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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에게 X표를 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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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에게 X표를 그었나"

[별을 쏘다⑥] X세대의 자화상, '신바람 3인방'

1990년대 초 (어쩌면 80년대 후반에)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호들갑스럽게 그들을 신세대라 불렀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20대를 살아가고 지금은 30대를 넘긴 이들. 물론 그들은 당시 기성세대에 비해 신세대였다. 어른들은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알듯 모를듯 한 세대라며 X표를 그어버렸다.

그들은 광고를 통해 화려하게 주목 받았다(터프한 이미지의 이병헌과 귀공자풍 이미지의 김원준의 '트윈엑스'라는 남성용 화장품 광고가 대표적이다). 비록 신세대의 건강함과 창조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소비자의 등장이라고 이야기됐지만 X세대는 상업적으로 더욱 크게 유행했다. X세대는 혼란과 무질서 상태의 소비사회를 자기중심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자로, 알튀세르(Althusser)의 표현을 사용하면 호명(interpellation)돼 버린 것이다.

'호명'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들에게 주체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어 고정돼버린다'는 뜻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주체'란 능동적이거나 주체적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역할이 고정돼버린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세대론은 특정 세대를 호명하고 이미지를 고정화해 족쇄를 채워버리는 낡은 역할, 또는 상업적으로 변질돼 이따금 마케팅을 위한 상술의 도구로 쓰일 뿐이다.

X세대로 '호명'됐던 1990년 초반의 20대

프로야구 그라운드에서도 신세대 열풍은 예외가 아니었다. 기존의 야구팀과 다른 신세대 팀과 선수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락부락하고 촌스러운 야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모던한 서울을 연고로 한 'LG 트윈스'였다.

현재의 LG 그룹은 예전에는 럭키금성(영어명으로 Gold Star)이라고 불렸다. 1990년에 럭키금성은 약 100억 원을 들여 MBC 청룡 야구단을 인수했다. 이들의 이름은 정감어린 '럭키금성' 대신 그룹 내부의 공모를 통해 'LG 트윈스'로 결정된다. 럭키금성에서 LG로 전면적으로 CI(corporate identity)를 교체하는 1995년까지 LG 트윈스 야구단의 역할은 럭키금성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LG트윈스 야구단은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창단 첫 해부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우승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비록 럭키금성이 매입하기 이전 MBC 청룡이 1989년 선수단 항명사건 등으로 내부가 어수선했고, 간신히 최하위(최하위는 롯데였다)를 면하는 등 엉망진창이었지만, 1990년의 우승은 그 어수선함 속에서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등의 중고참 선수들의 단합의 결과였다. 그리고 선수들이 직접 추대한 '혼의 야구' 백인천 감독의 세세한 작전구사능력(특히 히트 앤 런 작전) 때문이었다.

백인천 감독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때 투수의 1구, 1구까지 세밀하게 작전 지시를 내리는 근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백인천 감독의 '근성의 야구' 스타일은 LG 프론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럭키금성의 프론트는 점점 감독과 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며 감독과의 계약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다혈질과 기분파인 백인천 감독은 의욕을 잃어버리며 다음해 LG 트윈스는 무기력하게 추락하게 된다.

1994년, 야구장에도 '신세대 스타'가 등장했다

창단 우승의 밑바탕인 근성과 끈기는 같은 서울팀인 두산 베어스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프로야구는 어느 팀이나 대부분 근성과 '깡다구'로 플레이했기에 타 구단과 차별화 될 수 없었다. LG가 바라던 것은 서울팀이라는 자존심과 도회지적 세련됨이었다.

그래서 OB에서 10연패로 중도해임 된 이광한 감독의 '자율야구'를 끌어오게 된다. 자율야구란 미국식 야구의 상징이었다. 선수들의 각자의 능력에 의지하며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자는 '자율야구' 스타일은 기업 이미지의 세련됨에 기여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선수들의 스타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율야구는 당시 스타군단 해태 김응룡 감독의 야구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태와 달리 LG는 자율야구를 소화하기엔 스타들이 부족했었다.

그러다 1994년, 야구장에도 드디어 신세대 스타가 등장했다. 그 당시 모든 신세대가 그랬듯 등장은 화려했다. 언론에서는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를 '신바람야구'라고 불렀다. 그들이 흔히 우리가 LG의 '신바람 삼인방'으로 기억하는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이었다.
▲ 1994년 '신바람 삼인방'의 모습

허리케인 서용빈, 꾀돌이 유지현, 캐논히터 김재현!

이들의 등장은 야구판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 전에도 야구장에 오빠부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성 야구팬들이 이들의 야구 하는 모습을 라이브로 감상하기 위해 콘서트장을 찾는 마음으로 야구장을 찾았다. 이들은 기존의 땀냄새만 날 것 같은 우락부락한 야구선수의 이미지와 분명 달랐다. 허리케인 서용빈의 예술 같은 다리 찢기 수비, 꾀돌이 유지현의 재치 넘치는 주루 플레이, 캐논히터 김재현의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홈런포. 이들의 허슬 플레이는 야구장을 마치 콘서트장처럼 달궜다. 이들 때문에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도 많이 생겼다.

게다가 이들은 신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적을 올렸다. 그 당시 LG의 이상적인 공격패턴은 톱타자 유지현이 투수를 잔뜩 괴롭히다 출루, 교란해 재빠르게 2루를 훔치고, 2번타자 김재현의 안타를 시작으로 이후 3번 서용빈, 4번 해결사 한대화, 5번 검객 노찬엽으로 이어지는 연속안타 행진이었다. 언론에서는 이광환 감독이 추구한다는 자율야구를 '신바람야구'라고 불렀다. 신바람야구는 감독의 작전 능력보다 선수들의 능력을 존중해 선수들의 자율과 창의적 능력이 강조됐다. 놀랍게도 테이블 세터인 1, 2번과 중심타자인 3번 타자의 자리를 신인타자로 채웠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X세대 3인방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X세대를 대변하듯 개성 넘치는 플레이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 그들이 있어, LG 팬들은 행복했었다.

1994년도 LG의 X세대 3인방의 성적표는 이렇다.

유지현 → 15홈런 51타점 51도루 타율 0.305 / 신인왕
김재현 → 21홈런 80타점 21도루 타율 0.289 / 신인 최초 20-20클럽, 골든글러브
서용빈 → 4홈런 72타점 타율 0.318 / 사이클링 히트, 골든글러브


대박 터트린 뒤 불성실해진 기획사처럼…
▲ 1995년 5월 서울 잠실에서 열린 프로야구 쌍방울-LG 전에서 1회말 포볼로 진루한 유지현 선수. 그는 김재현 선수 타석때 도루를 시도, 쌍방울 유격수 김홍 선수가 견제구를 놓치는 사이 2루에 안착했다. ⓒ연합뉴스

"내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야구를 통해 대한민국 최고를 지향하는 기업인 럭키금성이라는 회사를 글로벌 LG로 알릴 수 있는 초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90년대 회사명을 바꾸면서 LG 야구단을 통해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 'LG'라는 기업명을 확실히 인지시켰다. LG와 야구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코드다.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경영층에게 LG를 설명하는 말이 '야구 안에 LG 있다-Baseball makes Life is Good(LG)'는 것이다."

- <경향신문> 2007년 4월 5일 '2007 드라마-그라운드의 평등·경영·인생·역사 시작된다' 중


김영수 사장의 인터뷰에서처럼 LG 그룹은 야구단 LG 트윈스 덕분에 기업 이미지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정착시킬 수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럭키금성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이면서 세련된 이미지의 LG로 기업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1994년에 LG 트윈스의 우승 기념으로 나온 책 <LG, 이광환&자율야구>(1994년, 지성사)에서 이 감독은 "우리는 작은 의미에서 LG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다. 우리 야구단이 깨끗하고 신사다운 야구를 하면 우리 그룹 전체가 바로 그렇게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X세대 3인방'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아마도 LG 트윈스의 사례는 기업이 프로야구를 홍보의 수단으로 가장 잘 이용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룹 차원에서 LG 브랜드가 정착되자 그 이후 야구단에 기울이는 애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마치 대박을 터트리고 불성실해진 매니지먼트 기획사처럼, 선수(임선동, 이상훈, 김재현 등)들과의 잦은 마찰(2000년 선수협 파동, 2002년 유지현과 이병규의 연봉조정 문제)을 빚었고 일곱 차례에 걸쳐 감독을 교체하며 데려오는 용병마다 실패하는 등 온갖 풍파를 겪으며 특유의 신바람 야구는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된다. 성적 역시 기복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뚜렷한 하향세를 그리더니 2006년에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꼴찌를 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자율야구, 신바람 야구는 2007년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면서 1루에 주자만 나가면 본능적으로 번트를 하는 조직적인 야구로 변했다.

X세대 3인방의 방황도 함께 진행되다
▲ 지난 1월 파경을 맞은 서용빈-유혜정 부부 ⓒ뉴시스

X세대 3인방 역시 마치 데뷔앨범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갑작스런 인기에 방황하는 신세대 그룹과 같았다. 비록 그 뒤에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유지한 때도 있었지만 데뷔 원년과 비교해 완만한 하향세를 보였다. 서용빈은 1999년도에 병역비리로 구속되기도 했고 제대 후에는 2군을 전전하다 은퇴했다. 또 배우 유혜정 씨와의 결혼과 이혼으로 사생활이 오히려 관심을 끌었다. 유지현은 나름대로 LG를 잘 이끌어가다가 2000년 이후 박용택과 같은 후배들에게 밀리기 시작하더니 2004년에 빠르게 은퇴를 결정해 버렸다.

김재현만이 야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마저 지금 SK 소속으로 뛰고 있다. 부상으로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힘들게 재기하려는 선수에게 구단은 각서를 요구하고 은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FA로 풀리자마자 LG 트윈스를 떠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화려한 인기 이후 병역비리로 구설수에 오르고 소속사와 불화를 겪다가 시들어버려 인기에 고민하는 대중 연예인과 같은 말로를 겪었다. 그들은 소속구단의 이미지에 큰 기여를 했지만 정당한 대접을 받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버려지거나 빠르게 사라지며 잊혀져버렸다.

그들의 야구인생에서 X세대의 자화상을 엿본다
▲ 지난해 7월 9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SK와 두산 경기에서 김재현 선수가 솔로홈런을 치고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나에겐 이들 3인방의 야구인생이 어쩌면 X세대라고 불리던 세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386세대와 다르게 촛불시위 등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정치 참여를 시도했던 그들의 역할은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다. 이젠 시대를 앞선 그들의 개성이 새로운 문화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이들도 없다. 그저 IMF 환란을 맞아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신세로 불쌍해져버렸다. 좁아진 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하고 힘들어 했다. 쉽게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한 386세대와 달리 이들의 미래는 아직까지도 불안정하다. 누군가는 여전히 희망을 잃은 채 백수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 사이 아랫세대들은 그들과 차원이 다른 부유한 경제사회적 환경에서 자라나 어학연수나 조기유학의 수혜로 영어로 무장하고 벌써부터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빠르면 대리 또는 팀장의 명함을 가진 이들도 퇴근 후면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하거나 투잡(two-job)을 준비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을 이젠 아무도 신세대라고 불러주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신세대론의 화려한 시절을 가버리고 소비사회의 의무에 충실한 조직원이 되어 살아가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10년 전에 호명된 X세대들은 선행세대(386세대)와 후세대(W세대·월드컵세대) 사이에 끼어 희생번트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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