 한다. 또 국가가 맡아야 할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박정희 시대에는 관료가 주체가 돼서 국가의 역할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민 주체가 형성돼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역할 역시 산업정책에서 사회복지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적 관점에서 새로운 박정희 담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먹고사는 길'을 여는 것이다.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적 개발동원체제', '군대식 개발동원체제'라고 설명할 수 있다. 국가가 단지 정책을 집행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재편하는 방식이다. 이런 체제는 사회를 군대식으로 조직하여 성장 효과를 극대화한다. 또 이런 과정을 밀어붙이는 독재자를 영웅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고, 강력한 폭력이 뒤따른다. 당연히 저항 세력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일정한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나면, 시민들도 더 이상 인권 침해와 폭력을 참지 않게 된다. 결국 저항 세력과 이에 동조한 시민의 힘에 의해 체제가 무너진다. 내부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체제인 셈이다.
박정희 체제의 역사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라고 했던 대중은 1970년대가 되자 "우리가 밥만 먹고 사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박정희 체제가 피할 수 없었던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박정희의 흔적…"'사회연대국가'로 가자"
<프레시안> :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군대 문화, 독재자를 영웅시하는 태도 등은 한국의 재벌 기업을 연상하게 한다. 박정희 체제가 낳은 많은 재벌 기업들은 군대식 기업 문화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총수를 영웅시한다. 그래서 총수의 뜻이 불합리한 것이어도 이를 거스르는 결정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조직 문화를 갖고 있는 게 재벌 기업만은 아니다. 박정희 체제의 흔적은 사회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박정희가 죽은 뒤에 태어난 젊은이들조차 이런 흔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 체제로서의 박정희 체제는 무너졌지만, 기업과 사회에 남아 있는 박정희의 영향은 견고해 보인다.
조희연 : 먼저 박정희에 저항했던 이들이 세운 지금은 정부가 왜 위기에 부딪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독재를 극복한 다음 체제에 어울리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무턱대고 부정하는 신자유주의나 박정희 체제에 대한 향수에 기댄 맹목적인 과거 회귀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수 없다.
결국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사는 길'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성장과 분배가 선(善)순환을 이루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회연대국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찾지 못 하는 한,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박정희의 흔적은 지우기 어렵다. 또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맞서기도 힘들다. 올해 대선은 "민주화 이후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자리가 돼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