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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똑같은 집회, 재미있으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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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매번 똑같은 집회, 재미있으면 안 되나요?"

[87년 20년, 집회와 시위③] 집회, 그거 왜 하는데?

우리나라만큼 집회를 많이 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집회공화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민주노총에서 주최한 집회만 해도 한 해에 200회가 넘는다.

왜 이렇게 집회를 많이 하는 걸까? 집회를 해서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냈을까? 혹시 별 효과도 없는데 타성에 젖어서 그냥 하는 건 아닐까?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그거라도 안하면 욕먹을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집회를 하는 건 혹시 아닐까?

매번 똑같은 집회…자리 뜨고, 졸고, 잡담하고, 술 마시고
▲ 보통의 집회는 날씨가 춥든 말든, 주변 조건이 좋든 말든 비슷한 순서로 이어진다. 참가자들은 수시로 자리를 뜨고 앉은 자리에서 졸고, 자기들끼리 잡담도 한다. 사진은 지난 6월 29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프레시안

보통의 집회는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 정도 이어진다. 순서도 대충 비슷하다.

대열 정비, 문화공연, 개회 선언, 민중의례, 지도부 및 참가조직 소개, 대회사, 연대사, 초청 공연, 투쟁사 2-3개, 결의 연설 또는 결의문 낭독, 마무리 노래, 그리고 행진.

날씨가 춥든 말든, 주변 조건이 좋든 말든, 정해진 순서는 꼭 지킨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무미건조한 연설은 참가자들의 관심을 떨어뜨리고 인내력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다보니 참가자들은 수시로 자리를 뜬다. 때로는 앉은 자리에서 졸기도 한다.

심지어는 집회 중에 대열 속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전에는 그래도 무대 쪽을 보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더니, 이제는 아예 무대를 등지고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잡담을 해 가면서 마신다.

각 단체의 조직담당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술 마시는 것은 좋은데, 제발 무대 쪽으로 앉아서 드십시오. 동지들!"

소통이 사라진 집회…'어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랴'

참가자가 많을수록 무대는 점점 높아만 간다. 앞에 있는 사람은 한참을 우러러 봐야 그나마 무대 위의 연설자들을 볼 수 있다.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소리만 들릴 뿐이다. 무대에는 아무나 올라 갈 수가 없다. 몇몇 '은혜 받은' 사람들만 올라갈 수 있다. 그야말로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초대받지 않은 일반 조합원들이 올라가기에는 무대의 턱이 너무 높다. 현장의 소리, 조합원들의 쓴소리는 항상 '원천봉쇄' 된다. 일방적인 지침만 무대 밑으로 하달될 뿐 집회는 더 이상 소통과 교류, 상호확인과 공동결의의 장이 아니다.

그렇게 집회가 끝나면 위력적인 시위를 위해 행진을 한다. 사전에 경찰 쪽과 협상을 해서 어디까지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 폴리스라인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한다. 현수막을 든 지도부가 앞장을 서고, 삑삑거리는 방송차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길가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관심을 가져 보지만 잠깐뿐이다. 시위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그 뜻이 좋아서 행진을 같이 하려해도 쉽지가 않다. 근엄한 행진 분위기와 통일된 복장에 주눅이 든다. 길가의 시민들이야 듣든 말든, 동참하든 말든 갈 길을 간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랴.'
▲ 집회가 끝나면 위력적인 시위를 위해 행진을 한다. 사진은 지난해 열린 비정규 노동자대회의 행진 모습. ⓒ프레시안

왜 그렇게 획일적인 것을 좋아하는지 -아마도 군대식 문화에 찌들어서 그럴 것이다- 오와 열을 맞추어야 하고, 표정관리도 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는 무시 된다. 자신들의 주장을 다양하고 자유롭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러면 노동자들의 의식이 마비되기라도 하는가? 행진은 재미있으면 안 되는가?

그 시절엔 그래도 눈빛은 새벽별 같았고 열기가 뜨거웠다

집회를 불순하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집회 자체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프로그램이 세련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연설을 못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집회에 한번 참가하려고 밤새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학교 담장을 타기도 했다. 그렇게 모여서 서로를 확인했다. 집회 시간이 길어도, 날씨가 추워도, 음향 시설이 별로라도 행복했다. 참가자들의 눈동자는 새벽별처럼 초롱초롱했고, 열기가 넘쳤다.

아직도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은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집시법을 개악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있다. 그래도 집회 자체가 원천봉쇄 되던 군사독재 정권 때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노동자들의 주체적 조건도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집회 문화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눈빛과 열기는 점점 시들어지고 있다.

집회를 하는 목적은 조직의 크기나 조건, 특성에 따라 다르다. 자신들의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 집회를 하기도 하고, 조직된 힘으로 항의하고 압박하기 위해서도 집회를 한다. 내부 소통이 집회의 주목적일 때도 있다. 집단적 행위 속에서 동질감을 갖기 위해서도 집회를 한다.

집회의 종류도 규탄 집회, 행사용 집회, 파업 집회, 청원 집회, 저지 집회, 문화제 형태의 집회, 1인 시위, 게릴라 집회 등으로 다양하다. 따라서 집회는 목적에 맞게 해야 한다. 이루려고 하는 목표에 가장 알맞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가자들에게 외면만 당할 뿐이다.

집회도 하나의 소통이다. 조합원과 지도부 사이의 턱을 없애야 한다. 집회의 주인은 조합원이어야 한다. 조합원의 쓴소리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집회에서 울려 퍼져야 한다. 주변의 시민들과도 소통해야 하고, 그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어렵고 생경한 한자말 구호도 바뀌어야 한다.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고, 금방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그런 말을 왜 안 쓰는가? 그런 말을 쓰면 귀신이 잡아 가기라도 하는가? 아니면 호랑이가 물어가기라도 하는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기를 기다리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 경험했던 반전 집회는 한국의 집회문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들의 집회는 특별한 격식도, 규제도 없었다. 모이는 장소인 공원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행진을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따로, 어떤 때는 또 같이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면서 행진을 했다. 피부색과 언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장애인도, 유모차를 끈 아기 엄마도, 예술가도, 노숙인도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렸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맘이 내키면 스스럼없이 대열 속으로 들어왔다. 행진 전체가 잘 짜인 한 편의 작품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집회 문화를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문화단체와 인권단체, 시민사회단체에서 앞장을 서고 있다. 집회가 풍성해지고 다양해졌다. 고정된 틀도 깨지고 있다. 집회 양식도 바뀌거나 새롭게 개발되고 있다.
▲ 집회가 재밌고 다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집회 문화를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1일 열린 고(故) 허세욱 씨의 49재 집회에서 'NO FTA'라는 글귀가 적힌 풍선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모습.ⓒ프레시안

그러나 노동자 집회는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한쪽으로만 보게 되어 있는 무대를 원형으로 만드는 시도도 해보았고, 무대를 낮춰보기도 했다. 지도부들만이 아니라 조합원들을 무대에 올려보기도 했다. 행진도 풍성하게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가보면 금새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조합원들하고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위원장실이 어디를 막론하고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이 막힌 채, '비까번쩍'하게.

조합원들이 들어가려면 뭔가 찝찝하고 위압감이 들게 돼있는 그 위원장실의 문턱 높이만큼 노조의 문화도 경직되고 위계화 되어 있다. 아직도 노조 행사 때 위원장이 입장하면 기립박수를 치는 노조가 있고, 조합원게시판에 지도부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삭제하는 일이 다반사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런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바꾸지 않고 집회문화가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문화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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