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내신 실질 반영률 문제로 빚어진 정부와 대학의 마찰을 지켜본 이들의 탄식이다. 교육당국의 일관성 없는 태도가 문제를 키웠다는 것.
'공교육 살리기' 위해 고안된 2008년 입시제도
"학생과 학부모가 공교육을 외면하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학생부(내신) 중심의 입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라는 게 내년부터 적용되는 새 입시제도의 취지였다.
수학능력고사(수능) 점수를 등급화하여 실질 반영률을 낮추는 것, '3불 정책' 유지를 통해 본고사와 고교 등급제를 계속 금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즉 한두 차례의 시험을 잘 치른 학생보다 평소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한 학생에게 유리한 입시제도를 만들겠다는 시도였다. 그리고 농어촌이건 도시 빈민 지역이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을 열심히 받은 학생이면 서울 강남 지역 학생과 동등한 조건에서 입시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또 내신을 중시하는 제도가 "가르친 자가 평가한다"는 교육학의 주요 원리에도 더 부합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만회 불가능한 내신 성적…지나친 경쟁은 학생 인권 침해
하지만 이런 취지의 정책이 현실에 적용되자 부작용이 생겼다. 실수를 하더라도 재수를 통해 만회할 수 있는 수능과 달리 내신 성적은 만회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새 입시제도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첫 세대인 당시 고교 1학년 학생(현 3학년)들은 심한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
매 학기마다 치르는 중간, 기말 고사마다 마치 대입 수능을 치를 때 만큼의 부담을 느낀다는 것. "2005년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수능보다 더 긴장되는 시험을 12번 치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매 학기 중간, 기말 고사가 총 12차례라는 뜻이다. (☞관련 기사 : "김진표 부총리, 현실부터 똑바로 아시오"…[고1 학부모의 소리] "아이들은 3년새 12번 자살충돌을 느낄 거요" )
게다가 전국 단위의 경쟁을 치르는 수능과 달리 내신 성적은 개별 학교 단위의 경쟁을 통해 산출되는 탓에 학생들이 친구에게 공책 빌려주는 것도 꺼리는 등 교실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변했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생 인권'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관련 기사 : 청소년 인권, 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의제)
학생들의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촛불의 의미는 본고사 부활이 아니다"
결국 지난 2005년 초, 입시 부담감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반발하는 고교생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를 벌였다. (☞관련 기사 : 고교생 또 자살, 두 달 새 10명 희생)
"고등학생이 입시제도에 반발해 촛불을 든다"는 사상 초유의 사건은 언론의 관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관련 기사 : 7일 고교생 촛불시위 선언에 교육부 '우왕좌왕', 교육당국-경찰, '고1 촛불집회' 초비상 , 고1 광화문 촛불집회 열려, "친구와 경쟁하는 교실 싫어요" )
그러자 교육부는 학생들에게 "내신 부담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내신 중심의 입시제도를 만들어 놓고 학생들에게는 "내신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
이처럼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대학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내신 중심' 입시 제도 추진에 대한 교육부의 의지가 실제로는 강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학생과 학부모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이 무렵 내신 중심 입시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매체들은 청소년들의 촛불 시위와 잇따른 자살, 그리고 교육부의 애매한 태도 등을 '대입 본고사 부활'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했다.
반면 같은 시기 전교조 등 교육운동 진영은 "촛불의 의미는 본고사 부활이 아니다"라며 보수 매체의 주장을 견제했다. 학벌과 직업에 따른 불평등이 여전한 상황에서는 어떤 입시제도가 도입돼도 학생들의 고통은 줄어들수 없으며, 오히려 보수 매체들의 주장처럼 본고사가 허용되면 사교육 팽창 등의 부작용만 낳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부작용 속에서 학생들은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이다.(☞관련 기사 : "일제의 유산, 압축성장의 산물...교육전쟁" )
실제로 이런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입시 학원 관계자들은 한국의 사교육이 1995년 무렵을 계기로 급격히 팽창했다고 지적한다. 일부 대학이 본고사를 부활시켰던 시기와 겹친다.
그런데 새 대입 제도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 움직임이 수그러들면서 이런 논란도 금세 잦아들었다. 지난해 '죽음의 트라이 앵글'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온라인 공간에 유포되면서 새 대입 제도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죽음의 트라이 앵글'이란 내신, 논술, 수능의 세 가지를 모두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힘든 처지를 가리킨 표현이다.
결국 새 대입 제도의 긍정적 취지를 살리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어졌다. (☞관련 기사 : "서울대 입시안, '뻔한 타협' 그리고 남는 문제들" )
2008년 입시제도 취지 거스르는 움직임 가속화…교육부는 묵인
그리고 올해 초 고려대는 내년도 입시에서 '수능 우선 선발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새 대입제도의 취지와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고려대의 이런 움직임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사립대학들을 자극했다. 대학들은 대체로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목고 학생을 많이 뽑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새 대입제도는 아무래도 특목고 및 서울 강남 출신 학생에게 불리하다. 반면 고려대처럼 내신의 반영율을 줄이고 수능의 비중을 늘리면 이들 학생에게 유리해진다.
그래서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도 앞다투어 내신의 실질 반영률을 크게 낮추는 쪽으로 내부 입장을 정했다. 서울대 역시 내신 1, 2등급을 모두 만점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체로 합리적"이라더니, 뒤늦게 "'판단 착오'였다"는 교육부
하지만 대학들의 이런 움직임이 가시화된 올해 3월에도 교육부는 "새 대입제도가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서울대의 방침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리적이다"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난 13일 갑작스레 "'내신 무력화'하는 대학들에 대해 예산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에는 한덕수 총리 주재로 열린 긴급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 차원의 강경 대응 방침을 정했다. 같은 날 열린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내신 무력화'는 고교등급제로 가는 길"이라면서 "최근 몇몇 대학의 조치는 학생들을 혼란에 빠트릴 우려가 있다"고 말한 게 계기였다. (☞관련 기사 : 교육부, '내신 무시' 사립대에 예산지원 전면 중단, 한덕수 총리 "내신 무시 대학에 강력 대응" , 서울대 "입시안 강행"…교육부 "제재 불가피")
심지어 입시안에 대해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던 교육부 관계자가 뒤늦게 "'판단 착오'였다"고 밝히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런 혼란이 2008년부터 적용되는 새 대입제도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조차 교육부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 상황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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