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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벌거벗은 육체를 감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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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벌거벗은 육체를 감싸다

[별을 쏘다⑪] 효도르와 크로캅

<2005.08.28. PRIDE GP FINAL ROUND "Fedor Vs. Crocop">

2005년 8월 28일. 일본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이종격투기 단체 PRIDE의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PRIDE 헤비급 챔피언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는 이종격투기에 진출한 후 공식적으로 단 한번의 패배만을 기록한 현존 최강의 격투가였다. 그리고 그 공식적인 1패조차도 컷과 과다출혈에 의한 닥터스톱 때문이었고, 완패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도전자는 미르코 크로캅 필로포비치.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헤비급의 최고수중 한 명이었다. 효도르에 비해 패배는 많았지만 그의 강점은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였다. 수많은 헤비급의 강자들이 그의 강력한 하이킥을 맞고 캔버스 위로 고꾸라졌다. 당시 세계 이종격투기 랭킹 2위였던 크로캅은 공공연히 챔피언 효도르와의 맞대결을 요구해왔고, 비로소 이날 효도르와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명승부, 그리고 서울에서 벌어진 또 다른 '한 판'
▲ 지난 2005년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을 벌이고 있는 효도르와 크로캅 ⓒcrocopfedor.skyrock.com

같은 시간 서울 시내 한 극장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필자 역시 이들 중 한명이었다). 한국 내 PRIDE 중계권을 독점한 케이블 채널 <XTM>은 극장을 대관해 대형 스크린으로 이 날의 경기를 생중계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미 <XTM>은 경기 시작 몇 주 전부터 집중적인 홍보에 돌입해 있었다. 이벤트를 참가하지 못한 더 많은 팬들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됐다.

중앙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크로캅의 팬들이, 오른쪽에는 효도르의 팬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XTM>에서 제공한 빨간 막대 풍선과 흰 막대 풍선으로 요란한 응원의 함성들을 내질렀다. 두 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탄성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이 날의 경기는 먹을 것 없는 여느 소문난 잔치가 아니었다. 크로캅과 효도르는 자신들이 연마하고 준비한 모든 기술과 전략을 보여줬기에 승자와 패자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효도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왜 '60억분의 1의 사나이'로 불리는지를 각인시켰고, 크로캅은 분루를 삼키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정치경제학

이 이벤트는 단순히 두 격투가의 헤비급 타이틀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정치경제학이 놓여있다. 특히 경기가 열렸던 2005년이 한국에 케이블 TV가 도입된 지 10년째가 된 해라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경기 후 <XTM>은 "생중계로 전파를 탄 '프라이드 미들급 그랑프리대회'가 케이블 TV 시청률 1위(4.44%), 케이블 TV 일일시청률 1위(1.45%)를 차지했고, 18~34세 남자 시청자의 시청률은 지상파를 포함해 전체 1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또 "6.033%를 기록한 효도르와 크로캅 경기의 순간 시청률은 모 지상파 방송사를 제치는 기염을 토했다"고 말한다.

<KBS 스카이 스포츠>가 사회적·공적 책임을 이유로 이종격투기 중계에서 손을 뗀 틈을 <XTM>이 비집고 들어가 금맥을 찾은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에게 공적 책임과 사회적 책무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날 시청률의 승리는 단순히 숙명의 라이벌 대결 간에 얻어진 효도르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사적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공적·사회적 지상파 방송에 거둔 승리이기도 했다.

이후 이종격투기 중계를 둘러싸고 고삐풀린 엔터테인먼트 자본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K-1은 <MBC ESPN>에서 CJ 계열의 <XTM>으로, PRIDE는 온라인의 경우 <다음>, 케이블의 경우 <XTM>에서 오리온 계열의 <슈퍼 액션>으로 이동한다. PRIDE와 함께 세계 이종격투기를 양분했던 UFC는 CJ 계열의 <Xsports>에서 <슈퍼 액션>으로 자리를 옮겼다. 숭고했던 것처럼 보였던 두 고수의 대결은 이종격투기를 둘러싼 국내 자본 간의 무한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셈이었다.

드라마로 한번 더 태어나는 격투기

또 이날 <XTM>이 극장에 운집한 팬들을 상대로 <GO! 슈퍼 코리안> 런칭 행사를 연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XTM>은 UFC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했다. UFC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TUF(The Ultimate Fighter)를 통해 이종격투기를 알리고, 시청자에게 이종격투기의 리터러시(literacy·지식)를 학습시키며, 10분 남짓한 격투에 6개월여의 서사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하룻동안 벌어지는 격투기뿐만 아니라 이 하루를 준비하기 위한 6개월의 서사 역시 또 다른 상품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로써 이종격투기는 싸움이 아닌 드라마가 될 수 있었고, 시즌이 되며, 고부가가치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이런 UFC의 전략을 본 따 <XTM>은 국내 이종격투기 리그인 '스피릿 M.C.'에 주목했다. '스피릿 M.C.'에서 각광받고 있던 최영, 임재석, 백종권, 임재선이 이날의 행사에 초대됐고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국내 이종격투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무대에 선 이들은 극장을 찾아온 팬들 앞에서 '슈퍼 코리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개척하는 새로운 '토착 시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 스스로의 것만은 아니다"
▲ 프라이드FC 헤비급 챔피언 효도르 선수. "크로캅의 이적과 새로운 도전, 그리고 세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며 PRIDE를 지키고 있는 효도르는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정치경제학에서 파악되어야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뉴시스(IB SPORTS 제공)

이종격투기는 국내 자본에게만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은 아니었다. UFC는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상대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이종격투기 단체보다 유리한 지점에 있을 수 있었다. '리얼리티 쇼'를 통해 잠재적 수요를 창출해 내고 이를 거대한 페이-퍼-뷰(pay per view·프로그램별로 시청료를 지불하는 방식) 수요로 전환시키는 능력은 PRIDE가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UFC는 PRIDE의 간판스타 크로캅을 이적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UFC 헤비급의 판도는 급변했다. 효도르와 크로캅의 리턴매치를 기대하던 많은 PRIDE 팬들에게 이 사건은 경악할만한 것이었다. 크로캅은 비겁자,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효도르는 '의리의 사나이'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는 크로캅과 효도르라는 '스타'를 쏜 빛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서문에서 밝혔던 바는 이 두 스타에게도 적용된다.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일 때에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개인이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런 관계를 초월하고 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따라서 크로캅의 이적과 새로운 도전, 그리고 세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며 PRIDE를 지키고 있는 효도르는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정치경제학에서 파악되어야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PRIDE가 자본의 불투명성을 이유로 중계를 담당했던 후지 TV와 결별하고 난 후 재정난 속에서 지난 3월 UFC에 경영권이 이양된 것은 바로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보여준다.

변방에 있던 이종격투기는 90년대를 거쳐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부상했고,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수많은 자본의 경쟁 속에서 UFC는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엔터테인먼트 자본 간의 위계가 수립됐으며, 한국의 케이블TV 역시 그 중계권을 서로 바꿔가며 이에 기생하고 있다.

폭력의 카타르시스, 그리고 소비자를 만드는 공급자들

물론, 이종격투기에만 자본의 논리가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스포츠 모두가 결코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부자 구단이 리그를 지배해온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 않나. 자본은 이윤을 창출할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이를 시장의 영역으로 재편하고 팬들을 소비자로 전환시킨다.

동구 출신의 효도르와 크로캅이 이종격투기계의 아이콘이 된 것 역시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구소련의 영재 체육 교육으로 촉망받았던 유도선수 효도르가 2000년대 종합격투가로 탈바꿈해 사각의 링에서 싸우고 있다. 냉전 종식 후 동유럽에 불어닥친 내전의 참사를 이겨낸 크로캅은 일본을 거쳐 미국의 케이지(cage) 한 가운데 우뚝 서있다.

이종격투기를 두고 가장 원초적인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한 배경을 보면, 가장 인공적인 엔터테인먼트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종격투기가 제공하는 쾌락은 한편으로 원초적 자극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본의 인공적 가미료가 자극하는, 죄스러운 쾌락(guilty pleasure)의 하나가 돼버린다. 벌거벗은 육체를 휘감은 투명한 자본의 망토가 이종격투기의 이면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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