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데모나 하는 새끼들,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데…."
고(故)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18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지나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계속 구시렁댔다. "허세욱 씨도 당신처럼 택시 기사였어요"라는 말이 목으로 넘어오려 했지만, 그냥 꾹 눌러 삼켰다.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이런 반응이 그다지 낯설지 않아서다. 각종 온라인 뉴스 사이트에 실린 고 허세욱 씨 관련 기사의 댓글 중에도 이런 내용이 흔하다. "택시 기사가 FTA에 대해 뭘 안다고…." "FTA가 택시 기사와 관계가 있나요? 별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분신을 한 거죠" 등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게 적나라한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
잠시 머뭇대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택시 기사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FTA는 해야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잖아요. 농민들이야 손해보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죠." 대화가 멎었다. 너무 익숙한 반응이어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 택시 기사처럼 한미FTA를 찬성하는 측도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이 있다는 데는 대개 동의한다. 대신 이렇게 피해를 보는 경우보다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판단이 정확한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리다.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한미FTA로 피해보는 이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면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고 여기고 있다면 분명히 병리적 상황이다. 자신이 누리게 될 이익이 약자의 피해를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당연시하는 게 정상일 리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질환일 수 있다.
앞서의 상황에서라면 "(피해보는 측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찬성한다"는 게 정상이다.
조승희 씨와 한국 사회의 닮은 점…남의 아픔에 공감 못 해
그런데 FTA 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접한 이날, 대부분의 매체가 하필 '총기난사'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버지니아공대 학생 조승희 씨의 총기난사 사건이다.
조 씨의 범행동기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직은 명확한 게 없다. 조 씨는 어떤 이유로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게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총에 맞아 희생될 이들,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 하고 있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누군가는 한미FTA로 피해를 본다"고 여기면서도 FTA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과 닮았다.
"내가 힘드니, 남은 덜 힘들었으면" vs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고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서울 시청 근처를 다 지나갔을 때, 택시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허세욱 씨)도 택시를 몰았다던데…. 택시 기사 중에 안 힘든 사람 있나요. 다 힘들지. 그렇다고 죽긴 왜 죽나."
"허세욱 씨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한미FTA가 체결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거예요." 맥없는 대답을 내놓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관련기사 : "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 "늘 따뜻했던 당신을 어찌 잊을까요" )
힘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힘들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 허세욱 씨가 이런 경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또 내가 괴로우니 남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사람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 하던 다른 이들이 자신처럼 고통을 겪고나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승희 씨가 이런 경우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만 힘드냐,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만 뇌까리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이 있다. 앞서의 택시 기사, 그리고 허세욱 씨의 죽음을 비아냥대는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버지니아공대 희생자는 애도하면서, 허세욱에 대해서는 무관심
우리 사회는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데, 이날 저녁 서울 시청 앞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대부분의 언론이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청와대도 가세했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조 씨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들의 수에 맞춰 32일간 금식하겠다고까지 밝혔다(☞ 관련기사 : <조선일보>, 총기난사 추모게시판 개설, 이태식 주미대사, 32일간 자성의 금식 제안 ).
다행이다 싶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나라 전체가 슬퍼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이상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보도가 넘치는 가운데, 허세욱 씨의 장례식을 다룬 기사는 드물었다. 그리고 허 씨의 장례식을 다룬 얼마 안 되는 기사에 대한 악성댓글도 여전했다. 버지니아 참사에 대해 세 차례나 애도 메시지를 발표했던 청와대가 허세욱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했다.
대한민국. 참 이상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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